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눅 7:36-50)

첨부 1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눅 7:36-50) 
 
 
이번 주간과 다음주간을 걸쳐서 나눔과 감사의 계절 추수감사를 맞아서 감사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함께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아름다운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고 부르는데요. 이 네 복음서에 똑같은 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례를 준비하기 위한 한 여인의 행동으로 언급이 되지만 오늘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준비하는 그런 상징이 아니라 한 여인의 감사하는 마음에 초점이 맞춰져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시몬이라는 바리세인의 초대를 받아 그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바리세인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에는 종교집단이 여러 개가 있었는데 그 중에 유대교를 대표하는 즉, 이스라엘 민족들 전체를 대표하는 종교집단이 있었는데 그 집단이 바리세인입니다. 

바리세인이라는 말은 구별하다 구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바리세인들은 자기들을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를 구별해서 자기들끼리 바리세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별했냐하면, 이 사람들은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고 이런 사람들이며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요즘 말로 이야기하면 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바리세인들은 부자였습니다.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기득권 자리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긍심이 아주 강했기 때문에 바리세인들끼리만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교제를 했지, 바리세인이 아닌 다른 더럽고 추한 사람들은 아주 무시를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 눈에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였습니다. 거리의 여자들, 귀신들린 여자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 죄 많은 사람들, 세리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 하는 이런 예수님의 행태를 보고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논다. 먹고 마시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바리세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죄인들을 구원하러 왔다고 이야기 하자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을 맞아 들일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을 거절하는 사람들이었고 자기들끼리 모여 살아가는 이런 종교적으로 편협한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한 바리세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음식을 나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있지 않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기 집에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게 되면 일반적으로 세 가지를 하게 됩니다. 지체가 높은 사람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손님이 집에 오면, 손님에게 행하는 일반적인 예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스라엘은 지금처럼 포장이 되어있거나 구두를 신고 다니던 때가 아니어서 먼지가 많아 발이 더럽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손님을 초대하게 되면 집 뜰에서 안채로 들어오기 전에 종을 통해서 초청한 손님의 발을 깨끗하게 씻어주게 합니다. 깨끗이 씻고 난 다음에 수건으로 발을 닦고 이 손님을 집 안채로 모시고 옵니다. 그러면 주인이 나가서 그 사람을 껴안고 양 볼에 키스를 하면서 잘 오셨습니다. 환영합니다. 이렇게 기쁘게 환영합니다. 세 번째는 이제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되면 머리에 향수를 뿌리거나 아니면 좋은 기름을 발라 주어서 이 사람이 깨끗하게 향기를 맡으며 대접받고 공경받고 환영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 이 세 가지가 일반적으로 손님에게 행하는 에티켓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밥을 먹는 습관은 우리처럼 땅바닥에 앉거나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누워서 먹습니다. 왼 팔꿈치를 땅 바닥에 대고 발은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누워 오른 손으로 밥을 먹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유대사람들의 밥 먹는 습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집에 초대받아 가셨는데 불행하게도 이 시몬이라는 바리세인이 손님에게 행하는 에티켓 세 가지 중 하나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면 이 바리세인은 예수님을 초대했을까요?

우리는 이 사람이 예수님에게 행한 세 가지 결례를 보고 또 많은 학자들이 이 부분을 보면서 내 놓은 결론은 한 가지 입니다. 그것은 이 사람이 예수님을 업신여겼다는 것이지요. 바리세인은 굉장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굉장히 높은 신분의 사람인데 예수라고 하는 한 젊은이가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무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데 한 번 들어나 보자, 얼마나 잘하나 한 번 들어나 보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대접하고 손님으로 그를 초청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말이나 들어보자 업신여기는 마음에서 예수님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공경의 표시 에티켓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식사 중 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 마을에 있었던 한 여인, 오늘 성경 본문에 보면 거리의 여인, 죄인, 그러면 누굽니까? 창녀 아닙니까? 몸을 파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은 이 전에, 오늘 이 집에 오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서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고 용서를 받은 경험이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다른 마태 마가 요한에는 그 여인의 이름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관계없습니다. 

이 여인이 초대 받지 않았지만 환영 받지 않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하면 예수님에게 가서 자기를 구원해 주신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보답을 할까?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에게 감사를 표시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던 중에 예수님이 바리세인 시몬의 집에 초대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불쑥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스듬하게 누워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발치 끝에 이 여인이 서서 웁니다. 여자가 남자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요! 이 여인이 우는데 이 여인의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와 예수님의 발을 적십니다. 예수님의 발은 지금 어떤가요? 시몬이 예수님의 발을 하인들을 통해 닦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발은 더러웠을 것 아닙니까? 그 더러운 발이 이 여인의 눈물로 적셔지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제 무릎을 꿇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습니다. 

여자분!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긴 머리카락으로 다른 사람의 발을 닦아 주실 수 있으세요? 안합니다. 이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그것도 모자라 값비싼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닦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고 예수님의 발을 닦아 줍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시몬은 너무너무 불쾌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초대하지도 않은 더러운 거리의 여인이, 몸 파는 여인이 초대도 안했는데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니까 몹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니 저 여자가 왜 왔어. 왠 더러운 거리의 여자가 왔어.” 왜냐하면 바리세인 시몬은 너무너무 깨끗했고 저렇게 더러운 거리의 여자를 상종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더러운 여자가 내 집에 왔는가, 그것이 불쾌했고, 두 번째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불쾌했습니다. 아니 저 예수라는 사람은 선지자라고 하면서 선지자 맞아? 자기가 메시야라고 했는데 자기의 발을 닦아 주는 저 여인이 어떤 여자인지 알 텐데, 어떻게 저런 더러운 여자에게 발을 맡기는가! 예수님에 대해 비난하고 그 여인에 대해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마음을 아셨습니다. 시몬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할 말이 있다. 그랬더니 시몬이 말합니다. 선생님, 말씀하세요. 그 때 예수님이 비유를 들었습니다.

어떤 부자가 두 사람에게 돈을 빌렸다. 한 사람에게는 오천만원을 빌려주고 한 사람에게는 오백만원을 빌려 주었는데 어느 날 까지 갚으라고 했는데 이 두 사람이 날짜가 지나도 돈을 갚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 두 사람이 돈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 주인이 두 사람을 불러 이야기하기를 당신들이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내가 알았습니다. 이제 당신들 돈 갚을 필요 없습니다. 제가 탕감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 하고 난 다음에 시몬에게 물었습니다. 시몬아,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탕감해 준 사람을 사랑하겠느냐? 라고 물었더니 시몬이 이야기 합니다. 더 많이 탕감을 받은 사람이 더 사랑하겠지요? 예수님께서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런데 봐라. 내가 네 집에 들어 올 때 네 하인 중에 어느 누구도 내 발을 닦아주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너도 나를 맞아 뺨에 키스하고 포옹하며 맞아 주지 않았고 너희들 중에 아무도 밥 먹는 동안에 내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 여인을 봐라. 이 여인은 네가 행하지 않았던 세 가지, 이 여인은 자기의 눈물로 내 발을 닦고 그리고 내 더러운 발에 입을 맞추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내 발을 닦고 그리고 값비싼 향유로 내 발을 닦아 주었다. 이렇게 이야기 하시면서 너는 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했다. 너는 나는 손님으로 초대했지만 주인인 네가 해야 될 어떤 의무도 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더럽고 추하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내게 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더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이 여인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딸아 여인아,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집으로 돌아가라”   

잘 아시는 이야기지요?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진정한 의미의 감사는 누가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아주 귀한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 사람은 이 시몬은 세 가지 면에서 결례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자기가 초대한 손님에게 발을 씻어주고 키스를 하고 향유를 뿌려주는 일반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을 무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업신여겼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않지만 예수님이 어떻게 하는 가 한 번 보자, 뭐 다른 어떤 사람들과 별 다를게 있겠나?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시몬이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는 이 예수에게서 용서 받아야 될 만한 그 어떤 죄도 범한 적이 없습니다. 바리세인인 시몬은 세상의 어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은 적도 없고 도움을 받은 적도 없고 용서를 받아야 될 필요도 없고 은혜와 구원과 위로를 받아야 될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은 완벽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엎드려 공경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용서를 요청할 필요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초대해 이야기는 해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선지자로 여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하여 아무런 예의를 표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 가운데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공경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기본적인 에티켓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아들이고 예수님을 품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입 맞추고 우리의 가장 값진 것을 우리의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지극 정성의 자세로 주님을 대할 때 주님은 우리를 지극 정성으로 대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기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지 않고 소홀하게 여기기 때문에 주님께서 귀한 존재로 여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시몬, 바리세인은 예수님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어땠습니까? 

  
두 번째, 이 여인은 예수님이 식사 하시는 동안에 지극 정성으로 대합니다. 

여자가 눈물을 흘리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입 맞추고 가장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여인은 예수님의 더러운 발이지만 예수님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분이시고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가를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인의 예수님의 더러운 발이라도 깨끗하게 닦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다시 말해서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지극 정성한 행동을 예수님께 보여드린 것이었습니다. 시몬은 아무런 예의도 행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가장 완벽한 지극 정성으로 최고의 마음을 담아 예수님을 대접 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시몬은 이 여인의 행동을 보면서 두 가지 면에서 정죄를 합니다. (39절)

그러면 시몬의 행동과 이 여인의 행동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면에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까요? 시몬은 이 여인을 정죄합니다. 거리의 여자, 몸 파는 여자, 더러운 여자라고 정죄합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최고인 양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들을 손가락질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율법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지극히 교만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 시몬이 그런 사람의 대표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나도 더러운 죄인이고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똑같은 은혜와 자비와 용서를 받아야 될 필요가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 시몬은 예수님도 비난합니다. 선지자라고 한다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를 알 텐데, 즉 만약에 선지자라고 한다면 이 여인이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멀리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이 시몬은 의로운 사람은 죄인을 멀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까? 시몬의 눈에는 이 여인이 죄인으로 보였지만 시몬의 눈에는 이 여인이 거리의 여인 더러운 여인으로 보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이 여인이 거리의 여인 몸 파는 여인 더러운 여인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몬의 눈과 예수님의 눈의 차이는 뭐였냐 하면, 시몬의 눈에는 사람들이 죄인으로 보였으나 예수님의 눈에는 죄인이 아니라 구원 받아야 될 불쌍한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시몬이 만약에 그 여인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구원 받아야 될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될 존재라는 인식을 했다고 한다면 이렇게 이 여인을 비난하지 않고 예수님을 비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나는 의롭고 당신은 더럽고 나는 깨끗하고 용서 받아야 될 필요가 없지만, 당신은 용서 받아야 될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이런 교만한 사람! 하나님은 내치십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이유는 이런 교만한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 꿇어 엎드려 가슴을 치며 통회하며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는 이 시몬이 가지고 있던 잘 못된 생각, 자기 자신은 의롭고 용서 받아야 될 필요가 없고 자기 자신은 다 잘하고 있고 그리고 다른 사람은 다 잘못하고 있고 더럽고 추하다고 여기는 이 시몬의 마음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려고 오늘 이 사건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졌을까요? 이 여인의 행동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냐 하면, 나 같은 사람, 나처럼 더럽고 추한 사람, 정말로 나는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아십니까? 고마워하는 마음은 당신이 없었으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오늘날의 내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라고 상대방에 대하여 귀하게 여길 때, 상대방이 베푼 귀한 은혜와 호의에 대하여 용서에 대하여 귀하게 여길 때 우리는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없으니까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옆에 있는 아내가 어떻습니까? 남편 여러분이 잘나서 아내가 아직도 살고 있나요? 반대로 여러분의 남편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남편에 대하여 아내에 대하여 부모님에 대하여 그 분들의 헌신과 노력과 눈물과 땀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저는 요즘처럼 대한민국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 국가와 민족에 대한 무궁한 자긍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련의 요즘의 행사를 보면서 정말로 우리나라의 격이 이렇게 높아졌나?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 우뚝 서는 굉장한 나라, 세계에 있는 많은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나라가 될 수 있던 것은 국가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나마 이렇게 잘 살게 된 것도 국가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여기 이렇게 신앙생활하고 경제 대국이 될 수 있는 것은 국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국가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사랑하는 내 아내 때문에 내 가정이 평안하고 사랑하는 내 남편 때문에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고 사랑하는 부모님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자녀들이 잘 되고, 다시 말해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빚지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기처럼 더럽고 추한 사람의 죄를 보지 아니하시고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그 은혜가 너무 너무 고마워 이 여인은 가장 값진 것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용서를 너무너무 많이 받았다. 라고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는 주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당신 때문에 오늘날 내가 있고 당신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 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감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이었던 부시대통령과 현 대통령인 오바마도 여러 차례 언급했고 힐러리 클링턴 국무 장관도 몇 차례 언급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이 전 세계 여러 나라를 도왔다. 민주화 운동을 위하여 또는 공산주의로 부터 얼마나 많은 나라를 도왔나! 그 나라를 재정적으로 돕고 인적으로도 돕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리고 한국 전쟁을 예를 들었습니다. 

전 세계 민주화 운동과 해방과 전쟁으로부터 미국이 도와주었는데 어느 나라도 한국만 빼 놓고 미국에 대하여 고마워하는 나라가 없다. 그런데 유독 한국 백성만 미국에 대하여 매년 감사를 표시한다. 그렇지요? 6.25 전쟁 기념만 되면 미국 각 곳에 한국전에 참전했다 죽었던 사만 오천 명을 기리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6.25 전쟁 기념행사를 갖고 그 행사를 후원하는 것은 다 대한민국입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16개 나라 모든 병사들을 한국정부가 초대하지요. 여행시켜 줍니다. 좋은 곳에서 재워주고 선물주고 자녀들에게 장학금도 줍니다. 한국 민족만 그렇게 한다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여러 차례 그 분들이 했습니다. 

고마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갖게 되면 사람과의 관계가 좋아집니다. 고마워하는 마음을 표시하면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오늘날 제가 있는 것 제가 노력해서가 아니라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라고 주님께 고백하는 순간, 주님은 우리들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무슨 선물일까요? 오늘 이 여인이 받고 돌아간 것, 마음의 평안입니다.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마음의 평안을 갖게 됩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아내와 남편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늘 아내에 불평불만 합니다. 남편에 대하여 불평불만 합니다. 고마워하는 마음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불안함입니다. 화겠지요! 그러나 반대로 남편에 대하여 늘 고마워하고 아내에 대하여 늘 고마워하고 부모님에 대하여 늘 고마워하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모두가 주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는 빚진 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감사의 계절을 맞았습니다. 다음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에게 드렸던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이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이 이유가 무슨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 일 수도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헌금이 아니고 돈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세고 마음의 태도입니다. 

지금의 내가 여기 있게 된 것, 지금의 국가와 민족이 있게 된 것, 지금의 우리 교회가 있게 된 것, 지금의 여러분의 직장과 일터와 자녀와 가정이 있게 된 것, 누가 여러분에게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용서 받을 만한,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고맙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평화로 채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마음이 있어서 이 한 달 동안 늘 감사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 고마워하는 마음을 여러분의 아내와 남편과 부모님과 자녀에게 교회에게 그리고 주님께 드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