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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의 관점에서 생각을 바꾸자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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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 : 누가복음 13장 4절~5절

설교제목 : 영원의 관점에서 생각을 바꾸자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열 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누가 13:4~5)】

 

  <일본 지진 사태>

  강력한 지진이 일본 땅에 몰아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땅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넘치고, 자동차들이 떠내려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정말 참혹한 사태입니다. 하느님의 위로가 이들에게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자연의 엄청난 재앙 앞에서 할 말을 잃게 됩니다. 이런 거대한 비극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할까요? 무슨 말로서 그네들을 위로하고, 우리 스스로도 이 비참한 현상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해야할까요? 눈앞이 캄캄할 뿐입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뿐입니다.


  그러던 중 문득 생각난 이가 철학자 스피노자였습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던 스피노자를 생각하니, 마음의 위로가 됐습니다. 그래요. 그런 것입니다. 내일 일이 어떠하든지 간에, 즉 우리가 무슨 일들을 겪을 것이든지 간에 상관 없이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의 시간들을 담담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의 지혜이겠지요. 그런 생각이 일본 대지진의 정서적 충격을 어느 정도 이겨내게 하였더랬습니다.

 

  <철학자 스피노자>

  이일을 계기로 철학자 스피노자에 대해서 좀 더 탐구해 보았습니다. 스피노자(1632~1677)는 어떤 사람일까요? 개략적인 특징을 말씀드리면, 스피노자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직 제안을 거절한 채 유리세공을 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서 살았습니다. 항상 책을 읽는 사람이었고, 여러 권의 책을 썼습니다. 또 그는 정신의 탐구, 즉 철학의 길을 담담하게 걸어간 사람이었고, ‘철학의 그리스도’ ‘신(神)에 취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의 어록들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몰두하자면 저 자신의 철학 연구를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공적으로 확립된 종교를 어지럽히는 모든 행동을 피해야 한다면, 제가 가르치고 연구하는 자유가 결국 제한 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삼가 말씀 올리오니, 저를 움직이는 것은 좀 더 나은 지위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다만 평안에 대한 사랑입니다. 저는 공적인 교육 활동과 떨어져 있음으로써, 얼마간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직을 거절하며)


  // 스피노자의 철학적 관심사와 궁극적 목표는 지속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삶, 지극히 행복한 삶이었다. ‘혹시 참된 선이 존재하는가, 사람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 그것을 통해 영원토록 지속적인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 나는 이러한 것들을 탐구해보기로 결심했다.


  // 스피노자의 신은 모든 사물의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일종의 내재적 원인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만물을 자유롭게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다. 스피노자의 신은 연장성 또는 신체성을 지닌 존재다. 스피노자의 신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자연에 가깝다. 그러한 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을 통해 우리는 나 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보는 생각에서 벗어나 나와 다른, 나보다 큰 ‘타자’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한 ‘타자’가 곧 신이기도 하다. 지극한 행복은 바로 그러한 신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어떤 한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영원의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인식할 때 가능하다. 시인 노발리스가 스피노자를 ‘신에 취한 사람’이라 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


  // 그것을 잃었다 해도 슬픔이 생기지도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 소유한다 해도 시기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며, 두려움도 미움도 없을 것이다. 요컨대, 영혼의 동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없어질 것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생기는 것들이다. 그러나 영원하고 무한한 것에 대한 사랑은 순수한 기쁨으로 영혼을 먹이며 어떤 슬픔도 여기에 끼어들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바람직하고 온갖 힘을 다해 추구해야 할 것이다.


  // 자연(신)이 지닌 질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르는 정서를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사랑’이라 불렀다. 신이 지닌 질서의 필연성을 이해하는 자는 신을 사랑할 수 있을 뿐 결코 복종할 수는 없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열 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누가 13:4~5)】


  예수님 당시에 실로암 지역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할까요? 저는 이런 참혹한 죽음들에 대해서 아주 쉽고 단순하게 ‘죄와 벌’로 연결 짓는 해석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대형 불상사에 대해서 ‘마음 바꿈’, 즉 회개(悔改)의 영성으로 바라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마음과 생각을 바꿔서 저 세상을 바라보자. 우리들의 통상적인 생각들을 ‘영원의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바라보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성경의 해석>

  여기 실로암의 탑이 무너져서 십수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여기 엄청난 대지진이 일어나서 수천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정말 작은 실수 때문에 고귀한 생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이를 어찌해야할까요?

  예수님의 권면대로 ‘회개’ 즉 마음과 생각을 바꿔서, 또 스피노자의 권면을 따라서 다시 이야기를 풀어가 보겠습니다. 【그런 불행한 사태는 그리 마음 쓰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잃어버린 집이라든가, 농토라든가, 자동차라든가 … 무슨 물건이든이 간에 그런 것들은 우리네 삶의 과정 속에서 잠깐 소유했다가 버려야 하는 ‘한시적 대상들’일 뿐입니다.


그런 것들을 잃었다고 해서 영혼의 동요를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원래부터 한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영원의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바라보면, 무너져 버린 실로암 탑도, 죽임을 당한 열 여덟명의 목숨도, 수천명 주검으로 발견된 사람들도, 무너져 버린 빌딩들도, 사라져 버린 부모 형제들도 다 별것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모든 것들은 원래부터 언젠가는 없어져 버릴 ‘한시적 대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처럼 우리는 “내일 지구의 멸망이 온다고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담담함으로 인생을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의 올바른 지혜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영원으로 관점에서 생각을 바꾸자’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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