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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처럼 생각하는 사람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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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말씀 : 마태복음 13장 24절~30절

설교제목 : 산처럼 생각하는 사람

 

【예수께서 그들에게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그래서 주인의 종들이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였다.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그것과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거둘 때가 될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게 내버려 두어라. 거둘 때에, 내가 일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24~30)】

 

  <책 이야기>

  최근 『현대 생태사상과 그리스도교』(바오로딸)라는 책을 의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거기 이런 내용(‘생태윤리의 시작’, 90쪽~93쪽)이 나옵니다.


【환경운동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인물 가운데 ‘레오폴드’라는 이가 있답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예일대학교에서 산림학을 전공하고, 1909년~1924년까지 15년 동안 산림청에 근무하면서 미국의 서남부 지역인 아리조나·뉴멕시코에서 산림과 국립공원을 보호하는 일을 했습니다. 산림보존 일을 하면서 그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던 자연보호 개념이 인간중심적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를 갖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보호를 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레오폴드는 산림청에서 자신이 체험한 이야기를 ‘산처럼 생각하기’(Thinging like a Mountain)이라는 다섯 쪽의 짧은 글로 썼습니다.


  레오폴드가 산림보호 일을 하던 당시 어느 날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강을 거슬러 헤엄쳐 그들이 점심을 먹고 있는 쪽 물가로 올라왔습니다. 처음에는 사슴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가만히 보니까 늑대였습니다. 어미 늑대를 시작으로 대 여섯 마리 새끼 늑대들이 강가에서 신나게 어울려 노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1910년~1920년대 미국 산림청에서는 늑대를 보면 죽이라고 했습니다.


  늑대를 다 죽여야 사슴이 살 수 있고, 사슴이 많아지면 산림보호가 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마음 놓고 사슴 사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육식동물은 악(惡)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동물을 찢어 먹는 것이 잔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적인 악을 없애는 것이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레오폴드는 늑대를 보고 바로 내려가 총을 쏘았습니다. 새끼 늑대들은 다 도망갔는데, 늙은 어미 늑대가 총에 맞았습니다. 늑대가 죽어가는 장면을 본 레오폴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늙은 늑대에게 다가가 그 눈에서 푸른 불꽃이 사그라드는 것을 보았다. 나는 늑대의 눈에서 무언가 내가 모르는 새로운 것, 늑대와 저 산만이 알고 있는 것이 있음을 순간 깨달았고, 그 이후 단 한 번도 그걸 잊은 적이 없다.”

  레오폴드는 죽어가는 늑대를 바라보면서, 그 강한 푸른 눈빛에서 자신이 전에는 몰랐던 무언가를 느낍니다. 자기는 모르는 생태계의 넓은 그물망의 비밀을 늑대와 산만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늑대를 죽인 결과 그 지역에서 늑대는 전멸했습니다. 천적이던 늑대가 없어져 사슴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많아진 사슴들은 주위에 있는 모든 풀과 덤불을 남기지 않고 먹어치웠습니다. 그러면서 산은 민둥산이 되어 버렸고, 사슴은 먹을 것을 찾지 못해 굶어죽었습니다. 오히려 늑대가 사슴을 잡아 먹어 적당하게 조절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사슴 무리 전체에 더 좋았던 것입니다. 자연조절인 셈이지요.】


  이 글의 필자 김승혜 수녀님은 레오폴드의 ‘산처럼 생각하기’를 단순히 환경운동의 맥락에서만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저는 이점에 생각의 초점을 두려합니다. 김 수녀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레오폴드의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아 나도 산처럼 생각하지 못했구나’하고 감탄했습니다. 저 또한 사자나 호랑이 같은 육식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레오폴드를 통해 그것이 자연의 조화 안에서 하나의 부분임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산처럼 생각하기’에서 레오폴드는, 하나하나의 생명체도 중요하지만 그 개체가 어떻게 무리를 이루어 전체 생명이 지속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이는 우리 삶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가끔 우리는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르면 섣불리 그 사람을 비난하고, 그를 바꾸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레오폴드가 가르치는 것처럼 산처럼 기다리고 전체 균형이 맞도록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비유 안에서 가라지를 뽑아 없애지 말고 추수 때까지 익도록 놓아둔다고 하셨습니다. 너무 빨리 뽑아버리려다 자칫 좋은 곡식도 뽑게 되기 때문입니다. ‘산처럼 생각하기’를 통해 우리가 보기에 자연 안에 선과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산과 같은 여유를 가지고 좀 더 깊이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산처럼 생각하기’ 생각의 확대>

  저는 김승혜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리고 레오폴드가 일깨워준 ‘산처럼 생각하기’라는 말이 참 좋았습니다. 그 말은 정말 훌륭한 말입니다. 이는 단순히 환경운동차원에서 잠깐 생각해보는 ‘학술적 용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더 넓고, 더 깊고, 더 높고, 더 신비롭고 아름다운 말입니다.


‘산처럼 생각하기’는 더 복잡하게 생각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단선적인 생각이 아니라, 복선적인 생각입니다. 다차원적인 생각의 틀입니다. 현재의 기분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의 과정을 생각하는 것이고, 또 그 결과의 내용까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적 즉 상대편의 생각도 넉넉하게 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역설의 진실, 그리고 역역설의 타당한 이유도 생각할 줄 아는 높은 차원의 지혜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그래서 주인의 종들이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였다.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그것과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거둘 때가 될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게 내버려 두어라. 거둘 때에, 내가 일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24~30)】


  여기 밀밭이 있는데, 그곳에는 가라지도 섞여 있습니다. 선과 악의 섞임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태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대다수의 의견은 가라지 즉 악(惡)을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단 악을 뽑으려다가 선(善)이 상처를 입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그것과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예수님께서 대안으로 말씀하신 메시지는 “최대한 기다리는 것”입니다. 추수 때까지, 즉 세상의 종말 때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왜 일까요? 저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미처 말씀하시지 못한 이야기를 상상해 보는데, 그것은- 우리가 종말 때까지 ‘가라지’를 그래도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그 흉악한 가라지가 밀 이삭으로 바뀌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밀과 가라지 이야기 ‘확대’>

  ‘밀과 가라지’에 대해서 산처럼 생각하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도 그렇고, 인간관계 속에서, 사회생활 속에서, 교회 생활 속에서, 국가간의 외교관계에서도, 인류의 다양한 공동체 속에서도 너무나도 중요한 차원입니다.


  최근 남북 관계 이야기가 좋은 사례일 것입니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상정해 놓고, 그 악의 축을 뽑아버려야만 한반도에 평화가 온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북한이 100% 악의 축도 아닐 것입니다만, 설사 악의 축이라고 해도, 평화의 해법을 그렇게 찾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발상입니다. 왜냐하면 가리지를 뽑아버리려는 생각은 ‘산처럼 생각하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산처럼 생각하기’는 한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원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산처럼 생각하기’는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 때까지, 가라지조차도 밀 이삭이 될 수 있는 ‘부활’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산처럼 생각하기’는 끝까지 친구임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네가 내 빰을 한 대 때렸으니 나는 네 뺨을 두 대 때리겠다?” 이게 아닙니다. “나는 네가 어떠하든지 간에, 이 세상 종말 때까지 너의 친구임을 포기하지 않겠다.” 바로 이런 태도입니다. 그게 산처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산처럼 생각하는 사람’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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