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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받은 자의 행보

  • 류공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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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은 자의 행보
2011년 3월 5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갈라디아서 1:18-24

   먼저 찬양을 하나 하자. “은혜로다”

  우리가 예수 믿은 후에 가장 많이 듣고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은혜일 것이다. 은혜가 무엇인가 물어보면 나는 변화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거듭남의 변화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의 삶의 방향은 달라지게  된다. 우리의 영혼과 인격과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구원의 감격과 자유, 우리 안에 일어나는 믿음, 주님을 향한 새로운 소망,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의 방향이 달라지게 된다. 나 중심의 이기적이고 무의미한 삶의 방향이 하나님 중심의 삶, 하나님께 원하시는 삶의 방향으로 달라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고 구원이다.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꾼다. 아직도 예수 믿기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여전히 나 중심의 삶에 머물고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거듭남이 아니다. 구원 받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그런 믿음의 고백이 있다면 구원 받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한 거듭남으로 나아가길 원하신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과 삶의 방향이 정말 구원받은 자로서 합당한 모습으로 바뀌길 원하신다.  

  빌립보서 2:12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 무슨 뜻인가?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만으로는 온전치 않기 때문에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고 한 것인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온전히 이루어졌다. 믿는가? 흔들리지 말라.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에 있는 것이지 나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바른 뜻을 이해하려면 이어지는 13절을 함께 봐야 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을 잘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서 구원을 이루신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있다면 이미 구원은 이루어졌다. 그런데 우리의 반응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구원은 이루실 때, 나는 밖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 했다. 그분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 즉 우리 안에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 있도록 믿음을 더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열망을 자극시키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인격과 삶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주신다. 구원받은 자로서 합당한 행동과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에 감동을 주신다.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러한 마음을 주시고 열망을 자극시키시고 감동을 주실 때 우리의 반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한 순간의 은혜, 한 순간의 감동, 한 순간의 결심으로 끝나면 안 된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그분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과 뜻을 좇기로 결단하고 인내하기로 결단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바로 이 뜻이다. 내 안에서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항상 복종하여 그대로 살아감으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를 이루라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진정한 거듭남이고, 우리 안에 있는 구원을 우리의 밖에서, 즉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루는 길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내 인격과 삶 가운데 그 증거들이 보여야 하지 않는가? 그저 교회 다니는 것으로만, 식사 기도하는 것으로만 증거를 삼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변화를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변화를 이끄신다. 우리의 변화를 위해, 진정한 거듭남을 위해, 우리 밖에서 나타나는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오시고 말씀하시고 감동을 주신다. 이에 대해 반응하라. 긍정의 반응, 아멘의 반응을 하라. 순종의 반응을 하라. 당신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당신의 인격과 삶에서 나타나게 하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에 합당하게 변화된 인격과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 그러한 사람이 가는 길을 ‘은혜 받은 자의 행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러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평생 감사하면서 그 은혜에 합당한 변화된 인격과 삶을 살아갔던 행보를 보여주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우리가 그러한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여러분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나는 보고 있고, 그 은혜에 순종하여 살려고 하는 여러분들의 노력과 기도와 순종을 본다. 그래서 담임목사로서 감사하고 여러분들을 사랑한다. 그러기에 더욱 권면하는 것이다.

  내 안에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긍정으로 반응하고 아멘으로 반응하고 순종으로 반응하여 더욱 더 여러분들의 인격과 삶에 그 은혜가 나타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변화가 나타날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 역시 은혜 받은 자의 행보를 나타내고 더욱 힘차게, 계속해서 해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사도 바울이 보여준 은혜의 행보를 중심으로 말씀을 보도록 하자.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1:11부터는 그의 자전적인 고백이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떠했는지, 주님을 만난 후에 어떻게 변화된 삶을 살았는지 요약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변화된 행보는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열심의 변화, 삶의 방향의 변화이다.

  이 부분은 지난주에 나누었던 내용을 기억하면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본문 앞에 있는 13-14절을 보자.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지난주에 자세히 살펴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바울은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성경과 유대교의 많은 가르침을 연구하는데 열정적이었고,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다른 유대교인들보다 열성이 있었다.

  그토록 열심히 하나님 믿었는데,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방향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때려잡고 교회를 멸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 하나님께 대한 열심, 그러나 그 방향이 잘못되었던 바울을 보면서 나는 오늘날 유대교인들을 본다. 우리가 보통 다티, 종교인이라고 부르는 정통파 유대교인들을 보면 정말 열심이 있다. 일 년 내내 그런 시커먼 복장을 하고 살고, 여전히 이마와 팔에 트필린을 두르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그 열심은 대단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율법적이다, 외식이다, 바리새적이다 말하지만, 그들의 열심만큼은 인정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배워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는 말하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대해 너무 가볍게 여기고 경향이 많다. 은혜는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지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보면서 기도하기는 바울처럼 그들도 그 열정과 열심이 올바르게 변화되기를 간구한다. 하나님을 향한 그 열정과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그 열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저주하는 열심이 아니라, 바울처럼 예슈아께서 율법의 완성이요 하나님의 구원이심을 깨닫고 예슈아를 향한 열정, 예슈아의 복음을 향한 열심으로 변화되기를 간구한다.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았던 유대인 중에 유대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을 변화시키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잘못된 열심을 갖고 있는 유대교인들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주사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실 줄로 믿는다.

  신앙적인 열심을 떠나 삶에 대한 열심을 보자. 열심 자체는 참 좋은 것이다. 무언가 열정이 있는 사람이 아무런 열정도 없는 사람보다 낫다. 사람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열정까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산다. 성공을 위해, 출세를 위해, 명예를 위해, 권력을 위해, 부귀영화를 위해 열심히 산다. 어떤 이들은 자유를 위해, 인권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고, 어떤 이들은 남을 속이고 빼앗고 사기 치는 일에 열심이다.

  열정, 열심, 죄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열심은 허무하다. 그 결과는 허무하고 헛되다. 우리의 열심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 주겠지만, 그 끝은 허무이다. 결코 채워지지 않고, 우리의 생명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고 만다. 누군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사라지고 말 안개를 잡으려 발버둥 치며 살고 있다.

  열정의 방향, 열심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나의 안녕과 부귀영화를 위한 삶의 방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삶의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나의 영광을 구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

  유대교 문헌 중에 기도에 관해서 이런 글이 있다. “기도의 카바나가 기도의 내용을 결정한다.” 여기서 ‘카바나’란 의도, 목적이란 뜻인데, 방향을 뜻하는 ‘키분’이란 히브리어 단어에서 나온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 이해하고 있다. “방향성을 결정짓는 것은 본질이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유대교 랍비들은 기도의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본질에 대해 말씀하셨다. 본질을 제대로 알아야 방향성도 바르게 나오고 투명성도 나온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산상수훈 강해 때 말씀을 나눈 적이 있다.

  기도는 물론이고 모든 신앙적인 행위들이 그러하고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바른 방향성, 바른 목적성을 가지고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하고, 삶 역시 바른 방향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바르게 해야지, 바르게 살아야지 한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올바른 방향성으로 이끌어주고 잡아주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본질이다. 기도의 본질을 제대로 알면 기도의 방향성은 저절로 바르게 된다. 그러면 기도의 내용도 바뀌는 것이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면 신앙생활의 방향도 저절로 바르게 된다. 그러면 신앙생활의 내용도 달라지고 열매도 달라지게 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 그 본질을 붙잡을 때 삶의 방향은 제대로 잡게 되고 그러면 삶의 내용도 달라지고 결과도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본질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방향성을 바르게 잡아주고 계속해서 바르게 갈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본질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닮아가는 것이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삶의 방향이자 목표인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이다. 이 본질을 깨닫고 이 본질에 집중하고 이 본질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은 방향성이 분명해 진다. 기도를 왜 하는가? 무언가 복 받기 위해? 나의 안녕과 부귀영화를 위해? 맞다. 그를 위해서도 기도한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와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것이 기도의 본질이 아니다. 기도의 본질은 나를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로 채우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시간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구하는 시간이다. 내가 사라지고 주님이 살아나는 시간이다. 이 본질을 붙잡고 기도하라. 여러분들의 기도가 달라질 것이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내 목숨과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 본질을 붙잡고 충실해보라. 당신의 신앙생활에서 어떠한 변화와 열매가 나타날 것 같은가?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내 인격과 행동, 생각과 가치관, 삶의 결정과 실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나의 마음과 가정과 직장과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본질이다. 이 본질을 붙잡고 살아가보라. 어떠한 변화와 열매들이 당신의 인격과 삶에서 맺어질 것 같은가?

  성공에 너무 목매지 말라. 성공은 인생의 본질도 목표도 아니다. 성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그것이 성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가치관과 삶이 나타나는 성공이어야지 진짜 성공이다.      

  본질이 카바나, 방향성을 결정짓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사람들이다. 더 이상 헤매지 말라. 다른데서 찾지 말라. 더 이상 고민하고 방황하고 갈등하지 말라. 우리의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붙잡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의 인격과 생각과 가치관과 삶을 닮는 것에 집중하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삶의 본질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시고 내용을 바꾸시고 열매들을 바꾸실 것이다.

  사도 바울이 보여준 은혜 받은 자의 두 번째 행보는 용서와 화해이다.

  18-19절을 보자.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그 후’라는 말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를 말한다.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지 삼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것이다. 삼년 만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연수 계산법에 따르면 삼년 째 되는 해이다. 회심한지 삼년 째 되는 해에 예루살렘으로 갔다. 왜인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갔다. 게바, 정확한 발음으로는 케이파(כיפא)는 베드로의 히브리식 이름인데, 정확하게는 바위를 뜻하는 케프(כף)의 아람어식 발음이다. 게바, 베드로를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것인데, 무엇 때문일까?

  그 목적을 '방문하려고'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말로는 단순한 의미지만 헬라어 의미는 두 가지를 갖고 있는데, 그 첫째 의미를 먼저 보자. '어떤 사람을 알고자 하여'라는 뜻이다. 게바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자 하여 갔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단순히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자 하여 갔을까? 그럴 수 있겠으나 그것은 둘 사이에 별다른 문제가 없을 때 가능한 것이다. 아무 문제도 없고 그 사람에 대해 많이 들었는데 아직 직접 만나보지 못했을 경우 어떤 사람인지 알고자 하여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베드로의 관계는 다르다. 물론 바울이 직접 베드로를 만난 적은 없었다. 다만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사도이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중에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문제는 단순히 직접 만난 적이 없는 관계가 아니라 바울은 가해자요, 베드로는 피해자였다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과 교회를 핍박하고 멸하려 했던 가해자였고, 베드로는 그러한 사람들과 교회의 지도자로 피해자의 대표격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다.

  무엇을 위한? 용서와 화해를 위한 방문이었다. 자신이 과거에 행했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자 함이었다.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이었지만 아직 교회의 용서를 받지는 못했다. 그 용서를 구하기 위해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베드로를 만났을 것이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역시 바울의 사죄를 받아주었고 그를 형제로서, 동일한 사도로서 받아주었다.

  무엇을 말하는가? 은혜 받은 자의 행보는 용서와 화해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용서 받은 자로서 사람에게도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아주고 화해로 나아가야 한다. 에베소서 2:14-16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샬롬이다. 우리 안에 샬롬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샬롬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이 샬롬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샬롬이신지라! 십자가로 하나님과 샬롬하게 하셨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샬롬하게 하셨고, 주인과 노예가 샬롬하게 하셨다.

  은혜를 받은 우리는 샬롬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날마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순종을 통해 하나님과 샬롬해야 하고, 이웃과도 샬롬해야 한다. 샬롬은 용서를 통해 주어진다. 용서하라. 누군가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라. 누군가 나에게 해를 끼치고 상처를 주었다면 용서하라.

  우리에게는 이 능력이 없지만 우리를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분의 사랑을 의지할 때 우리는 용서할 수 있다. 용서와 그로 인해 주어지는 샬롬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나아가야 할 자리이다.

  사도 바울이 보여준 은혜 받은 자의 세 번째 행보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18절의 '방문하려고'라는 단어의 두 번째 뜻을 보면 알 수 있다. 첫 번째 뜻이 ‘어떤 사람을 알고자 하여’라고 했는데, 두 번째 뜻은 ‘어떤 사람에게서 정보를 얻다’라는 의미이다. 이 뜻에 따르면 예루살렘으로 가서 게바를 만난 이유가 무엇인가? 게바에게서 정보, 지식을 얻기 위해서다. 어떠한 지식?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맞다. 바울은 자신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복음을 받았고 사도직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과 가르침에 대해 다 받은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용서 받고 구원받음의 복음을 분명히 받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직계 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하셨던 사역과 가르침을 다 알지는 못했다. 이를 알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서 베드로를 만난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은혜 받은 자의 세 번째 행보를 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이다. Knowing Jesus Christ이다.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열망을 준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복음을 받았지만, 주님을 더 알기 위해 아라비아, 광야로 갔다. 그곳에서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났다. 많은 깨달음을 주셨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했다. 예수님을 직접 옆에서 보고 그 음성을 듣고 그 가르침을 배웠고, 그분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보았던 제자에게서 더 듣고 싶었다. 더 알고 싶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의 평생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아가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가장 고상한 줄 알고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빌 3:8).

  이것이 그가 계속해서 은혜의 행보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를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으로 이끌었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를 더욱 더 견고하게 은혜의 행보를 할 수 있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은혜가 우리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이끈다. 그분을 더 알고자 하는 사모함이 생긴다. 그래서 그분을 알아가게 되는데, 더 알수록 그분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귀한 지를 깨닫게 되고, 그래서 그 지식이 나를 붙들고 나를 새롭고 하고 나를 변화시키고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은혜의 행보를 하게 한다.

  호세아서 4:6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여기서 지식은 어떠한 지식인가? Knowing God,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의 선민이라 자처하던 사람들이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님을 안다고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눈에는 지식이 없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할 지경이 되었다.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상한 하나님을 믿게 된다.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이다. 나에게 복만 주어야 하는 하나님, 무조건 나를 이해해줘야 하고 내 잘못은 눈감아 줘야 하고 나에게 복만 주어야 하는 그런 이상한 하나님을 만들고는 그 하나님이 하나님이라고,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게 된다. 하나님을 바알로,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든 어리석임이다. 혹은 하나님을 인간에게 무심하고 그저 죄에 대해 엄하게 벌하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알기도 한다.

  참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정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호세아 6:3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 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나님을 알자, 힘써 하나님을 알자.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벽 에 뜨는 햇빛 같이 어김없이 비춰주시고, 아무리 건기가 길어도 결국에는 이른 비가 내리고 늦은 비가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은혜로 응답해주신다.

  하나님을 알아가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망하지 않는다.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 했다. 왠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가장 고상한 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불어 히브리서 3:1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Knowing Jesus, 이 길이 Knowing God의 길이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라. 그분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바라보는 기도를 통해 알아가고,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아가는 시간을 반드시 가지라. 주님을 알기를 사모하고 알아가려는 노력을 하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자는 망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당신의 영혼과 삶을 밝게 비추는 빛이 될 것이며, 주님을 아는 지식이 당신의 삶의 행보를 은혜의 행보가 되게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보여준 은혜 받은 자의 네 번째 행보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21-24절을 읽어보자.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루살렘에서 십오일 머문 후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가게 된다. 이를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 사도행전 9:22 이후의 말씀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 예수께서 어떻게 자신을 만나주셨는지,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증거했고, 이 사실을 유대인들에게도 전했다. 이에 유대인들은 바울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제자들은 바울을 가이사랴를 거쳐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로 피신시켰다(지도).

  예루살렘의 유대교인들의 핍박을 피해 길리기아 지방으로 온 바울은 여전히 복음을 전했다. 22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유대는 갈릴리와 사마리아까지 포함하는 로마의 행정지역으로서의 유대이다. 즉 이스라엘 전 지역을 뜻한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시작된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이스라엘 땅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19절에서 게바와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했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해로 인해 몇몇 사도들만 남고 각지로 흩어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각지로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곳곳에 교회를 세우게 된다. 그 교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교회들이 바울을 직접 알지는 못했다. 다만 23절을 표현대로 자신들을 박해하였고 그 믿음을 멸하려 했던 자였는데, 이제는 자신이 멸하려던 그 믿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 함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가는 어느 곳에서나 복음을 전했다. 이것이 바로 은혜 입은 자의 행보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믿는 복음이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구태여 복음을 전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라면, 정말 구원의 감격과 확신이 있는 자라면 그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밖에 없다.

  바울처럼 선교사가 되어 그리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나의 가족들에게, 가까운 이웃들에게, 직장 동료들에게 전하게 되지 않겠는가? 내가 가족의 구원과 이웃의 구원에 전혀 관심이 없다면 나는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 여러분, 은혜 입은 자답게 그 은혜를 전하는 사람들이 되자. 나를 구원하고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은혜 입은 자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영혼을 품고 기도하는 사람이며, 그에게 구원의 복음, 자유의 복음을 전하는 자이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살리는 은혜 입은 자의 행보가 있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을 통해 은혜 입은 자의 행보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다. 은혜 입은 자의 변화, 열심의 방향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자 하는 열망에 대해서 보았고, 용서 입은 자로서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이루는 모습을 보았다. 또한 자신을 구원하고 자유케 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모습을 보았다. 어떠한가? 정말 은혜 입은 자다운 행보 아닌가?

  이 아름다운 행보를 우리도 해 나갈 수 있기를 소원한다. 은혜를 받았음에도 은혜를 모르는 사람처럼 퇴보하는 그런 모습은 이제는 끝내자. 기억하라.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행보로 나아가게 하지만, 우리 스스로 은혜 입은 자답게 은혜의 행보로 나아가려고 사모하고 애쓸 때 그 행보가 우리를 더욱 더 은혜의 자리로 이끈다.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여, 은혜를 입은 자답게 은혜의 행보로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기를 우리의 은혜시오 구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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