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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인에게 베푸시는 은혜

  • 이정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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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죄인에게 베푸시는 은혜                

창30:1-8

2016.1.24


  우리 집 작은 아이는 아직도 늘 자기 방 정돈을 잘 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번번이 잔소리를 듣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말썽도 자주 부렸습니다. 때로 우리는 아이에 대해서 걱정하면서 심각하게 의논하곤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한숨이 나오고 화가 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결론은 이렇게 났습니다. “그래도 그 녀석 너무 귀엽지 않느냐, 얼마나 예쁘냐, 이 아이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 아이가 잠들어 있을 때는 늘 천사 같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만일 우리 아이가 아니라면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느 집 아인데 저렇게 못됐지?” 도대체 그 부모들은 아이를 어떻게 교육시키는 거야?”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녀를 사랑합니다. 자녀들이 무엇이나 다 잘하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해야만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가 좀 약하거나 부족해도, 때로는 반항하고 제멋대로 할지라도, 부모는 자녀를 여전히 사랑합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잘못해도 여전히 사랑하며 귀하게 여깁니다. 


  나는 우리 성도들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성도들은 너무나도 귀하고 사랑스럽습니다. 물론 때로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왜 저럴까?’하고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래도 얼마나 믿음 좋은 성도인가, 그래도 속마음은 얼마나 착한데 … ” 언젠가 타 교회 성도가 저보고 우리 교회 여집사들은 모두 공주병에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도 우리 집사님들 다 공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심한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보다, 목사가 성도들을 편파적으로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심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원수 되었을 때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벌하지 않으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여전히 죄를 짓고 잘못된 내 고집을 버리지 않아서 하나님을 안타깝게 해드리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목이 메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2-15)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나도 감사하고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순교하기까지 복음 전하는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감격과 감사가 항상 그의 가슴을 뜨겁게 했으며, 이 때문에 그는 항상 행복했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능히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당신도 하나님의 이 사랑에 대하여 뜨겁게 감사하며 감격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본의 아니게 두 아내를 얻게 되었고, 이 아내들은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며 아이 낳기 경쟁을 벌였습니다. 결국 야곱은 네 명의 아내에게서 열두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야곱의 가정은 보기 드물게 복잡하고 문제가 많은 가정이었습니다. 야곱 자신이나 그의 아내들, 그리고 심지어는 그의 아들들까지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은 너무나도 크고 오묘하여 우리에게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인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문제 많은 가정


  야곱의 가정처럼 문제가 많은 가정도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야곱 자신이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챈 후, 외삼촌 집으로 도망쳐온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의 첫째 부인 레아는 어떻습니까? 그녀는 본래 야곱의 아내가 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친정 아버지의 음모를 통해 쑥스럽고도 부끄럽게 동생의 남편을 가로채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결혼한 후에도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늘 불행하고 비참했습니다. 남편이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부인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나, 언니처럼 아들을 낳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러한 라헬의 시기와 불신앙적인 행동을 보게 됩니다. 야곱의 셋째 부인 빌하는 라헬의 몸종이었고, 넷째 부인 실바는 레아의 몸종이었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네 명의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으며, 그 아내들에게서 열두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들들을 낳을 때마다 그의 아내들 사이에는 시기와 질투와 경쟁심이 볼썽사납게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야곱 집안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맞지 않는 부끄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의 모든 부끄러운 점들과 문제점들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데 사용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상, 가문, 학벌 … 이런 것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사람을 변화시키거나 구원하지 못합니다. 조상과 가문과 학벌과 배경에 상관없이, 우리는 다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 소망도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복잡하고 문제 많은 야곱의 가정에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만한 어떤 자격도 갖추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스런 백성으로 삼아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불행한 환경에서 자라난 것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거나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것들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을 가로막지도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로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당신이 어떤 처지와 형편에 있든지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용기를 내어 하나님만을 더욱 의지하도록 하십시오. 문제 많고 복잡한 야곱의 가정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도 얼마든지 복을 주실 것입니다.


    라헬의 질투


  야곱은 라헬은 사랑했으나 레아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를 불쌍히 여기셔서 아들을 연달아 네 명이나 출산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여전히 자녀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라헬은 언니 레아에 대하여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질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언니는 아들을 넷씩이나 낳았는데, 언니보다 훨씬 예쁘고 건강한 자신은 아들을 한 명도 낳지 못했다는 패배감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예쁘다고 해서,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아들을 낳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아들을 낳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는 문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자기 힘으로 사는 줄로 아는 사람은 끝내 실패하고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여 질투심과 패배감에 사로잡힌 라헬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1절) 라헬의 이 말은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라헬이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이 어떻게 야곱 때문이겠습니까? 사실 라헬이 이 사실을 모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라헬의 마음속에서 불타오르는 질투심과 분노가 이렇게 표출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속이 터져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이러한 라헬에게 야곱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2절) 야곱은 라헬의 말을 듣고 크게 성을 냈습니다.


    은혜가 메마를 때


  우리는 라헬의 말이 상식 밖의 말이라는 것과, 야곱의 말이 지당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대화를 통해 이 부부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남편에게 대드는 라헬이 문제였습니다. 왜 라헬이 그토록 분노와 패배감과 질투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요?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다고 그렇게 심한 말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야곱은 지당한 말을 하고 있지만, 그의 태도 역시 문제가 많았습니다. 상처를 받고 질투와 패배감에 사로잡혀 날뛰는 아내에게 남편이 해줄 수 있는 말이 그것 밖에 없었을까요?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내인데, 이럴 때 좀 받아주고 위로해줄 수는 없었을까요? “좀 더 기다려 봅시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도 반드시 아들을 주실 거요. 당신 그렇게 화를 내니 더 예뻐 보이는구먼!” 야곱이 이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왜 아내를 위로하거는커녕 노를 발하면서 야단만 쳤을까요?


  이 부부에게는 은혜가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였습니다.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있었더라면, 라헬이 남편에게 그렇게 억지를 부리며 대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니 레아처럼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야곱도 은혜가 충만했더라면, 그렇게 화를 내지 않고 아내를 잘 위로해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은혜가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가정은 더욱 복잡하고 시끄럽고 불행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도 은혜가 바닥 날 때가 있습니다. 은혜가 메마르면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괜히 짜증이 나고 신경질을 부리게 되며, 옆에 있는 사람이 미워집니다. 별 일도 아닌데 막 조급해지고 화가 납니다. 마음이 좁아져서 별일도 아닌데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괜히 남들을 탓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남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은혜가 바닥이 난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질 않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괜히 남을 탓하며 화내고 신경질 부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조용히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면서 은혜를 부어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내 풍성한 은혜를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마음이 답답하고 조급합니까? 감사가 사라지고 불평이 많습니까? 쉽게 상처를 받으며 사람들이 싫어졌습니까? 남들 탓하지 말고 조용히 하나님 앞으로 나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힘입고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인 방법


  라헬은 은혜가 메말랐을 때 조용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좋다,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면 내 몸종을 통해서라도 아이를 낳자!” 그래서 자기 몸종을 남편에게 첩으로 들여보내게 되었습니다.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3-5절)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이와 똑같은 일을 했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큰 고통과 실패를 안겨주었습니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라헬도 사라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문제는 야곱까지도 잘못된 인간적인 방법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은혜가 메말라 있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당신에게 은혜가 메마르고 믿음이 식어졌다면, 당장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마십시오. 그런 상태에서는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실패와 고통을 가져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복된 후 믿음으로 결정하도록 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라헬은 자기의 시녀 빌하를 야곱에게 들여보내 결국 두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6-8절) 라헬은 이렇게 얻은 아들들에게 단과 납달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단은 ‘원한을 풀었다’라는 뜻이고, 납달리는 ‘경쟁에서 이겼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라헬이 지은 아들들의 이름을 통하여 그녀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들을 얻었으나 라헬은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들 낳는 일까지도 자기의 원한을 풀고 경쟁하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즘도 자녀들을 통하여 자신의 원한을 풀려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일류대학을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자녀를 일류대학에 보내어 한을 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자신이 이루지 못한 법관이나 의사의 꿈을 자녀를 통해서 이루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달달 볶아댑니다. 자신이 어렸을 적에 헐벗고 굶주렸던 한을 풀기 위해 자녀들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쏟아 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렇게 하면 자녀들이 올바르게 자랄 수 있겠습니까? 자녀들을 통해 자신의 한을 풀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자녀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서 양육해야 합니다.


  야곱의 가정은 이렇게 복잡하고 문제가 많은 가정이었습니다. 야곱과 그의 아내들, 그리고 거기서 태어난 아들들이 다 문제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흠 많은 사람들에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아주셨고, 그들은 믿음의 조상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가 풍성한 분이십니다.


  오늘 당신이 곤고한 중에 있습니까? 마음이 좁아지고 원망과 불평이 쌓여가고 있습니까? 조바심이 생기고 짜증이 납

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싫어지고 쉽게 상처를 받습니까? 그것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을 소외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에게 은혜가 메말랐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어놓고 겸손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간구하십시오.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회복시키시고 얼마든지 은혜와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과 은혜가 당신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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