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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뿌리가 되는 삶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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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3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누가복음 5장 4절

설교제목 : 뿌리가 되는 삶

 

  <글 이야기>

  며칠 전 인터넷 신문 ‘오 마이 뉴스’를 보니까, 김삼웅 씨가 쓰신 짧은 글 ‘우당 이회영 평전을 마치며’라는 글이 올라 있더군요. 깊은 감동을 다시 한번 느끼면서 잘 읽었습니다. 그 글의 일부분을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니체)고 한다. 이회영의 구도자적 온화함과 혁명가적 행위의 내면을 종합하면 니체의 이 말이 떠오른다. ……이회영의 ‘아름다운 표면’은 천길의 심연보다 더 ‘무서운 내면의 깊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회영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몇 마디 핵심적인 말들로서 요약해 보자.


* 전통유학에 탐닉하지 않는 개신 유학 찾는 열린 사상

* 왕조체제와 공화주의 교체기의 개명사상

* 벼슬이나 감투보다 분방하게 살고자 한 자유혼

* 형식논리의 주자학보다 실천논리의 양명사상

* 현실 안주와 저항인의 갈림길에서 보여준 기득권 포기

* ‘상놈들’이 모이는 상동교회에서 결혼식 올린 파격

* 청상이 된 누이 장례 치르고 재혼시킨 여성주의

* 머슴들 해방시키고 존댓말 쓴 평등사상

* 황실과 가까우면서도 신민회 창설한 탈근대인

*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파견을 주도한 국제주의

* 고종황제 앞세워 망명정부 세우려던 통 큰 고구려인

* 일가 재산 모두 팔아 망명한 ‘인민의 전위’

* 윗자리 사양하고 위험한 곳 먼저 찾은 비범한 범인

* 굴욕과 억압보다 자존과 저항을 택한 자유주의

*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세운 무장투쟁의 원조

* 목적과 수단을 일체화한 리얼리스트

* 일의 성패를 문제삼지 않고 동기의 순수성을 중히 여긴 양명학자

* 시작과 끝을 양심에 호소할 뿐 성패를 묻지 않는 강화학파

* 대원군 난초 쳐서 독립자금 만든 예술혼

* 지위나 물욕보다 명예와 가치를 높이 산 아나키스트

* 광복운동 과정에서 ‘자유 협동체론’을 제시한 경륜

* “독립한국은 4민 평등한 만인의 자유평등과 공평하게 다 같이 행복을 누리며 기회가균등하게 부여되는 사회”를 꿈꾼 민주공화주의

* “나의 소망은 언젠가 당신이 우리가 되고 온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네”

존 레논을 닮은 ‘목마른 영혼의 외침’의 소프라노

* 다물단, 흑색공포단 지휘한 조선의 체 게바라

* 온갖 악형에도 입을 다문 사육신의 화신

* 처자보다 동지, 동지보다 조국을 더 사랑한 순혈 조선인

* 무서운 깊이와 아름다운 표면을 함께 한 선비

*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겨레의 사표】

 

  좋은 글입니다. 이회영 선생의 올곧은 정신을 우리 영혼 속에서 다시 한번 일깨우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게 하고,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회초리 같은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누가 5:4)】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부들인 시몬 일행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신 후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우리 인생을 던진다고 했을 때, 어디로 던져야 할까요? 깊은 곳입니다. 얕은 곳이 아닙니다. 시시한 곳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곳이 아닙니다. 영원한 곳입니다. 무서울 정도로 깊은 곳에 우리 인생을 통째로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의 최종적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깊은 곳’이란 도대체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글쎄요. 사람마다 상황마다, 삶마다, 시대마다 다르겠지요.

 

  <깊은 곳에 대한 나의 해석>

  어제 잠자기 전에 문득 “깊은 곳이란 뿌리일 것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줄기나 열매, 꽃 따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뿌리로 내려가서 ‘한 알의 밀알’로 썩어 없어지는 것, 그것이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는 삶이었습니다.


  여기 한 가정이나 교회, 학교 혹은 직장이 있다고 칩시다. 그 공동체가 유지되는 핵심적 에너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한 알의 밀알로 썩어서 무화(無化)되는 씨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헌신과 희생이 없다면, 공동체는 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의 공동체들(가정, 교회, 학교, 직장)이 망가지고 있다면, 그것의 핵심에는 아무도 뿌리가 되지 않으려하는 ‘죄된 속성’ 때문일 것입니다.

 

  <책 이야기>

  최근 니코스카찬차키스의 책 『러시아 기행』을 읽었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러시아 혁명이 ‘단기적으로는 성공하고, 장기적으로는 실패하게 된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혁명이 성공한 직후에 러시아 땅을 여러 곳 여행 다녔는데, 아주 인상적인 장면 중에는 어마 어마한 저택과 땅을 빼앗긴 귀족 이야기와 그 저택과 땅을 차지한 가난한 노동자들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대한 궁전 같은 집에 살고 있던 귀족들은 그 집에서 쫓겨나서,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그 궁전의 수위실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고, 그 궁전에서 종노릇하던 이들이 궁전의 화려한 집들을 차지했습니다. 엄청난 반전(反轉)이지요. 그야말로 혁명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일이었지요!


  레닌이 주도한 러시아 혁명은 성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밥을 굶을 정도로 생존의 위기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들에게 러시아 귀족들의 맛있는 음식과 땅, 화려한 집이 그냥 공짜로 주어졌습니다. 레닌은 러시아 민중의 구세주였습니다. 러시아 민중은 죽기 살기로 레닌의 말에 충성하였고, 레닌이 나눠주는 빵과 땅과 집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가는 곳마다 ‘레닌의 초상화’가 걸려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레닌은 러시아의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혁명이 인류가 지향해야할 최종적 목표일 수 있을까요? 이회영 선생은 그 점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분명한 선을 긋습니다. 그런 식의 혁명은 지배층의 사람들만 교체될 뿐, 지배구조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완전한 해방은 불가능한 혁명, 첫 번째 악(惡)을 두 번째 악(惡)으로 바꾸는데 불과한 혁명, 그것이 러시아 공산주의식 혁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회영 선생은 공산주의의 길을 가지 않고, 아나키스트의 길을 갔습니다. 즉 ‘뿌리로 가는 삶’이었습니다.


  레닌 식으로 가면 ‘꽃과 나비, 열매와 과실’이 넘쳐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러시아 민중들이 레닌을 메시아처럼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회영 식으로 가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손에 쥐고 있는 몇 푼 되지 않는 돈마저도 세상을 위해서 다 내놓아야 합니다. 그러니 누가 이회영을 따르겠습니까? 속된 말로 ‘미친 놈들’(?)만 따르는 것이지요. 바보들(?)만 따릅니다. 그러나 그런 미친 삶과 바보의 인생이 곧 ‘뿌리의 길’을 가는 진정한 하느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섬기는 우리는 오늘도 이회영의 올곧은 인생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뿌리가 되는 삶’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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