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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아버지의 신앙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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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 : 요한복음 18장 10절~11절

설교제목 : 하나님 아버지의 신앙

 

 <책 이야기>

  최근 『다석 유영모의 동양사상과 신학』(김흥호 이정배 편저, 솔출판사)을 읽었는데, 그 책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으리만큼 하나님은 크시고 빛나시고 살아계신 분이다. 동양에서 무(無)는 깨쳐난다는 뜻이다. 동양의 생각은 깨쳐나는 것이다. 깨쳐나야 아바디요 깨쳐나지 못하면 어머니다. 유영모 선생은 어머니 종교를 싫어했다. 기독교는 아버지 종교라서 좋아했다. 어머니 종교란 땅에 붙은 종교다. 세상에서 오래 잘 살아보겠다는 것이 어머니 종교다. 유 선생은 깨여 솟아오르는 종교를 아버지 종교라 했다. 아바 아바지는 깨어난다는 말이다. ……

  유영모 선생은 언제나 “아바디 아바디” 하고 소리내서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소리만이 아니다. ‘아’는 감탄사요 ‘바’는 밝은 빛이요 ‘디’는 실천(디딘다의 맥락)이다. 인생은 하나의 감격이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삶은 감격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선생의 삶을 보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뒤에는 하나님의 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 기쁨은 진리에서 솟아나오는 기쁨이요 그리스도로부터 터져나오는 기쁨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법열이요 참이었다. 진리의 충만이요 영광의 충만이다. 그래서 선생은 아바디라 했다. 아바디는 단순한 진리의 충만뿐이 아니다. 그뒤에는 생명의 충만이 있고 힘의 충만이 있다. 그 힘으로 선생은 세상을 이기고 높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다.(34쪽~35쪽)】

 

  <책의 해설>

  제가 이글, 즉 이 책에서 인용된 부분을 좋아하는 이유는 두 가지 차원입니다. 하나는 요즘 하나님에 대해서 부성(父性)적 차원이 아닌 모성(母性)적 차원, 그리고 더 나아가서 중성(中性)적 차원으로 부르려는 서구 신학적 경향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차원입니다. 요즘 서구 신학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남성우월주의 시대의 잔재라는 이야기입니다. 과거 세상의 모든 일들이 남성중심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마저 남성으로 이미지화했고,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일이 일상화됐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이제 남성우월주의가 잘못된 시대정신으로 판명난 현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계속 아버지로 부를 것이 아니라 ‘어머니’로 부르자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남성도 아니요 여성도 아니므로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닌 중성(中性)적 이미지의 용어를 만들어서 하나님을 부르자는 신학적 제안이 있는 것입니다.


글쎄요. 저도 그런 신학적 경향에 대해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나름대로 타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제 입장은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방식이 아닌 ‘이것도 버리지 않고 저것도 취하는’ 방식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즉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학적 탐구를 계속하면서 어머니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탐구도 넓혀가는 … 뭐 그런 방향이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유영모 선생의 신학적(철학적, 영성적) 탐구는 제 내면 가운데 아주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메시지였습니다.


  제가 이글, 즉 이 책에서 인용된 부분을 좋아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 한국교회가 모성(母性)적 하나님의 세계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세계교회가 다 그렇지요. 현재 국내외 기독교는 모성적 하나님의 세계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가 신학적으로 보았을 때,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떠나지 못한 채 매양 어리광이나 부리는 신앙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를 향해서 매일 ‘과자 사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매일 하나님에게 매달려서 ‘건강 달라, 돈 달라, 명예 달라, 축복 달라’고 조르는 것입니다. 이제 나이가 먹을 만큼 먹었으면 부모 품을 떠나 홀로 서야(獨立) 하는데,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가 되어서도 매일 엄마 타령이나 하는 ‘어른 아이’처럼, 우리 기독교의 성도들은 아이나 어른, 남자나 여자나 할 것이 없이 모두 사상적으로(영성적으로,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채 ‘엄마 하나님’만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말로는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짖고 있지만, 사상적 맥락에서 보면 여전히 ‘엄마 하나님’에 빠져 있습니다. 이점을 준엄하게 비판한 이가 유영모 선생이었습니다.

 

  <졸업하는 신앙으로>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는데, 유영모 선생은 ‘졸업하는 신앙’에 대해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대충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기성교회를 비판하니까, 나를 반(反) 교회적인 사람으로 보는 분들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나는 다만 신앙의 세계에서도 반드시 졸업하는 차원이 있어야 하는데, 기성교회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小學生)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가서 배운 후 나중에 대학생(大學生)이 되듯이, 신앙의 세계에서도 소학생이 무럭무럭 자라서 나중에 대학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학의 세계에 진입한 학생이 마냥 소학의 이야기만 한다면, 그것은 정말 큰 병이지요.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는 여전히 ‘소학의 신앙’에만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경 이야기>

 【시몬 베드로는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고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요한 18:10~11)】


  이 성경구절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군사들에게 붙잡히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고난의 잔(毒杯)을 주지 않습니다. 사랑의 잔을 주실 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아들에게 고난의 잔(毒杯)을 줍니다. 그리고 아들은, 딸이 아닙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독배를 눈물 흘리면서도 마십니다. 왜? 아버지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아니고, 어머니와 딸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입니다.


신앙의 세계에도 그런 남성적 장쾌함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적 섬세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성적 장쾌함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고, 정말 따르기 싫은 아버지의 거친 뜻을 따랐고-말랑말랑하고 따뜻하고 평온한 뜻이 아닙니다-, 마침내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 ‘성화’(聖化)되셨습니다. 비로소 홀로 서신 것(獨立)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하나님 아버지의 신앙’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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