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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 가족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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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8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2장 46절~50절

설교제목 : 하늘 가족

 

<기도 시>

 

구세주

 

/ 헤르만 헤세

 

매번 다시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

경건한 귀에다 말하고, 귀먹은 귀에다 말하며,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가는 다시금 우리에게서 잊혀진다.

 

매번 다시 그는 외로이 일어나야만 하고,

모든 형제의 고통과 동경을 짊어져야만 하며,

항상 그는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

 

매번 다시 하느님은 예고하려 하고,

천국의 것은 죄인들의 계곡 속으로,

정신은, 영원한 것은 육체 속으로 스며들고자 한다.

 

매번 다시, 오늘날에도,

구세주는 축복을 주려고 오고 있다,

우리의 걱정과, 눈물과, 질문과, 한탄을

조용한 시선으로 맞이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시선 우리는 감히 대하지 못하니,

오직 어린이의 눈만이 그 시선 감당하기 때문이라.

 

 

【예수께서 아직도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와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 말을 전해 준 사람에게 "누가 나의 어머니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12:46~50)】

 

  <책 이야기>

  오래 전 법전스님의 회고록 『누구 없는가』(김영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법전 스님은 열네 살 때 출가했다. 하루는 부친이 토굴로 찾아왔다. “모친이 위독하다. 막내(법전 스님)를 보고 눈을 감고자 한다”는 전갈이었다. 법전 스님은 부친에게 “집을 떠나온 출가자입니다. 부모 형제를 위해서는 그쪽으로 한 발도 옮길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결국 부친만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조카에게서 편지가 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다. 법전 스님은 그 편지를 아궁이에 넣어버렸다. “외아들이 벼락을 맞아 죽어도 청상과부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만큼 무서운 각오가 아니면, 이 공부할 생각 마라”던 성철 스님의 말씀을 뼛속에 새기고 살 때였다고 한다.】

  정말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수도자의 삶과 관련해서.

 

  <불가(佛家)의 메시지>

  ‘가족’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부정적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인연의 끈을 끊어버리는 “대자유의 삶을 살라”는 것이기 때문에, 핏줄로 연결되어 있는 가족이라는 인연은 수행적 삶에 있어서 불필요한 것입니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야할” 수행자가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 등에 얽매인다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 없는 일인 것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런 저런 인연(因緣)은 행복이고 힘이고 위안이고 보람이고 기쁨이지만, 불교적 수행자에게 있어서 모든 인연이란 하루라도 빨리, 가능하면 멀리, 혹은 완전히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할 ‘고통의 근원’인 것입니다.


  수행적 삶을 지향하는 우리 입장에서 불가의 이런 가르침에서도 깊은 지혜를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새겨 들어야할 아주 소중한 메시지가 거기 있음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의 입장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그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아직도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와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 말을 전해 준 사람에게 "누가 나의 어머니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12:46~50)】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 그의 가족들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나서 ‘이야기’를 좀 깊이 해보려고 먼 길을 떠나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바라보면서 이런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누가 나의 어머니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여기까지 이야기를 해보면, 예수의 메시지는 불가의 가르침과 거의 일치합니다. “수행적 삶에 있어서 ‘가족’이란 방해거리이니 물리쳐라”는 선포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지는 그 다음 장면으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예수께서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제시해 주셨는데, 그것은 곧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단지 핏줄이라는 인연으로 묶여 있다는 차원이 아니고, 또 오랫동안 한 집에서 밥을 먹었다는 식구(食口)의 차원이 아니고, 또 한 학교에서 공부했다는 동창(同窓)이 아니고, 한 고향에서 태어나서 자랐다는 차원이 아니고 …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 그것이 새로운 가족의 전제조건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면 내 혈육도 가족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다면, 혈육이라고 해도 새로운 가족일 수는 없겠지요. 당연히.

 

  <예수의 가족 이야기>

  이제 그렇다면 우리에게 한 가지 과제가 남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는 것, 즉 ‘하늘 가족’은 어떤 의미이며, 어느 차원일까요?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무거운 과제입니다. 글쎄요. 어려운 이야기이겠지요? 제 입장에서 몇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 ‘하늘 가족’은 서로가 서로를 얽매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개별적인 자아를 가진 독창적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특히 ‘나와 다르다’ 혹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늘 가족은 좀 더 넉넉한 시선과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바라 봅니다.


  둘째 ‘하늘 가족’은 하늘의 삶을 지향합니다. 땅의 삶이 아닙니다. 작은 땅덩어리를 갖고 죽기살기로 싸우는 삶이 아닙니다. 바람처럼 자유롭고, 하늘처럼 푸르른 삶을 지향합니다. 높고, 넓은 생각으로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셋째 ‘하늘 가족’은 행동하는 삶입니다. 특히 하늘의 뜻을 실행하는 삶을 삽니다. 땅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실행하는 삶입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하는 것이며, 말로만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를 수행합니다. 말로만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서 교회를 바꿔갑니다. 하늘 가족의 특징은 행동에 있습니다.

 

  <설교의 결론>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어린이 날과 어버이 날, 성년의 날과 부부의 날 등이 들어 있는 가정의 달, 5월입니다. 이런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로운 가족, 즉 ‘하늘 가족’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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