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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높은 곳을 깎고, 낮은 곳을 높이고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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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 : 이사야서 40장 3절~5절

설교제목 : 높은 곳을 깎고, 낮은 곳을 높이고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주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또는 "광야에서 한 소리가 외친다. '주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주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다."(이사야 40:3~5)】

 

  <마오리족 연가 이야기>

  엊그제 잠간 라디오를 들었는데,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노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연가’라는 노래, 즉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직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라는 노랫말의 노래가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전통 가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뉴질랜드 마오리족 청년 5천여 명이 가평 전투에 참여했는데, 전쟁 초기에 이미 1백여 명이 전사하는 등 희생이 컸답니다.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면서 애달파했던 마오리족 전사들은, 우리가 ‘아리랑’을 부르는 마음과 비슷한 정서로 ‘연가’(포 카레카레 아나 / Po karekare Ana)를 불렀답니다. 그런데 그 곡조가 너무 아름답고 신비로워서 우리 한국 병사들이 그 곡조를 애써 배웠고, 전쟁 후에 ‘연가’라는 노래로 우리 민족에게 소개했다는 군요.


  그 사연을 소개하면서, 또 뉴질랜드 출신 성악가의 ‘연가’를 들으면서 라디오 진행자가 잠깐 울었습니다. 저도 들으면서 속으로 울컥했습니다. “아! 그런 것이구나. 이 노래에 그런 애달픈 사연이 있었구나.”

 

  <전쟁 이야기>

  마오리족 청년들은 어떻게 해서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을까요? 어떤 분들은 “이 땅에서 불의한 공산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라고 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거짓입니다. 아닙니다.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구도를 그들의 의식속에 갖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의 벗인 그들에게 ‘이념’은 다 부질 없는 것입니다.


  제가 정확하게 알아내지는 못했습니다만, 상식적 차원에서 상상해 보건대, 마오리 족이 한국전쟁에 참여한 이유는 어떤 사회적 대가, 혹은 경제적 대가, 생존을 위한 어떤 대가를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 청년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대가로 그 마오리족 전체에 어떤 유익이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한국전쟁 당시 마오리족은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충분히 그런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전쟁은 그런 것입니다. 일단 전쟁이 터지면, 죽는 이들은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때도 그랬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쉽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노예 상태에 있는 이들에게 달콤하게 이야기하기를 “너희들이 전쟁에 나가서 싸워주면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겠다”, 뭐 이런 제안이 있는 것이지요. 그런 식이니까, 일단 전쟁이 터지면 죽어 나가는 이들은 사회적 약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연가’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훔치는 이유는, 그렇게 억울하고 비통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애간장을 녹이면서 부르던 노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주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또는 "광야에서 한 소리가 외친다. '주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주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다."(이사야 40:3~5)】


  이 땅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명심해야할 두 가지 명제가 있는데, 하나는 ‘산을 깎아내리는 것’이며, 또 하나는 ‘골짜기를 메우는 것’입니다. 높은 곳은 깎아 내리고, 낮은 곳은 북돋아 높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공평한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경의 해석>

  이런 식의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여기 사회적으로 크게 출세한 사람이 있습니다. 인물도 잘 생기고 돈도 잘 법니다. 멋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닮고 싶어 합니다. 나도 그 사람처럼 ‘높고 크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는 신앙의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영성인의 길은 그게 아닙니다. 영성인은 ‘높고 크게 올라간 삶’의 허구를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그런 높고 큼은 거짓입니다. 모래성 같은 것입니다. 그가 인간인 한, 우리는 누구도 다른 인간보다 높고 클 수가 없습니다. 만약 어느 누군가가 “나는 다른 인간보다 높고 크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의 사람입니다. 영성인은 바로 그 거짓을 고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풍선처럼 커져버린 인간의 거짓 자아를 터트리는 것입니다. 그게 ‘산을 깎아내리는’ 삶입니다.


  그 반대의 이야기도 가능합니다. 여기 사회적으로 크게 실패한 사람이 있습니다. 생긴 것도 못생겼고, 돈도 없습니다. 정말 보잘 것 없습니다. 초라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합니다.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는 신앙의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영성인의 길은 그게 아닙니다. 영성인은 ‘낮고 작게 내려앉은 삶’의 진실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대개의 경우, 그런 작고 낮음은 ‘환경적인 이유’입니다. 그이들의 탓이 아닙니다. 사회의 구조적 해악 탓입니다. 그가 인간인 한, 우리는 어느 누구도 다른 인간보다 작고 낮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평평한 존재들입니다. 평등의 실존입니다. 영성인은 ‘작고 낮은 자’를 북돋아 주는 자입니다. 그게 ‘계곡을 메우는’ 삶입니다.

 

  <책 이야기>

  최근 『가네코 후미코-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제국의 아나키스트』(산처럼 출판사)를 애달픈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조선의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박열을 사랑했던 일본여인, 가네코 후미코. 아니, 그런 표현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아나키스트 박열과 함께 일본의 천황체제에 대항했던 ‘하느님의 사람’ 가네코 후미코, 뭐 그런 표현이 맞을 겁니다.


  일본의 가난한 민중으로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는 ‘훌륭한 인물’이 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야 말로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서 출세하리라는 마음을 먹었더랬습니다. 그런데 박열을 비롯한 아나키스트의 친구들을 만나면서부터 점점 일본천황제, 특히 제국주의적 일본사회를 치료하는 일이 더 시급한 문제이며, 그렇게 사회를 ‘평평하게’ 바꾸는 일이 가네코 후미코 자신이 훌륭하게 출세하는 인물이 되는 것보다 몇 배나 중요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박열과 함께 아나키스트의 길로 나아갑니다. 물론 그렇게 살다보니, 스물 세 살에 스스로 죽는 비극적 삶이 되어버렸지요.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높은 곳을 깎고, 낮은 곳을 높이고”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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