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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아이가 죽으면 멸망이 온다 (창 5: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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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가 죽으면 멸망이 온다 (창 5:21-31)


가족들이 모일 때 가장 화두로 떠오르는 것은 건강입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할까를 이야기하고, ‘건강하십시오’ 라는 것이 인사가 됩니다. 우리도 오늘 건강에 관련된 이야기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돈을 많이 들여야 건강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보통 돈 있는 사람들이 선교를 많이 하고 많은 돈을 들여 선교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희한하게 기독교 선교는 세상에 가장 돈이 없는 사람들을 향하도록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적은 돈으로 할 수 있도록 하신 것 같습니다. 

옛날에 궁중 관리 하시는 분이 길을 가던 중에 묘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열일곱 살이나 열여덟 살 정도, 혹은 열여섯 살 되어 보이는 젊은 여인이 팔십 세 정도 내지 구십 세는 더 들어 보이는 노인에게 매질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관리가 고약하게 생각하여 도대체 어떤 연유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이 젊은 여인은 자기가 회초리를 치고 있는 그 노인을 가리켜서 “저 아이는 나의 셋째아들입니다. 내가 약을 정성껏 준비해서 나도 먹고 아이들에게도 주었는데, 이 아이만큼은 내가 주는 약은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 에미보다 더 먼저 늙고 머리가 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회초리로 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말을 타고 가다 그 여인과 말을 나누던 중이던 그 관리는 말 위에서 여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럼 실례지만 댁은 연세가 얼마나 되십니까?” “내 나이가 삼백 구십 오세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관리는 깜짝 놀라 말에서 뛰어내려 여인에게 큰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난후 “미안하지만 그 약은 어떤 약이며 또 어떻게 만드는 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이런 이런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서 열매와 잎을 따서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하면 됩니다. 그 약을 드시면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관리는 집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을 풀어 그 나무를 찾아 열매와 잎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가르쳐준 대로 약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러자 이 분은 삼백년이나 살았다고 합니다. 그 나무이름은 ‘구기자나무’입니다. 열매는 구기자라고 부르고 잎은 구기염이라고 부릅니다. 잎이나 열매나 효능이 비슷한데 그것으로 약을 해서 드시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게 되고, 백 살이 되어도 젊은이보다 더 빨리 걷고 힘차게 걷는다고 여러 가지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주 멀고 먼 옛날에 구기자를 많이 드신 집안인지 집안 모두가 장수하는 집안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두 장수하다 보니 7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맨 위의 어른인 7대 할아버지는 칠백세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6대조 할아버지는 육백세 가까이 되고, 그 아래로 5대, 4대, 3대 할아버지의 나이가 사백오십이 세, 삼백육십이 세, 이백구십이 세였고, 다음은 간격이 좀 짧아 이백이십칠 세였습니다. 그리고 막내 할아버지가 육십오 세였습니다. 이렇게 여러 어른들이 생존하는 그 집안에 어느 날 경사가 났습니다. 가문을 이어나갈 아들이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들은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짓기 위해 모두 모여서 의논했습니다. 마침내 이름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도 이상한 이름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므두셀라 라는 이름으로 결정되었는데, 이 이름의 뜻은 이 아이가 죽으면 멸망이 온다는 것입니다. 므두셀라의 이름의 뜻은 본래부터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래는 창을 들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옛날 고대에는 먹을 것이나 여러 가지 부족한 것들이 많았고, 도덕도 제대로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탈취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틈만 나면 다른 마을들을 공격하여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과 재물들을 빼앗아 가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상당히 중요한 사람들이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군대말로 한다면 불침번인데 그 사람들을 가리켜 창을 들고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창을 들고 있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을은 쑥대밭이 되는 것입니다. 즉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이름의 뜻이 바뀌게 되어 이 사람이 죽으면 멸망이 온다는 것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이름을 보면서 정말로 우리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어떤 이유로 방금 태어난 이 귀여운 아이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 라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죽으면 멸망이 온다.’ 아기를 보면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얼마나 귀엽습니까? 아버지는 그렇다고 할지라도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들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참 좋습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그렇게 예쁘다고 하지 않습니까? 옛날이든 지금이든 모두 다 내 자식, 내 새끼만은 잘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돈이 많아도 그렇고 없어도 그렇습니다. 환경이 좋아도 나빠도 그렇습니다. 똑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 안타까운 것은 요즘은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그렇게 잘해주는데 실제로 그 아이들이 그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그렇게 좋아하고 효도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잘하는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 어머니 아버지가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을 때보다 좀 더 잘하고 효도해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데 어떻습니까? 어머니 아버지가 환경이 못해서 또 이런 저런 이유로 챙겨주지 못했을 때보다 더 못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는 말 이외에는 이 아이러니를 해석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자식들에게 했다면 자식들은 부모에게 더 잘해야 하고 더 효도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명절 때 누구든지 자녀 되시는 분이라면 이번 명절을 계기로 부모님들에게 어른들에게 잘 하시기 바랍니다. 설사 혹 지금까지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이 마음,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마음을 받아서 이제부터는 잘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부모님들은 없을 때도 잘해주고, 있을 때는 더 잘해주는데 자녀들은 왜 그럴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집니다. 세월 탓을 해보기도 합니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하나는 없는 사람들,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충분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환경이 좋고 건강하고 모든 것이 괜찮은 집의 자녀들이 꼭 좀 덜하고 모자라는 집의 자녀들보다 더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부러 없는 사람들,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이고, 실제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우리가 어른으로서 자녀들을 키워나갈 때 있다고, 가졌다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잘해주는 것이 정말로 좋은 것일까?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도 한 번 같이 생각해보는 것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요즘 제 1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개인 돈을 사회에 많이 기부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도 대통령부터 시작하여 사회에 기부하는 운동을 벌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를 보면서 정말로 내 자식을 사랑하는 길, 내 손자 손녀를 사랑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어른으로서 또 자녀들로서 이런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부모님들이 힘들고 어렵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 모든 이들이 부모님께 효도하고 잘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알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가장 큰 복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면 우선 내 마음이 좋습니다. 그 다음에 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입니다. 저는 눈으로 많이 확인했습니다. 우선 자기 자식이 복을 받습니다. 어른들에게 효도하면 자기는 물론이고 자식이 복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식이 태어나면 잘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맨 처음 하는 일이 좋은 이름을 지어주려는 것입니다. 좋은 이름을 지어주려고 많은 고민을 하는데 그래서인지 주변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작명하는 곳에서 받은 이름은 같은 이름이 더 많은데, 그곳에서는 한 백 개 정도 두었다 같은 이름을 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집안에서는 어떻게 아이 이름을 므두셀라, 이 아이가 죽으면 멸망이 온다는 이름을 지을 수 있을까요? 만약 이 아이가 죽고 난 후 멸망이 오면 그 다음 자식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되면 그 아이들이 한꺼번에 다 죽게 되는데 왜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을까요? 그런데 아무런 생각 없이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리는 없습니다. 반드시 그 까닭이 있습니다.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버지나 할아버지 혹은 그 위에 있는 어느 분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를 받은 사람에게 이 아이 이름을 므두셀라, 이 아이가 죽으면 멸망이 온다는 것으로 지으라고 말씀하셨을 가능성입니다. 우리 예수님 이름, 세례 요한의 이름도 그렇게 지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가 죽으면 멸망이 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이름을 지으라고 하셨을까요? 이 아이가 죽으면 멸망이 온다는 경고입니다. 

여러분, 경고라는 의미를 잘 생각해보십시오. 정말로 경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경고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습니까? 경고 그대로만 이루어진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강하게 경고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끝날 텐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경고하시겠습니까? ‘너, 맞는다. 죽는다. 망한다.’ 라고 말씀하실 때는 맞지 않도록 하라, 죽지 않도록 하라, 망하지 않도록 하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바람이 있는 것입니다. 결코 경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 간에 멸망하지 않도록 하라는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므두셀라, ‘이 아이가 죽으면 멸망이 온다.’ 과연 이 하나님의 경고는 사실이었나요? 이제 우리는 이것을 확인할 시간입니다. 

므두셀라가 죽고 이 땅에 멸망이 왔습니까? 그 때 므두셀라의 나이는 몇 살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27절에는 므두셀라는 구백 육십 구세를 살고 죽었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구백 육십 구년 뒤에 이 땅에 멸망이 오게 됩니다. 성경에는 므두셀라가 아들을 몇 살에 낳았는지 분명하게 그 연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다고 25절에 말씀하고 있으므로 므두셀라가 아들을 낳고 난 후 칠백팔십이 년을 더 살았다는 것입니다. 므두셀라의 연수 구백육십구에서 라멕을 낳은 나이 백팔십칠을 빼면 칠백팔십이가 남으므로 므두셀라는 아들 라멕을 낳고 난 후 칠백팔십이 년을 더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 라멕이 손자 노아를 낳게 되는데 그 때 므두셀라의 나이에 대해서 28절에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라멕을 낳고 칠백팔십이 년의 연수가 남은 므두셀라였으므로, 라멕의 나이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았다는 것으로 칠백팔십이에서 백팔십이를 빼면 육백이 됩니다. 그러므로 므두셀라는 노아를 낳고 육백년을 더 삽니다. 그 이름 그대로라면 육백년 후에 이 땅에 멸망이 와야 합니다. 

과연 그러했습니까? 창세기 7장 6절에는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므두셀라가 죽는 해입니다. 므두셀라가 죽는 이 때, 이 땅에는 멸망이 와야 하는데, 이 홍수로 세상이 끝났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이어서 ‘홍수가 땅에 사십일 동안 계속 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창7:17-22).. 땅이 멸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 한 집안만 제외하고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그대로 이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경고는 절대 경고로만 끝나지 않는다고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한 번도 아무 의미 없이 경고 그것으로 끝난 일은 없다고 말씀합니다. 반드시 경고의 의미는 다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경고를 무시하면 경고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 성에 가셔서 롯을 찾아 너의 삼촌 아브라함 때문에 너를 구원해주어야겠으니 너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빨리 이 도시를 탈출하라. 조금 있으면 이 도시가 무너진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롯이 딸과 아내 그리고 딸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11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창19:14).. 롯이 이렇게 말했지만 그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위들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롯은 그 아내와 딸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뒤는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 19장은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19:23-25).. 멸망당하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하나님은 한 번 경고하시면 다시는 돌이키는 것 없이 그것으로 끝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셨을 때 그 경고의 의미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은 구태여 경고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습니다. 경고를 듣고 돌이키는 사람은 구원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니느웨 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악질적인 나라였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정말로 무참하게 살해한 나라,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니느웨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그리고 멸망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니느웨에 하나님께서 어느 날 요나 라는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가서 니느웨를 구원시키라고 하셨는데 요나는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물고기 배속이야기가 나옵니다. 도망가다 잡혀서 물고기 배속에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요나가 왜 그렇게 도망갔을까요? 왜 그렇게 순종하지 않았을까요? 요나가 그렇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아도 니느웨 사람만큼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 않겠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어이 데리고 오셔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질 것이라는 경고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할 수 없이 단 하루만 성의없이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고 대강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성경은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욘3:5-6)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감을 잡으면 제대로 나가야합니다. 백성들로부터 회개가 시작하자 나라의 최고 지도자들인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욘3:7-8)라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인생 잘못할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악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싸인을 받으면 그 싸인을 제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괜찮습니다. 본래 악한 사람이 어디 있으며 본래 선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난 후 본래 사람은 괜찮다고 이야기합니다. 모두 다 그렇습니다. 남편에 대해서 별별 이야기를 다 한 후 마지막에 그래도 내 남편은 본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사람은 본래 다 선합니다. 또한 모든 사람은 본래 악한 구석이 다 있습니다. 한 번 실수하고 악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실수가 있을 때 돌이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돌이키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하나님이 무슨 죄를 용서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무엇을 바꾸지 못하겠습니까? 요나가 성의 없이 선포한 그 말을 듣고 그 악한 니느웨 온 백성이 그리고 나라의 최고 지도자들까지 다 돌이키지 않았습니까? 

니느웨에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이 결과에 대해서 요나서 3장은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온3:10)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럴 때 속으로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 사랑하는 남편을, 내 자식을, 저 못된 사람을 꼭 내가 돌이킬지어다.’ 라고 아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 믿는 맛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누가 실수하지 않습니까? 누가 잘못하지 않습니까? 누가 죄를 짓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싸인을 보고 다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대로 므두셀라가 죽었을 때 이 땅은 멸망했습니다. 그의 나이 구백육십구 세일 때 이 땅은 노아 한 집안만 빼고 멸망했습니다. 참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그 므두셀라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오래 산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이 쥐고 계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므두셀라를 이 땅에서 제일 오래 사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을까요? 아마 감이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시기 위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일 년 더 살면 저 사람이 돌아올지 모르고, 또 일 년 더 살면 또 저 사람이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하셔서 계속해서 연장해주다보니 므두셀라를 이 땅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라스크 콜이 있습니다. 공항에 가면 라스트 콜을 들으실 것입니다. 체크인을 했는데도 타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처음에 몇 번 콜을 하다 마지막에는 라스트 콜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때 타지 못하면 비행기는 떠납니다. 하나님도 그러실 때가 있습니다. 꼭 경고 뿐만이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복을 주시려고 준비하시면서 부르실 때도 그렇습니다. 와서 복을 가지고 가고 좋은 선물을 가지고 가라고 부르십니다. 지금도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이 말씀을 못 들으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복을 받으라고 부르시는데 말입니다. 혹시 못 들으시더라도 라스트 콜은 들어야합니다. 그 반대로 이제는 고집 그만 부리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수도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복을, 선물을 가지고 부르실 수도 있고, 혹은 경고로 부르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눈을 들어 잘 보십시오. 귀를 열고 잘 들으십시오. 그리고 응답하십시오. 복 받을 시간입니다. 화를 면할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예’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제일 복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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