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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흉년, 아직 다섯해 더 있다 (창 4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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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년, 아직 다섯해 더 있다 (창 45:1-11)


지난주일, 예배를 마친 후 로비에서 인사를 하는데 한 젊은 부부가 예배시간에 얼마나 울었는지 벌겋게 된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면서 편지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사연을 읽어보니 임산부로서 22주차를 지나고 있는데 정밀검사 결과 태아 뇌에 0.5mm의 물혹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치유되기를 위해서 기도를 부탁하는 편지였습니다. 가장 안전하고 만족스럽다는 파라다이스, 자궁에서 그 어린 태아에게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인생의 삶이라는 것이 태아에서부터 녹록치 않구나!”를 절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올 한 해 네 번씩이나 집안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님과 두 분 누님 중 한 분, 그리고 사촌형 옥한흠 목사님과 큰 어머님(옥한흠 목사님의 모친)을 하나님 품에 보내는 장례식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교회에서는 지난 주일까지 모두 58건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그 태아의 부모뿐이겠습니까? 장례를 치른 그 쉰여덟 가정뿐이겠습니까? 여기 참석한 모두가 예외 없이 마치 흉년과 같은 나날들을 힘겹게 헤치며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귓전에 오늘 아침 들리는 음성은 무엇입니까?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창 45:6).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창 45:11). 이 말은 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요셉은 오실 메시야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그 당시 유일한 하나님의 공동체, 즉 교회였습니다. 때문에 저들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 곧 오늘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씀은 분명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두 구절에서 반복하며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2년과 5년입니다. 

왜 하필이면 2년 될 때, 아니 아직 5년이 남았을 때 요셉이 자기의 실체를 드러냈을까요? 왜 하필이면 이때에 저들을 자신이 있는 곳, 아니 양식이 풍족한 그곳으로 초청하는 것일까요? 2년, 그리고 5년이란 숫자가 담고 있는 영적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왜 하필이면 3년이 아니고 2년일까요? 이런 의문을 가지고 마태복음 25장으로 들어가 봅시다. 마태복음 25장에는 그 유명한 세 가지 비유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왜 하필이면 1,2,5달란트일까요? 1,3,5달란트가 아니고 말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악하고, 게을렀습니다. 주인에 대한 불평, 자신에 대한 자학, 변명, 자기 합리화에 급급합니다. 그는 결국 바깥 어두운데 던져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 역시 그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할 가능성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을 본받고 있습니다(마 25:17). 그래서 그는 비록 두 달란트밖에 남기지 못했으나 다섯 달란트를 남긴 사람과 똑같은 칭찬과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마 25:23). 

같은 맥락으로 본문을 봐야 합니다. 흉년을 극복한 것이 3년이 아니고, 2년입니다. 3년은 5년의 과반수이지만, 2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다.”고 강조하며 말합니다(창 45:11). 여기 2년은 저들이 지금까지 헤쳐 온 지난날들입니다. 그럼 5년은 앞으로 남은 흉년의 기간, 헤쳐가야 할 기간을 의미합니다. 흉년이 닥쳤을 때 저들은 요셉 덕택에 2년 흉년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물질의 흉년, 건강의 흉년, 사업의 흉년,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야하는 등 기가 막힌 흉년들을 헤치며 여기 서있습니다. 누구의 은혜입니까?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할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더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서있는 좌표를 깨우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2년과 5년 사이에 서있습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지나온 세월 ‘2년’이 아니라 앞으로 극복해 가야할 ‘5년’입니다. 

지나온 세월이 만약 3년이었다면 내가 교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런 생각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앞으로 남은 흉년이 5년이나 된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내 힘과 능력으로는 도무지 극복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5년은 단순히 기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강도(强度)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그분의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아니고서는 극복해 나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어려운 시련, 예기치 못하는 아픔과 고통, 즉 ‘다섯 해 흉년’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요셉은 2년 흉년을 헤치고 달려온 형들에게 계속하여 하나님을 각인(刻印)시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왔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이 뜻 깊은 날, 우리의 감사가 오늘 받는 말씀을 통해서 중심어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나온 2년과 앞으로 극복해야할 5년, 그 사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헤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와 고침받기를 원했을 때, 주님은 저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때 아홉 명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기 갈 길을 가버렸습니다. 아홉 명은 불과 2년 흉년을 헤쳐 왔을 뿐입니다. 앞으로 ‘5년 흉년’이 남아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주님이 필요 없다는 듯이 제 갈 길을 가버렸습니다. 그때 주님이 얼마나 섭섭해 하셨겠습니까? 

때문에 다윗은 자기 자신을 늘 깨우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 특별히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나의 모든 병을 고치시며, 나의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나의 소원을 만족케 하사 나의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해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 말입니다(시 103:3-5). 이 은혜를 기억하는 자들이 됩시다. 무엇보다 앞으로 5년 흉년을 필히 통과해야 할 자들임을 잊지 말고 감사하는 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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