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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완전하심 같이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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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 : 마태복음 5장 43절~48절

설교제목 : “하느님의 완전하심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한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태 5:43~48)】

 

  <사람 이야기>

  최근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을 보니까, 판화를 그리시는 이철수 선생이 나왔습니다. 그 양반 기사를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이 선생의 인터뷰 기사들을 부분적으로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 조정래 선생을 인터뷰했는데, <허수아비춤>처럼 소설 속에 해법과 대안을 다 제시한 적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그만큼 자본권력에 침식당한 이 사회의 상황이 절박하게 느껴졌다는 것일 텐데요. '나뭇잎 편지'에 한미FTA 같은 시사적인 주제가 올라오는 것도 비슷한 심정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기자의 질문)


  "FTA도 절박하고, 비정규직 문제도 절박하죠. 그런데 개인적으로 나는 더 절박하다고 느끼는 건 그 속에조차 에누리없이 숨어 있는 우리들 자신의 탐욕 문제라고 생각해요. 탐욕의 사회화, 탐욕의 보편화…. 그것 때문에 FTA 문제도, 비정규직 문제도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해요. 질주하고 있는 욕망의 쾌속 주행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게 단순히 가난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늘 있어요.


  욕 얻어먹기 좋지만, 이 얘기를 꼭 해야 할 것 같아요. 리영희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보낸 엽서에 "새는 좌우의 날개가 아니라 온몸으로 난다"고 써놓은 것도, (독수리 그림이 새겨진 작업 중인 큰 목판을 가리키며) 저 그림이 그런 이야기를 담은 거예요. 우리 사회가 좌우 대립 속에서 좌측 결핍에 관한 문제로 너무 오랫동안 끌려왔어요. 나는 그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에요. 좌측 결핍이 오래되었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해요. 해소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데 그것을 보느라 온몸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요.


  새는 좌우의 날개만으로 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야말로 심장이나 다른 부분을 포함한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날아가고 있는 셈인데. 앞으로 나올 그림들은 온 마음으로 나는 그림도 있고, 터질 것 같은 심장으로 나는 그림도 있고, 그런 부분들을 담게 될 거예요. 생명에 대한 온전한 인식이 실종됐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한 살 차이지만, 장일순 선생이 리영희 선생에게 형님 노릇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존재와 생명에 대한 통찰의 깊이가 달랐던 것 때문입니다. 표현이 좀 통속적이지만 거기에는 스승에 대한 존경이나 폭넓은 통찰에 대한 존경과 경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리영희 선생도 그런 것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고. 우리 사회가 이제는 (좌우의 날개를 넘어) 온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때가 됐어요.


  리영희 선생의 시대가 선생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진화하고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좌만도 아니고, 돈의 많고 적음에 대한 문제뿐만이 아니잖아요. 그냥 돈 좀 더 주면 괜찮은 건가요? 삼성에서는 노조를 못하는 대신 돈은 많이 주려고 애쓴다면서요? 그럼 되는 건가요? 그리고 노조만 있으면 다 되는 건가요? 돈을 많이 주는 대기업에 들어가서 만족하겠다는 순진한 인식까지 뭐라고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어디에 처해있건 세상에서 낫다고 평가되는 조건의 사람들조차 얻지 못하는 마음의 평화를 어디 가서든 얻어야 할 것 아닌가요? 작은 소득에 소박한 밥상 가지고도 깊은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세상에도 많이 있잖아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없어져 버린 것 같아 (답답합니다). 한 생명으로 세상에 왔다가 가는 의미가 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살아야 하지 않나요.


  이 사회가 사유조차 저작권이 존재하는 방식이 되었거든요. 누구는 가르치고, 누구는 그걸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선생님 한 분 돌아가시면 절망해야 하고. 그럴 이유는 없잖아요. (저는) 장일순 선생을 정말 좋아했지만, 장일순 선생이 아니어도 좋지요.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많으니까. 우리가 공감하고 받아들이는 것만큼 살려고 애쓰는 일이 필요한 거죠. 아무리 봐도 긴 세월 동안 이념과 자본의 하수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과 똑같아요. 요새 톨스토이를 다시 정독하는 중인데, 그분이 당시 사회를 보면서 '욕심 한가운데 있는 한 좌든, 우든 희망이 된 일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우리 존재에 관해 깊이 통찰하려고 하는 안간힘들이 우리 시대에 절실해졌다고 생각하고, 저 개인으로는 그것을 통해서 진보적인 메시지를 찾아내고 있는 셈이에요."】


  이 인터뷰 기사 중에도 특히 제가 주목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리영희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보낸 엽서에 "새는 좌우의 날개가 아니라 온몸으로 난다"고 써놓은 것이 제 나름 특별한 의미를 담아서 하는 이야기였지요. 우리 사회가 좌우 대립 속에서 좌측 결핍에 관한 문제로 너무 오랫동안 끌려왔어요. 나는 그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에요. 좌측 결핍이 오래되었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해요. 해소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데 그것을 보느라 온몸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요. 새는 좌우의 날개만으로 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야말로 심장이나 다른 부분을 포함한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날아가고 있는 셈인데. 앞으로 나올 그림들은 온 마음으로 나는 그림도 있고, 터질 것 같은 심장으로 나는 그림도 있고, 그런 부분들을 담게 될 거예요. 생명에 대한 온전한 인식이 실종됐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저는 이철수 선생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초점은 ‘온몸’입니다. 온 하늘, 온 우주, 온 세계, 온 땅, 온 인류, 온 생명입니다. 온 하느님, 온 이웃 …… ‘온’입니다.

 

  <성경말씀>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한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태 5:43~48)】


  오늘 성경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웃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완전하심같이 그대들도 완전하십시오”라고 권면하신 메시지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주목해야할 경구는 ‘완전’(完全)입니다. 부분이 아닙니다. 일부가 아니지요. 전체입니다. “단 한 명의 인류가 행복하지 못하면 나 역시 행복하지 못하다”는 어록을 남긴 어느 아나키스트의 말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전체에 대한 안목입니다. 개인이 아니고, 일부가 아닙니다. 혼자만이 아닙니다. ‘온’입니다. ‘온’이 중요한 초점입니다.

 

  <세상 이야기>

  최근 우리나라에 구제역이라는 전염병이 돌아서 1백만 마리에 육박하는 ‘소와 돼지’를 죽여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왜 이 시대에 그런 전염병이 창궐하는 것인가요? 그건 다분히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현대의 인류는 너무나 많은 육류를 먹고 있습니다. 너무 많이 소비되는 것을 맞추다 보니, 작고 비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숫자의 동물을 ‘공장식으로’(!) 키워냈고, 그 과정에서 ‘소와 돼지, 닭 등’의 동물들이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고, 결국 사소한 질병에 대한 저항력도 형편없이 떨어졌던 것입니다. 자유로운 야생의 상태라면 가볍게 이겨낼 질병이, 무리하게 가둬놓은 짐승에게는 치명적인 질병이 되는 것입니다. 조류 독감도 마찬가지이지요. 야생의 철새들은 가볍게 이겨내는 질병이지만, 감옥에 갇힌 닭들은 그 가벼운 질병에 무수히 죽어나갑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생매장된 생명이 사람이 아니라서 괜찮은 것입니까? 그 동물들이 만약 사람이었다면, 의정부시 인구의 두 배가 죽은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설교의 결론>

  하느님은 완전의 존재이십니다. 인류를 사랑하시되, 원수조차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비를 내려 주시되, 악인에게도 내려 주시는 완전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섬기는 우리 역시 ‘완전’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70억 명의 인류 가운데 단 한명이 불행에 빠져 있다면, 우리 역시 마냥 행복하기만 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백만 마리의 ‘소 돼지’가 죽어나가는데, 우리가 마음이 편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하느님의 완전하심 같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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