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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른 복음은 없다!

  • 류공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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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2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갈라디아서 1:1-10

설교원고

"다른 복음은 없다!"

   오늘부터 갈라디아서 강해를 시작한다.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서론부터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 저자-사도 바울

. 수신자-1: 2, 갈라디아의 교회들. 갈라디아-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로마의 행정구역으로, 소아시아의 중앙, 지금의 터키의 중앙으로 안디옥 교회가 그 지역에 있었음. 그 지역은 사도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지역. 따라서 갈라디아서는 다른 서신서와 달리 특정 교회에게 보낸 서신이 아니라 갈라디아 지역에 세운 여러 교회들에게 보낸 회람용 서신이다.

. 기록 시기- 남 갈라디아(로마 행정구역, 안디옥)로 볼 경우 주전 49년 경, 북 갈라디아(헬라시대, 에베소)로 볼 경우 주후 53-56년 경. 남 갈라디아로 보는 견해가 우세.

. 기록 목적- 두 가지. 첫째,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할례와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 때문. 이들을 대적하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주지시키기 위함이다. 둘째, 거짓 교사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했는데, 이에 바울 자신의 사도권의 정당함을 밝히고 자신이 전한 복음을 확증하기 위함.

. 주제- 이신칭의, 그리고 그 믿음으로 주어지는 자유

  이제 본문을 보자. 1-5절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자.

“1. 사람들이 세워 준 것도 아니요, 사람이 맡겨 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겨 주시고, 또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겨 주심으로써, 사도가 된 나 바울은, 2.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믿음의 식구와 더불어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3.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5.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현대어이기에 좀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성경을 연구할 때 다른 번역 성경들을 참고하여 읽는 것이 좋다. 개역개정은 매우 번역이 잘 된 성경이다. 다만 용어나 어투가 현대어가 아니기 때문에 이해에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표준새번역, 공동번역, 우리말 성경, 쉬운 성경 같은 현대어 성경도 참고하고, KJV, NIV, NASB 같은 영어 성경도 참고해서 읽으면 좀 더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5절까지는 서신의 인사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인사 부분에서는 보통 글을 쓴 사람, 그리고 수신자가 기록되어 있고, 수신자들을 향한 문안의 인사를 한다. 이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서신 형식인데, 갈라디아서 역시 그런 형식을 따르고 있다. 다만 다른 것은 그 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송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4-5절이다. 이는 유대교적인 관습인데, 바울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런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1절에서 사도 바울은 편지를 기록하는 자신을 밝히면서, 자신의 사도직의 권위와 그가 전하는 복음의 정당성에 대해 밝히고 있다. 1절만 다시 읽자.

  “사람들이 세워 준 것도 아니요, 사람이 맡겨 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겨 주시고, 또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겨 주심으로써, 사도가 된 나 바울은”

   바울에게 붙는 호칭이 바로 사도이다. 이것은 그의 직분이기도 하다.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보내기 위해 부르신 자’이다. 사도란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선포하여 사람들이 이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그분의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기 위해 부르신 사람을 뜻한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정체성이자, 직분이었다.

  사도는 사람들이 세우거나 임명하는 것이 아니다. 즉 사람들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거나 어떤 단체나 교회에서 임명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르시고 맡기시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직분이 바로 사도이다.

  사도라는 직분이 권위를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세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께서 세우셨기에 권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특권이 아니다. 계급도 아니다. 만일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거나 자신의 노력으로 인해 얻은 것이라면 그것은 특권이 될 수 있고 계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에 그것은 절대 특권이 될 수 없고 계급이 될 수 없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봐야 할 것이 성직자이다. 목사, 신부 등을 말한다. 우선 목사나 신부를 사도라고 해서는 안 된다. 사도는 예수님께서 친히 부르시고 세우신 열두 제자와 사도 바울에 국한되는 호칭이다. 부르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았다는 면에서는 목사를 사도적이라고는 할 수 있겠으나 그 자체로 사도는 아니다. 목사나 신부는 그저 목회자일 뿐이다.

  우선 성직자라는 말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성직, 거룩한 직분, 거룩한 직업이란 뜻인데, 이 말 자체가 특권의식을 만들어낸다. 목회자가 거룩한 직분인 것은 맞다. 왜? 그 임명이 거룩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뜻에 따라 목회자가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셔서 세워진 사람들이다. 그것을 소명이라 한다. 목회자로서의 소명이다. 교회라는 조직을 통해 목사 안수, 사제 서품을 받지만 그것은 하나의 형식일 뿐, 목회자의 부르심과 세우심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그래서 거룩한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만 거룩한 직분인 것이 아니다. 모든 신자들이 거룩하다. 그래서 성도라 하는 것이다. 선교사, 장로, 권사, 집사도 거룩한 직분이다. 왜? 목사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라고 세우신 직분이기 때문이다. 모두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라는 부르심에서는 똑같다. 그리고 신자들이 세상에서 가지는 모든 직업 역시 거룩하다. 그것이 죄를 짓는 직업이 아니라면 모든 직업은 거룩하다. 그 직업 자체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그 직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자신의 직업과 분야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가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직업 소명론이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부르심에 있어 동등하다. 교회에는 어떤 특권이나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중세 카톨릭 교회가 부패한 이유는 성직을 특권으로 여기고 계급화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 중 하나는 목사, 장로들이 그것을 하나의 특권, 계급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직분은 특권이나 계급이 아니다. 말 그대로 직분일 뿐이다. 직분은 동등하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바로 기능적인 차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선포하고 가르치며 신앙의 바른 길로 인도하는 기능을 부여 받았다. 장로는 목사를 도와 교회를 바르게 운영하고 교인들의 신앙을 지도해야 하는 기능을 부여 받았다. 이것은 기능적인 차이이지 신분적인 차이가 아니다.

  이 기능적인 차이에서 부여되는 것이 권위이다. 목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쳐야 하는 기능을 부여 받았고 성도들을 말씀과 기도로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는 기능을 부여 받았다. 이 기능에서 부여받은 것이 바로 권위이다. 특권적인 권위가 아니라 목회라는 기능을 감당할 수 있도록 부여된 권위이다. 이 권위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이다.

  교인들이 목회자를 존경하고 그의 가르침과 지도를 따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목회자나 일반 성도들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다. 모두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직분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교회의 질서를 위해, 그리고 성도들을 신앙적으로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목사라는 직분으로 부르시고 세우신 것이다.

  교인들은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목회자를 존경하고 목회자의 가르침과 지도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들 역시 자신이 무슨 특권층이나 상위 계급에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된다. 교회와 복음을 위해 세움 받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겸손하고 투명한 태도로 목회를 해야 하고 바른 신앙관으로 교인들을 가르쳐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것임을 밝히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자기정체성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이 사도라는 인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인식했다는 의미다. 이것을 사도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고린도전서 15:10을 보자.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자기인식이었고 자기 정체성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사도가 되었거나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면 이런 인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사도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자신의 모든 수고가 자신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겸손하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디 이뿐만 이랴?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만나주시고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존재가 되어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 곳곳에서 이를 고백하고 있다. 그러기에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고백이 매우 중요하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 자기 인식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고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의, 공로의식, 율법주의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된다. 그래야 끝까지 겸손하게 주님을 섬기며 신앙생활하고 교회를 섬기면서 사역을 할 수 있다.

  자기 의는 자신의 행위나 자신이 가진 어떤 것을 의의 근거로 삼는 것이다. 신앙의 틀을 쓰게 되면, 내가 이런 사람이니까,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실 것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했다는 것이고, 내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공로의식이라 하고, 율법주의라고도 부른다. 매우 위험한 생각이고 복음적이지 않은 착각이다. 우리의 그 어떠한 소유나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그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이다.

  늘 기억하고 고백하자.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나의 직분과 사명뿐만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 같은 죄인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음으로 죄 용서 받고 구원받은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가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가 예수 믿어 그리스도의 새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조금씩 성장하고 변화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공부도 하고 취업도 하고 직장생활을 통해 삶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가 숨 쉬며 내가 일하며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시간 같이 찬양하자.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꼭 기억하자.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의 모든 수고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는 이 고백이 우리의 삶과 믿음과 봉사와 사역 위에 늘 함께 하기를 축복한다.

  3절을 다시 읽자.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이 말은 서신 앞부분에서 하는 인사인데, 유대인들의 경우 대개 ‘평화와 축복’을 의미하는 인사, 즉 שלום וברכה이란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임에도 다르게 인사를 한다. ‘은혜와 평화’라는 인사이다. 헬라어로는 ‘카리스 카이 에이레네’이고, 사도 바울이 유대인이었으니까 히브리어로 하면 ‘חסד ושלום’이다. ‘헤세드’, 아주 중요한 단어이다. 우리말로는 은혜, 긍휼, 자비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하면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자비와 사랑을 뜻한다. 그것을 우리는 은혜라는 말로 통칭해서 말한다.

  은혜와 평화라는 인사에는 매우 중요한 원리가 담겨져 있다. 은혜와 평화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인가? 순서로 봐도 은혜가 먼저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샬롬이 임하는 것이다. 샬롬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다. 샬롬이 무엇인가?

  샬롬은 완전함이다. 그 어원 자체가 완전함을 뜻하는 샬렘이다. 마치 완전한 원, 아무런 흠도 결함도 없는 완전한 원과 같은 상태가 바로 샬롬이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그 영혼과 삶이 완전한 것이다.

  이 샬롬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하나님에게서 온다. 왜? 온 우주에서 완전하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시기 때문이다. 완전하신 하나님만이 완전하신 샬롬을 갖고 계시다. 인간에게는 이 샬롬이 없다. 그 무엇으로도 이 샬롬을 얻을 수 없다. 사람들은 돈이 샬롬을 주고 권력과 명예와 성공이 샬롬을 주는 줄 착각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착각일 뿐 결코 샬롬을 주지 못한다. 더 큰 갈증을 주고 더 큰 결함만 보여줄 뿐이다.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샬롬은 없다. 죄는 샬롬을 깨뜨린다. 망가뜨리고 큰 상처를 낸다. 그러므로 인간이 완전한 샬롬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 용서 받고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야 샬롬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샬롬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샬롬하길 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샬롬을 누리길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샬롬의 길을 열어주셨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에게는 죄 용서 받고 하나님과의 샬롬이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샬롬이 이루어지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샬롬이 가능해진다. 원수처럼 여겼던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샬롬으로 샬롬을 이루어냈다. 주인과 노예가 그리스도의 샬롬으로 샬롬을 이루어냈다. 남자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 샬롬을 이루어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고 참다운 교회의 모습이다. 참다운 교회에는 샬롬이 있다.

  우리와 샬롬하시고 우리에게 샬롬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구원의 길을 우리는 헤세드, 은혜라고 부른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헤세드이며 하나님의 샬롬이시다. 이 은혜를 받아야만 샬롬이 주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샬롬을 맛볼 수 있다.

  당신 안에 샬롬이 있는가? 하나님과의 샬롬이 있는가? 이웃과의 샬롬이 있는가? 나 자신과의 샬롬이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라. 예수 그리스도로 주로 믿으라. 영접하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라. 그 은혜가 나를 주장하게 하라. 그 은혜가 나를 덮을 수 있게 하라. 그 은혜가 나에게 샬롬을 준다.

  사도 바울의 인사처럼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한다.

  4-5절을 읽어보자.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5.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4-5절은 인사말에 들어간 송영에 해당하지만, 이것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구분을 하면 이렇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인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는 것이다.

  이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우리의 죄가 대속될 때 가능하다. 대속은 값을 치른다는 뜻이다. 히브리어로 메샬렘이다. 앞서 샬롬을 말했는데, 같은 어원이다. 샬롬은 그 값을 메샬렘, 그 값을 치를 때 주어진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샬롬이 깨졌기 때문에 샬롬을 회복하는 길은 죄의 값을 메샬렘, 죄의 값을 치러야 한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그 죄인이 피 흘려 죽는 것 외에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은혜를 베푸셨다. 그것이 무엇인가? 대속이다. 다른 이가 대신 죄 값을 치름으로 용서 받는 것을 뜻한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로 대속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인간의 피가 아니기에 불완전하고 죄를 범할 때마다 해야 한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완전하고 더 이상 반복할 필요가 없는 온전한 대속을 준비하셨고 이를 행하셨다. 그분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그러기에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죄용서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원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는 완전한 대속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라는 말에는 누구나, 어떤 사람이든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만 죄 용서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예외는 없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다.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큰 걸림돌이다. 예수님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께 저주 받은 것이라는 인식이 유대인들에게는 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실패요 저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실패와 저주는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나의 실패와 내가 져야 할 저주를 안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무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것이다.

  사도 바울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실패자요 저주를 받은 자이지 결코 메시아일 수 없고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자들을 잡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 도중에 만난 분은 다름 아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셨다. 실패자요 저주 받은 자라고 생각했던 나사렛 예수가 바로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것이었다! 그분이 달리셨던 십자가는 바로 내가 달려야 했던 저주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께서 대신 지심으로 내가 죄 용서 받고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것을 깨달은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사도 바울은 박해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복음의 핍박자요 방해자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

  십자가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뜻이었다.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여 구원하시기 위하여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구원받아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냄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악한 세대라는 말은 유대 묵시문학에 나오는 말인데, ‘하올람 하제’(העולם הזה)이다. 직역하면 ‘이 세대, 이 세상’이다. 로마서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했는데, 같은 의미이다. 하올람 하제이다. 이 세대, 이 세상은 그 자체로 악하다. 그래서 이 악한 세대라고 하는 것이다. 왜 이 세대는 악한가? 죄악과 불의가 지배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 세대, 이 세상이 악한 것은 사람들이 악 가운데서 살 수밖에 없도록 이 세대가 악의 세력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악한 세대, 하올람 하제와 반대되는 것이 바로 하올람 하바(העולם הבא)다. 우리말로는 ‘오는 세대, 다음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내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의가 지배하게 될 세대를 말하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는 것이다. 하올람 하바는 하나님과 그분의 의가 지배되는 세대, 그러한 세상이다.

  그렇다면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죄악과 불의가 지배하는 이 악한 세대로부터 건지시려는 것이고, 악의 권세로부터 구원해내시고자 하시는 뜻이다.

  비록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악과 불의가 지배하는 악한 세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악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아 이 악한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과 그분의 의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대, 하올람 하바를 맛보고 그러한 세대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구원받아 천국 가는 차원이 아니라 이 악한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과 그분의 의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대가 되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 만들어 가고 확장해 나가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비록 이 악한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싸움이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자만이 장차 올 하올람 하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장차 살게 될 하올람 하바를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악한 세대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복음 안에 있는 것이다. 이 복음이 악의 권세를 파하고 무력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인간의 역사는 죄악의 역사지만 복음의 역사는 그 죄악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역사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역사이고 복음의 능력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 죽음에 던지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셔서 오는 세대, 즉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지배하는 세대로 이끄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랑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만난 복음이고 사람들에게 그토록 전하고자 했던 복음이다. 이 복음을 전함으로서 갈라디아 지역에 여러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난 후에 보니 이 복음에서 떠난 이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6-7절에서 그것을 말한다. 이번에는 우리말 성경으로 읽어보자.

“6. 그리스도의 은혜로 여러분을 부르신 분을 여러분이 그렇게 쉽게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사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이 여러분을 혼란에 빠뜨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이 같은 속히 떠나’라고 되어 있는데, 원어의 의미는 ‘이 같이 쉽게 떠나’란 뜻이다. 우리말 성경이 가장 그 의미를 잘 살려서 번역했다. 그랬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 참된 복음을 전했는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들어왔고 그들의 가르침에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이 너무나 쉽게 현혹되어 복음에서 떠나 다른 복음을 좇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이 놀랐다고 했고, 개역개정에는 이상하게 여겼다고 했는데, 실제적인 의미는 매우 분노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렇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거짓 교사들이 와서 복음을 변질시켰고 교인들이 그 거짓 가르침을 너무나 쉽게 따라가고 있으니 어찌 분이 생기지 않겠는가?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인 지 얼마 안 되는 초신자들이긴 하지만 너무나 쉽게 거짓 복음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너무나 울분이 나고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이라고 했는데, 영어로는 another gospel, different gospel이다. 다른 복음이란 이 복음 저 복음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이다. 진리가 하나인 것처럼 복음도 하나이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은 없다. 참된 복음과 다르다는 것 자체가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거짓이고 완전히 다른 것이고 이질적인 것이다. 이단이다.

  복음이란 말을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고 한다. 이는 이사야서 40:9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아름다운 소식을 전한다’, 히브리어로 ‘메바세렛’(מבשרת)이다. ‘메바세렛 찌온’이란 마을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아름다운 소식, 메바세렛, 이 말에서 유래된 단어가 바로 복음, good news, gospel이다.

  도대체 어떤 소식이길래 아름다운 소식, 복된 소식, good news인가? 성적이 올랐다는 것인가? 봉급이 올랐다는 것인가? 승진을 했다는 것인가? 한국 축구팀이 월드컵 우승을 했다는 것인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과 남북한 문제가 해결될 방안이 있다는 것인가?

  이 복된 소식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소식이다. 하나님은 무서운 분, 우리에게 무관심하고 비인격적인 분이 아니라,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 독생자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이 소식이다.

  이 보다 더 아름답고 복된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성적이 중요하고 봉급이 중요하고 승진이 중요하고 나라의 안정이 중요하다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영혼이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이것 아닌가!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복음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good news인 것이다.

  이 복음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전했던 것이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이 스며 들어와 거짓 가르침을 전하면서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울분이 터지는데,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이 그러한 거짓 가르침에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통탄할 일이다.

  이 통탄할 일을 바로 잡기 위해 쓴 편지가 바로 갈라디아서인 것이다. 그러기에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고, 더불어 참된 복음만이 줄 수 있는 자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결론은 매우 단순하고 분명하다.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서만 구원 받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분명히 기억하자. 다른 복음은 없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는데, 부탁할 것은 매주 주중에 갈라디아서를 읽고 묵상해보길 바란다. 모두 여섯 장이다. 그리 길지 않으니 갈라디아서 전체를 주중에 읽고 묵상하고 이어지는 강해를 듣기를 바란다. 그럴 때 말씀의 영이신 성령께서 큰 깨달음의 은혜를 주실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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