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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차별 없는 부르심, 종된 섬김

  • 류공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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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차별 없는 부르심, 종된 섬김
2011년 3월 26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갈라디아서 2:6-10

   지난 주 갈라디아서 강해를 잠시 멈추고 부림절을 맞아 에스더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면서 차별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하만의 유대인 학살 음모는 차별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차별은 범죄한 인간의 죄성에서 나오는 죄악이다. 그래서 범죄한 인간들이 사는 곳에는 늘 차별이 존재해왔다. 서로를 비교하고 구별 짓고 차별하고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고 짓누르고 빼앗고 공격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차별은 뿌리 깊은 인간의 죄성에서 나온 죄악이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유대 선동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사도 바울을 공격하고 거짓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의 근거는 차별이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의 차별이고, 예루살렘 사도들과 바울과의 차별이었다. 그들은 차별주의자들이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방인들도 우리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만 온전히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고 하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우월하다는 것이다.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전하는 복음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고, 사도직의 차별이고 복음의 차별이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시고 사도들과 바울을 세우신 주님의 뜻은 차별이 아니라 하나됨이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다. 이 부분은 예루살렘 회의의 내용이자 결론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이유는 그가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에게 제출하기 위함이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 사역에 대해 이미 들어왔었고 지금은 바울에게서 직접적으로 그 사역의 성과에 대해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결론은 주님께서 바울을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르셨고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자신들과 같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이 7-8절이다.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여기서 무할례자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말하고, 할례자는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을 말한다. 즉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내용과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전한 복음의 내용이 같음을 확인했다는 말이다. 또한 베드로에게 역사하셔서 그를 유대인들의 사도로 삼으신 주님께서 바울에게도 역사하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는 확인이다. 이러한 확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바울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론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9절이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기둥 같이 여기는’ 이란 말은 교회의 기둥과 같은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즉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사도들을 말한다. 사도들 가운데 세 명을 거론하는데,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다.

  예루살렘교회를 대표하는 세 명의 지도자,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알았다는 것이다. 알았다는 말은 앞서 말한 것처럼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자신들의 전하는 복음의 내용과 같으며, 자신들을 사도로 세우신 주님께서 바울 역시 사도로 세우셨음을 확인했고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인정을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한 것이다. 우리 성경으로는 친교의 악수로 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어를 직역을 하면 ‘교제의 오른손을 주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교제는 코이노니아다. 코이노니아는 단순히 먹고 마시며 즐기는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제로 번역된 코이노니아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함께 하심 가운데 이루어기는 교제로, 영적 교제, 거룩한 교제이다. 그러기에 이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는 교제이며, 서로를 인정하고 세워주고 협력하는 교제이며, 인격적인 만남과 서로의 필요를 공급해주는 섬김의 교제이다. 이것이 바로 코이노니아이며 우리 믿는 자들 사이에 있어야 하는 교제이다. 단순한 친교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코이노니아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고, 이 코이노니아의 오른 손을 주었다는 것이다. 오른 손을 주었다는 말은 당시 사회에서는 두 당사자들의 협정이나 조약을 맺을 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즉 이 말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바울과 바나바가 회의를 통해 의견일치를 보았고 협약을 맺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내용이 무엇일까? 이는 이어지는 갈라디아서의 내용과 다른 서신들, 그리고 사도행전을 통해 볼 수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는 이제 율법과 할례의 시대는 지나갔고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할례를 통해 언약 백성이 되고 율법을 통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러한 옛 시대는 지나갔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서만 의롭다 함을 얻으며 그리스도를 믿을 때 임하시는 성령 안에서 언약 백성이 된다는 것을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바울과 바나바가 의견일치를 보았다는 것이다.

  비록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그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롭게 됨, 즉 구원이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니 어떠한 이견이나 반대 없이 전적인 의견일치를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협약의 내용은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에게로,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할례자들, 즉 유대인들에게로 가는 것이었다. 이 말은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님께서 세우신 사도로 인정한다는 말이고, 그래서 각자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겨주신 사역을 충실하게 한다는 의미이며, 그러면서 함께 협력한다는 뜻이다.

  유대 선동주의자들은 차별을 만들어 공격함으로 사도 바울의 이방인 선교사역을 방해하고 교회 안에 문제를 만들어 어지럽게 했지만, 차별을 거부하시고 하나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진 사건이 바로 이 사건이다.

  교회의 주인이시며 당신의 일꾼들을 세우시는 주님의 뜻은 차별이 아니라 하나됨이다. 하나되어 서로를 인정하고 세워주고 협력하는 하나됨이 주님의 뜻이다. 늘 그렇지만 주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뜻과 반대된다. 인간들의 뜻, 인간들이 추구하는 방향은 차별이다. 이 차별은 뿌리 깊은 죄성에서 나오는 죄악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차별이 존재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경우 차별이 역사적인 아픔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수많은 외침과 불확실한 삶에서 살아남기 위한 공동체적인 끈이 필요했다. 그것이 혈연, 지연, 학연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기저기에 속해있고 어떻게든 끈을 만들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살아남기 위한 끈이 후에는 차별이 되었다. 우리 안에 속해있지 않으면 다른 것이다. 우리와 다르면 적이다. 차별의 대상이 되었고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이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지역차별이 존재하고, 지연, 학연, 혈연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 공정하지 못하다. 이제는 세대 간의 차별까지 존재한다. 외국인에 대한 차별도 심하다. 남북 간의 차별도 큰 문제이다. 통일이 되어도 이것은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최대의 과제는 경제가 아니라 차별을 없애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차별이 없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여야 하는데 많은 교회에 차별이 존재한다. 그러나 교회는 차별을 거부해야 한다. 교회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공동체로 주님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주님의 뜻만이 이루어져야 한다. 주님의 뜻은 하나됨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차별을 거부하셨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거부하셨고, 의인과 죄인의 차별을 거부하셨고,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셨고, 여자들을 존중하셨고, 노예들을 사람으로 대우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차별은 거부된다. 모두가 다 죄 용서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한 형제이며 한 자매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는 차별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 다르다는 것으로 차별하는 것은 없고 서로를 형제자매로 보며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섬기는 것만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다. 차별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죄성과 탐욕으로 가득 찬 도적들의 소굴이 되고 만다.

  세상의 차별을 교회로 끌고 들어올 때가 문제다. 그럴 때 교회는 그 힘을 잃고 병들게 된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중세 교회다. 교회를 섬기기 위해 주신 질서로서의 성직을 계급으로, 신분으로 만들어 평신도와 차별을 만들어냈다. 그 차별이 결국 성직자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 되어 버렸고, 그것이 교회를 병들게 하여 영적인 암흑기로 만든 것이다. 주님께서 그것을 깨뜨려 버리신 사건이 바로 종교개혁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도 이것이다. 자꾸만 세상의 차별을 교회로 끌고 들어오려 한다. 교회 안에서도 지연이 있고 학연, 혈연이 들어와 있다. 빈부에 따른 차별이 있고, 사회적인 지위에 따른 차별이 나타난다.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차별,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을 하나의 계급처럼 여기는 차별이 나타난다. 이것이 교회를 병들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차별을 거부하는 공동체다. 그리스도인은 차별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모든 차별을 거부하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차별이 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복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여전히 차별이 있다면 우리는 복음을 가진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하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다.

  거듭남이 무엇인가? reborn 아닌가? 새로 태어난 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단순히 죄용서 받고 구원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면에서 reborn이 되어야 한다.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온전한 거듭남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온전함이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온전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거듭남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온전함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 온전함을 샬롬이라고 하는 것이다. 샬롬은 단순한 안정이나 평안이 아니라 온전함이다. 이 온전함은 모든 차별을 거부한다.

  그래서 온전히 거듭난 사람들은 차별을 거부한다. 그래서 교회는 차별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은 없다. 나와 다른 것은 그냥 다른 것이지 그것이 차별이 되고 거부가 되고 배척이 되고 배타적인 거부가 되면 안 된다. 다른 그대로 너와 나는 하나이다. 한 형제요 한 자매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6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 그러기에 우리가 만일 차별한다면, 어떤 담을 쳐서 차별을 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며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이다.

  교회에서는 지역차별, 남녀차별, 빈부의 차별, 사회적인 지위와 학력에 대한 차별이 없어야 한다.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차별, 직분간의 차별도 마찬가지다. 어떠한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된다. 다른 이들에게 배타적인 끼리끼리가 나타나면 안 된다. 그것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교회는 그 힘을 잃고 탐욕스런 인간들의 집단으로 변질되고 만다.

  초대교회가 생동력 있고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었던 비결은 그 안에 차별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회는 차별이 난무한 사회였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극에 달했고, 신분제도가 있었기에 신분계급에 따른 차별이 분명했었다. 빈부의 차별이 있었고,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남녀의 차별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이 교회 안에만 들어가면 사라지고 녹아졌던 공동체가 바로 초대교회였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모두가 녹아졌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고, 주인과 노예가 한 형제자매가 되고, 빈부고귀를 떠나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가 된 것이다. 서로가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서로를 섬기고 자신들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초대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건강한 교회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한국 교회는 소망이 있다. 나는 우리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은 차별 없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욱 더 하나 되고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능력 있고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것이 우리 교회를 세운 주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에 끊임없이 일어나려고 하는 차별을 거부해야 한다.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가 죄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차별은 끊임없이 교회로 들어오려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 차별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 안에 차별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방법은 다른 것 아니다. 서로를 형제자매로만 생각하고 대하면 된다. 서로 사랑하며 섬기려는 노력만 하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안에 들어와 자리 잡으려 하는 차별을 몰아낼 수 있다.

  나는 청년들이 오면 묻지 않는 것이 몇 있다. 학교, 고향이다. 장년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알게 될 수는 있지만 일부러는 묻지 않는다.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 대하고 섬기고 싶어서 그리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러했으면 좋겠다. 우리 교회 안에서는 지연, 혈연, 학연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고,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도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에 따른 어떤 차별이나 거부나 차별적인 모임이 없기를 바란다.

  그저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일 뿐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하며 섬기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섬기면서 하나 될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복음으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로 세워지기를 소망하고, 한국 교회가 그러한 교회로 회복되어지길 소망한다.

  8절을 다시 한번 보자.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여기서 ‘역사하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행위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능력을 불어넣어 어떤 일을 하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사도 바울과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공통된 고백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들이 힘써 수고했지만 우리들의 행위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다. 분명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나간 것은 사도들의 수고였다. 그러나 그 모든 수고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이 그러한 수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리 할 수 있었다는 고백이다.

  이 고백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놓쳐서는 안 되는 고백이다. 열심히 주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수고하였지만 그 모든 수고는 주님께서 주신 능력과 은혜 때문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고백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 자랑이고 자기 의고 자기 공로이다. 아무리 열심히 수고를 하고 사역을 해도 그것은 자기 일이지 하나님의 일은 아니다. 전혀 하나님의 영광과는 무관하다.

  이단들을 보면 이 고백이 없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만민중앙 이단집단의 이재록을 보자. 이 사람은 모든 것이 다 자기가 한 것이다. 2009년에 코스타가 열렸던 때와 비슷한 기간에 이재록 집단이 예루살렘에서 대형 집회를 했다. 우리 한인들이 전혀 모를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을 했다. 그 기간에 비가 왔었다. 첫 비 치고는 많이 왔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자기가 기도해서 비가 왔다는 것이다.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집회를 하니까 비가 왔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모든 것이 자기가 한 것이다. 그러니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는데, 이재록에게는 하나님이 없다. 예수는 말하는데 만민중앙에는 예수가 없다. 이재록이가 하나님이고 예수일 뿐이다.

  이것이 이단뿐이겠는가? 우리도 만일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고 사역을 하고 섬겼는데 그것이 나의 공로가 아니라 나에게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이단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자기 의, 자기 공로, 자기 자랑일 뿐이다.

  기억하고 늘 그렇게 고백하자.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주님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고 내게 힘 주셔서 수고하고 섬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이 고백이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한다. 교만하여 망하지 않게 하고, 변질되지 않게 한다. 이 고백이 더욱 더 깊어지기를 바란다. 그럴 때 우리는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겸손하고 신실한 주님의 종으로 수고하고 사역할 수 있는 것이다.  

  10절을 읽자.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은 의견일치와 협력의 약속 후에 한 가지 부탁을 한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달라는 것이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를 부탁한 것인데, 일차적으로는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말하며 이차적으로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을 말한다.

  당시 예루살렘의 경제 사정은 다른 그리스나 소아시아에 있는 도시들보다 좋지 않았다. 게다가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 박해가 시작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커졌다. 박해를 통해 사도들과 성도들이 다른 지역으로 흩어짐으로 곳곳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졌지만,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교인들의 경우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고, 교회 역시 성도들이 많이 빠져나가면서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할 만한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러한 까닭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을 위한 구제를 부탁한 것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본래부터 구제를 힘써 행하여 왔다고 말하고 있는데, 실제로 바울은 본문에 기록된 예루살렘 회의가 있기 몇 년 전에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하게 하였고, 이후에도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할 수 있도록 격려를 했었다.

  바울이 이방교회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하도록 장려한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 이후에 경제적인 사정이 매우 어려워진 까닭도 있지만, 이방교회들이 영적으로 빚진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방교회들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영적으로 빚을 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였다. 유대인들의 교회였다. 예수님도 육신적으로는 유대인이셨고 제자들도 유대인들이었다. 복음은 바로 유대인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구약성경도 유대인들에게서 나왔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유대인들에게서 나왔다.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를 통해 복음이 예루살렘을 떠나 곳곳에 전해졌고,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빚진 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이방 교회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헌금을 하도록 권한 이유였던 것이다.

  복음에 빚진 자,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또 다른 이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빚진 자이다.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노고가 있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다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했으며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였는가? 내가 지금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이러한 엄청난 수고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이다. 그러기에 이 빚을 갚아야 한다. 어떻게? 복음을 전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나 역시 복음을 전함으로 이 복음의 빚을 갚아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려운 교회들을 기도와 재정으로 도움으로 빚을 갚아 나가는 것이다. 지금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고하고 있는 선교사들과 사역자들을 기도와 재정적인 도움으로 복음의 빚을 갚아 나가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는 이스라엘에 빚을 진 사람들이다. 모든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이스라엘에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과 복음이 이스라엘에서 나왔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우리에게까지 온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스라엘에 빚진 자로서 이 빚을 갚기 위해 이스라엘을 섬겨야 한다. 이 땅에 다시금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 빚을 갚는 길이며, 메시아닉 유대인 교회들과 사역자들을 기도와 재정으로 돕는 것이 그 빚을 갚는 길이다. 더 많은 기도하고 더 많이 재정적으로 이들을 돕고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구약 성경 곳곳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대표되는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지 말고 그들을 물질로 돕고 선대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책망하신 죄악 중에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관심과 학대와 착취가 포함되어 있다.

  구제를 히브리어로 쯔다카(צדקה)라고 한다고 했는데, 원래 이 말의 의미는 공의, 정의이다. 왜 구제가 정의인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고, 구제를 통해 공평하게 하는 것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 구제를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고치는 일, 히브리어로 티쿤 하올람(תיקון העולם)에 참여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가장 구제를 많이 민족이 바로 유대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도우셨고 그들의 친구가 되셨다. 예수님과 제자 일행의 전도 사역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헌금을 통해 이루어졌다. 예수님에게서 은혜를 받은 자들이 자발적으로 헌금을 한 재정으로 전도 사역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구제 사역도 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머리 둘 곳도 없는 청빈의 생활을 하셨음에도 가난한 자들을 돕는 구제에 늘 관심을 가지셨던 것이다.

  지난주엔가 다락방 교재에 나온 질문에 대해 순장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병이어 기적 후에 먹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았더니 열두 바구니였다는데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주님의 긍휼이다.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자신의 전도 사역을 위한 재정에서 구제를 위해 사용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셨는데, 어찌 음식이 풍족하다하여 버릴 수 있겠는가?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남은 것을 모은 열두 광주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과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라 초대교회 역시 처음부터 구제에 힘을 썼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이다. 모든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재산을 교회에 내놓아 그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다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모두가 구제에 힘썼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가난한 성도들도 있었겠지만 그래서 구제를 받는 입장이었지만 없는 가운데서도 조금이라도 내놓아 더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을 것이다. 부한 자들은 힘껏 헌금하고 가난한 자들은 없는 중에도 헌금하여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던 것이 초대교회였고 그래서 모두가 부자였던 교회가 바로 초대교회였다.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우리가 그 전통을 잇고 있는 욥바교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교회의 여제자였던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에 힘썼던 사람이었다.

  교회가 이렇게 구제에 힘썼던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자들의 구제에 힘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모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진 자들이다. 누구에게서? 하나님에게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진 자들이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죄 용서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이 엄청난 빚을 진 자들이 우리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인데 하나님은 이 빚을 이웃을 사랑함으로 갚으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지극히 작은 자, 곧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돕고 섬긴 것들을 곧 주님께 한 것으로 받으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진 사랑의 빚을 갚으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다른 이름은 사랑에 빚진 자이다. 복음에 빚진 자이며 사랑에 빚진 자이다. 이 빚을 갚는 삶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복음을 전함으로, 교회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움으로 갚을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함으로 갚을 수 있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명령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자. 내 이웃이 가난하고 궁핍하여 어려움에 있다면 내가 가진 물질로 그들을 돕자. 말과 혀로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는 자유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자유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종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 종이고, 이웃을 사랑함에 있어 종이다. 자유하나 주인을 사랑하기에 스스로 종이 되는 종을 자유의 종, 사랑의 종이라고 한다.

  이 개념은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에 대한 규정에서 나온 것이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 25:10)

  희년은 “여호와의 은혜의 해”(이사야 61:2) 또는 “자유의 해”(에스겔 46:17)로 불렸다. 이 해에는 누구에게 소속되었던지 노예로 있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유가 선포되었다. 그러나 주인을 너무나 사랑하여 돌아가지 않고 계속 주인을 섬기기를 원할 때는 주인은 더 이상 그를 노예를 여기지 아니하고 그 역시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신분으로 주인을 섬기게 된다. 이를 자유의 종, 사랑의 종이라고 부른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구원하사 자유케 하셨으나 그리스도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스스로 종이 되어 주님을 섬기겠다는 고백이다. 또한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교회와 성도들의 종이 되어 섬기겠다는 고백이다. 자유의 종, 사랑의 종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우리는 자유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그분의 종이 되어 그분을 섬기고 더불어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교회와 성도들, 이웃, 형제 자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역시 자유의 종이요 사랑의 종인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종이 되기를 바란다. 더불어 서로 사랑함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갚아나가자. 가난한 자들을 구제함으로 사랑의 빚을 갚아나가자. 우리를 차별 없이 부르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차별 없이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는 가운데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축원한다.

* 기도: 1. 주님께서 우리를 차별 없이 부르신 것처럼 우리 역시 차별 없이 사랑하며 섬기는 가운데 하나 되게 하소서. 한국 교회와 우리 교회가 차별 없이 교회, 하나 되어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소서.

2. 언제나 나의 모든 수고와 섬김이 내게 능력주심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겸손하고 신실하게 섬기게 하소서.

3. 복음에 빚진 자, 사랑에 빚는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게 하소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와 전도자들을 돕고 특히 이스라엘의 메시아닉 교회들과 사역자들을 기도와 물질로 돕게 하소서. 사랑에 빚진 자로서 이웃을 사랑하며 성도들을 사랑하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힘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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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없는 부르심, 종된 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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