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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를 좋게 하랴?

  • 류공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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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9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갈라디아서 1:6-10

   지난주부터 갈라디아서 강해를 하고 있는데, 주중에 갈라디아서를 통독할 것을 부탁을 했다. 다들 읽으셨는지요? 다시 한 번 부탁드린다. 강해가 진행되는 동안 갈라디아서를 많이 읽고 묵상하는 시간들을 갖길 바란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1-5절은 서신의 인사부분에 해당된다. 기록자, 수신자에 대한 소개, 그리고 수신자들에 대한 안부의 인사를 전하고, 유대적인 전통에 따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고 나서 보통 감사의 인사를 하게 된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그 서신을 받는 교회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하게 된다.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들을 보면 이러한 감사가 처음 인사에 이어 나온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의 경우만 유독 그런 감사가 없이 바로 질책이 나오고 있다. 그것이 바로 6절이다. 우리말 성경으로 읽어보자.

  “그리스도의 은혜로 여러분을 부르신 분을 여러분이 그렇게 쉽게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뜻 보면 점잖게 표현되어 있는 것 같지만 지난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사도 바울은 매우 화가 난 상태에서 갈라디아 교회가 처한 위기상황을 지적하며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교회도 아니고 그가 복음을 전하여 세운 교회인데, 그런 교회가 다른 복음에 속아 너무나 쉽게 따라가고 있으니 어찌 울분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갈라디아교회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바울은 그들을 향한 사랑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이 서신을 쓰고 있는 것이다.

  6절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다시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여러분을 부르신 분” 이라는 이 말에 담겨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복음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그 은혜로 우리가 죄용서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이 왜 복음인가?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값없이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은총을 베푸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은 은혜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주신 엄청난 값을 치르셨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기에, 오직 그 사실을 믿는 것밖에는 없기에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사람의 노력과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다. 자기 의고 자기 공로이고 자기 자랑일 뿐이다. 죄인인 인간이, 그 속까지, 뿌리까지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이 어찌 자기의 노력과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 그 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을 통해서만 죄용서의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끝없이 자기의 노력과 행위로 구원의 끝자락을 잡아보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종교이고 도덕이고 착하게 살면 되지 하는 생각이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 믿은 후에도 나타난다. 내가 이렇게 했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인정해주실 것이라는 생각이다. 순종이나 봉사나 사역은 은혜를 받은 자로서의 자연스런 열매이지 결코 자기 의가 될 수 없다.

  죄의 본성은 자기주장이다. 자기주장이란 말은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력과 행위로, 혹은 자신의 가진 무엇으로 자기가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기주장의 자리에는 하나님이 없다.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자기주장의 자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 내가 떡하니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주인으로 자리를 잡고 행하실 수 있겠는가?

  항상 주의하라. 우리를 끝없이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바로 자기주장이며 자기 의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끈 이들이 누구인지 아는가? 자기 의를 주장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대해서는 사도행전 15장에 나온다. 먼저 그 배경을 볼 필요가 있다. 10장부터가 그 배경인데, 이 시간을 간략하게 설명할 것이고 주중에 찬찬히 읽어보면 더 이해가 잘 될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그 유명한 고넬료 사건이 나온다.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왜 중요한가? 이 사건을 통해 공식적인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가이사랴에 근무하던 로마 군대의 백부장, 즉 장교인 고넬료가 환상 중에 주의 천사가 베드로를 청하라 지시를 받게 된다. 그때 베드로는 욥바에 있었다. 다비다(=도르가)를 살린 기적을 행하고 여러 날 피장(무두장이, 가죽 만드는 사람)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가이사랴에서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베드로를 청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주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환상 중에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들을 보여주시고는 잡아먹으라 하신 일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유대인들이 지키는 음식법(코셔)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방인들에 대한 인식과 선입견을 깨뜨리신 사건이다. 유대인들이 개, 돼지처럼 부정하다며 경멸하고 가까이 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만큼이나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교회가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지만 어디까지나 유대인들에게 국한되어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교인들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물론 이방인들 중에 제 발로 찾아온 경우에는 받아들였지만 기본적으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그만큼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선입견이 뿌리가 깊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뜨리신 사건이 바로 부정한 음식 광주리 환상과 고넬료 사건이다.

  베드로는 이 환상을 통해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가 복음을 전했을 때 고넬료와 그와 함께 한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방언을 말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이 사건을 보통 ‘이방인의 오순절’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고넬료를 포함한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되고, 이 사실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게 된다. 이것이 11장이다. 이를 통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하게 되고 이방인 선교가 시작된다. 그래서 세워진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이다.

  안디옥이 두 곳이 있는데, 터키 중앙 갈라디아 지역에 하나, 이를 비시디아의 안디옥이라 부른다. 그리고 레바논 북쪽 지역에 안디옥이 하나 더 있다. 여기서 나오는 안디옥이 이곳이다. 그 안디옥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엇이라 불리게 되었는가? ‘그리스도인’, 히브리어로 하면 ‘משיחים’(Messianic people)이라고 최초로 불린 곳이 바로 안디옥이다.

  이어지는 12장에서는 헤롯왕, 정확하게는 헤롯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인데, 교회에 대한 핍박을 하게 된다.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를 잡아 죽인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생긴 것이다. 그에 대해 유대인들이 기뻐하며 교회에 대한 핍박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하여 베드로도 잡혀 투옥되지만 주의 천사가 그를 구해낸다.

  이후 헤롯 아그립바는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죽게 되지만 유대교의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된다. 그럼에도 교회는 더욱 더 부흥하게 되고 곳곳에 복음이 전해지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선교사로 보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아 이 두 사람을 선교사로 보내게 된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이다. 레바논 북쪽에 있는 안디옥에서 출발해서 구부로(=사이프러스) 섬을 거쳐 터키 남쪽의 앗달리아(=안딸리아)로 들어가 터키 중앙의 갈라디아 지역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그 내용이 바로 13-14장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15장인데, 첫 구절이 이렇게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왔다고 했다. 안디옥 교회로 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무엇이라 가르쳤는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고 가르쳤다. 유대로부터 내려온 이들이 누구인지는 5절에 나온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바리새파에 있던 유대인들 중에 믿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이들이다. 바리새파하면 어떤 사람들인가? 모세의 법과 장로들의 유전, 즉 Oral Torah(미드라쉬, 할라카 등)를 목숨처럼 여기는 이들이다. 이들 중에 얼마가 예슈아를 메시아로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지금으로 하면 정통파 유대인들이나 유대교 랍비들 중에서 예슈아를 메시아로 믿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조차도 예슈아를 메시아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예전의 것들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사실 버릴 필요는 없다. 적어도 유대인이라면 말이다. 유대인이기에 그들이 조상 때부터 지켜온 할례나 음식법, 율법을 버릴 필요는 없다. 그대로 지켜도 된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이들 중에 일부가 예슈아를 믿은 후에도 여전히 할례와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즉 예슈아를 메시아로 믿지만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유대인이기에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도 이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문제는 그것을 관습과 전통의 차원이 아니라 구원의 관건으로 삼을 때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용서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 즉 하나님을 떠나는 것과 같은 짓이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들의 전통과 조상들의 가르침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행동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나려면 제대로 만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만나려면 사도 바울처럼 만나야 한다. 사도 바울은 다음 주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었고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다. 랍비였다. 그 역시 조상들로부터 받은 할례와 율법을 목숨처럼 여겼던 사람이었다. 그것으로 구원받는 줄 알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 그는 더 이상 할례와 율법에 묶이지 않았다. 자신이 유대인이기에 유대인의 관습과 전통을 존중했지만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임을 온전히 깨달았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었던 것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가장 고상한 줄로 여겼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신들을 부르셨음에도 이들은 여전히 할례와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고, 이것을 이방인들에게까지 강요를 했던 것이다. 이방인들도 우리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지만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들이 갈라디아 지방까지 와서 바울이 세운 교회들에 들어가 이러한 가르침으로 교인들을 현혹하여 복음에서 떠나게 했다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초대교회의 사도회의에서 이방인들에게는 이러한 유대적인 관습을 적용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린 후였다. 15장을 계속 읽어보면 바리새파 출신 교인들로 인해 문제가 되자 사도들이 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논하게 되는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들의 입장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똑같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얻은 결론이 28-29절이다.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자.

  “다음 몇 가지 긴요한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더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 성령과 우리의 결정입니다. 여러분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지 말고 피나 목 졸라 죽인 짐승도 먹지 마시오. 그리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마시오. 여러분이 이런 몇 가지만 삼가면 다 잘 될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사도회의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결정된 사항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의 짐을 지워 괴롭게 하지 말고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지키는 것으로만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결정을 했음에도 바리새파 출신 유대주의자들은 계속해서 교회에 들어와서 이러한 가르침으로 복음을 변질시키고 교인들을 혼란케 하고 미혹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앞서 말했듯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죄악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시대를 여셨음에도 여전히 구시대의 할례와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 것은 하나님을 저버리는 죄악이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대한 거짓말을 하는 죄악인 것이다.

  죄 중에 가장 사악한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대한 거짓말이다. 이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약화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거짓말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이다. 그러기에 그러한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8절이 그것이다. 공동번역으로 읽자.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미 전한 복음과 다른 것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여기서 저주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아나떼마’인데, 히브리어 단어 ‘חרם’을 번역한 것이다. 이 חרם이란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진멸’로 번역된 단어이다. 이 חרם이란 단어는 좀 더 깊은 뜻이 있지만 이 시간 그것을 다 말씀 드리기는 시간적으로 어렵고, 가나안을 점령할 때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바로 이 חרם, 진멸이다. 완전하게 멸하라는 명령이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범할 경우에도 이 이 חרם, 진멸을 명하셨다. 이 경우에는 선택된 언약공동체에서 끊어짐을 뜻한다.

  사도 바울이 지금 선포한 저주가 바로 이것이다. 완전히 멸망당하는 חרם의 저주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으로부터 끊어지는 저주이다. 어떤 자들이 이런 저주를 받는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그 안에 누구까지 포함시켰는가?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가끔 천사에게서 직접 계시를 받았다며 이상한 소리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직통 계시다. 대개 이단들이 그런 소리를 한다. 조심하라. 저주 받을 자들이다.

  여기에 사도 바울 자신까지도 포함을 시켰는데, 이는 자기저주 선언이다. 자신이 사도지만, 사도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진멸되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매우 두려운 말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복음을 전하는 마음자세를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평생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복음을 전했고 설교를 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만을 전했지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것을 전하지 않았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고 설교를 하는 이들이 명심해야 하고 반드시 붙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약화시키거나 변질시키는 잘못된 가르침을 전해서는 안 된다. 복음과 성경의 권위를 흔들거나 그 내용을 변질시키거나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오늘날 문제 중에 하나는 강단의 문제이다. 화려하고 재미있기는 한데 그 내용에 복음이 없고 성경이 없는 경우가 많다. 강단은 자신의 지식이나 생각을 전하는 자리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자리이다. 오직 그것만을 전해야 한다. 다른 것들은 그저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이 되는 도구일 뿐이다. 도구가 복음을 덮어서는 안 된다.

  듣는 이들도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날은 이단들과 거짓된 가르침으로 미혹하는 이들이 많다. 복음과 성경의 올바른 내용을 잘 분별해서 듣는 분별력과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분별력이 없으면 이재록이나 신천지 같은 이단에 미혹되기 쉽고, 이단까지는 아니더라도 복음과 성경의 본질과 내용이 변질된 설교나 가르침에 빠지기 쉽다.

  이 분별력은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읽고 묵상하고 배우며 그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며 순종하는데서 생긴다. 그럴 때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이다. 이 영 분별력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마지막 때에 삼킬 자를 우는 사자처럼 찾아다니는 사탄의 궤계에서 신앙을 지킬 수 있다.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할례와 율법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바리새파 출신 유대주의자들은 사도 바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가르침을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사람들을 믿게 하려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한다는 비난이었다. 그것이 바로 10절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들을 좋게 한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을 공격한 이들의 비난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디모데는 아버지는 헬라인이고 어머니는 믿는 유대인, 즉 예슈아를 믿는 메시아닉 유대인이었다. 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날 때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디모데는 아버지는 헬라인으로 완전한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로 인해 할례를 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2:3을 보면 헬라인 디도에게 할례를 베푸는 일은 단호히 거절했다. 이는 디도에게 할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리새파 출신 유대주의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주장에 담긴 의도를 알기에 이를 단호히 거절한 것이다.

  이것을 놓고 이들은 사도 바울이 어떤 때는 할례를 주고 어떤 때는 할례를 거절한다고 하면서,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좋게 해서 지지를 받고 인기를 얻고자 함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바울이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려고 할례와 율법이 없는 복음을 고안해냈다고 비난한 것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에게는 분명한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복음과 복음 안에서의 자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만을 전한다는 원칙이고, 이것이 본질이고 그 외에 다른 것들은 크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함이었다. 즉 본질이 아닌 비본질에 대해서는 자유함이 있었다.

  그의 이러한 원칙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고린도전서 9:19-23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이것이다. 23절 마지막 절, “복음을 위하여”라는 이 말이다. 복음을 위하여,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하여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으로서 대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자신은 율법에서 자유함에도 율법 아래 있는 자들처럼 대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유대인들이 많은 지역이기에 그들로 인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푼 일이다. 왜? 그래서 유대인들을 하나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자신은 율법을 받은 유대인임에도 율법이 없는 이방인처럼 그들을 대했다는 것이다. 왜?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었다.

  복음을 위해서, 영혼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이것이 사도 바울의 원칙이었다. 본질을 붙잡는 원칙이었다. 유대인들의 할례나 율법은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비본질이다. 종교적인 관습이고 생활 패턴이었다. 바울 역시 유대인이었기에 그것을 그대로 인정했다. 이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구원의 문제로 삼을 때는 달랐다. 이방인들도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며 비본질을 마치 본질인 것처럼 주장할 때는 달랐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원칙이었다.

  이는 예수님의 원칙이기도 하다. 예수님 역시 유대인으로서 탈릿을 쓰고 트필린을 쓰고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안식일과 유대 절기를 지켰다. 유대인들의 관습을 존중하셨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에서는 달랐다. 안식일이 아무리 중요해도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벌어진 것이 안식일 논쟁이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죄인을 용서하는 일을 가지고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범한다고 했던 논쟁이다. 예수님에게도 역시 본질은 영혼 구원이다. 복음이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원칙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복음을 위해서, 영혼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위해서! 이것이 그의 원칙이고 그가 붙잡은 본질이다. 그 외에는 복음과 신앙의 본질에만 어긋나지 않으면 괜찮았다. 할례를 줄 수도 있고 안줄 수도 있다. 왜? 할례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본질과 비본질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부분 우리는 본질과 비본질을 혼동한다. 본질이 아닌 것을 가지고 본질처럼 여긴다. 그래서 자기도 힘들고 남도 힘들게 한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청년들의 모습을 보고 문제를 삼았던 어른들이 있었다. 머리는 노랗게 염색하고 옷도 마음에 안 들게 입고 샌들 신고 교회 오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예배를 드리는데 전자 기타에 드럼을 치고 시끄럽다는 것이다. 이게 카바레인지 예배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인가? 아니다. 비본질이다. 머리 노랗게 염색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나이 들어 검게 염색하는 것이나 노랗게 염색하는 것이나 동기는 같다. 멋있게 보이려는 것 아닌가? 전자 기타를 치고 드럼을 치고 앰프를 크게 트는 것이 본질이 아니다. 청년들은 이렇게 예배 드려야 더 잘 드린다. 어떤 이들은 전통적인 예배가 편하고 어떤 이들은 열린 예배가 더 편하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이 아니다. 어른들 눈에는 조금 못마땅해도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그럼 너그러이 이해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계속 문제 삼고 야단을 치면 그것이 싫어 청년들이 교회에 더 이상 오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들의 기쁨을 위해 복음을 막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머리 노랗게 하고도 청년들이 교회에 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복음이 본질이고 영혼 구원이 본질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본질이다. 이 본질을 붙잡으라. 이 본질을 붙잡으면 다른 것에는 여유가 생긴다. 그것이 바로 자유함이다.

  반대로 본질을 놓치고 비본질에 집착하게 되면 자유함을 잃어버리게 된다. 복음이라는 본질을 놓치면 여전히 율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느냐에 묶여 자유함을 잃어버리게 된다. 영혼 구원이라는 본질을 놓치면 내 기준으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상처를 주게 되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본질을 놓치면 하나님의 뜻보다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 나의 욕심과 죄성이 원하는 일을 하게 된다. 교회 봉사를 하면서도 그렇고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사람을 기쁘게 하고 나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본질을 붙잡으라. 본질이 아닌 것에 집착하지 말고 본질을 붙잡으라. 복음을 위하여! 영혼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이것이 우리가 붙잡아야 할 본질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영혼구원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본질을 붙잡고 더욱 더 굳게 서가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다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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