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추수감사절]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창 32:9-12)

첨부 1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창 32:9-12)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회사와 어떤 거래 계약을 맺기 위해서나 혹은 국가 기관의 무슨 공사를 수주받기 위해서 상대방 회사의 관계자나 해당 부처의 공무원을 만나 부탁을 하는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부탁한 쪽으로서는 제일 애매모호하고 곤란한 대답이 바로 "좀 기다려 봅시다."나 "곧 될 겁니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차라리 그냥 안 된다고 잘라 말하면 깨끗이 포기라도 할 수 있겠는데, 그처럼 '될 듯 안 될 듯한' 약속을 해 주면 기다리는 쪽에서는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믿고 기다렸다가 잘되면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으니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좀'과 '곧'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될 것인지는 아무도 보장해 주지 못하는 것이니 잘못하다가는 다른 기회들마저 놓치는 가운데 손해만 크게 보고 끝나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인간사회에서는 그런 불확실한 약속 하나 믿고 기다리다가 끝내 '쫄딱 망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그 인생 전체가 '약속' 하나만 가지고 시작되었으며 끝내 대성을 거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믿음의 선조'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축복의 조상'이 되었던 야곱이었습니다. 
20년 전에 형 에서의 낯을 피해 고향 땅을 떠나 밧단아람의 외삼촌 집으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던 야곱은 이제 본문이 기록된 시점에서는 일견 금의환향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본토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는 얍복강에 접근할 즈음에 와서는 그 귀향이 오히려 완전히 망하는 길로 갈 수도 있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가 사람의 힘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야곱은 자기 인생 흥망의 기로에 선 그 자리에서 모든 결정적 권한을 쥐고 계시는 저 하늘의 주권자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 이것은 창세기에서 구체적으로 기록된 기도문 중에서는 가장 긴 것이기도 합니다.
그 기도는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야곱이 평생을 통하여 그 얼마나 절실히 붙잡고 살았으며 또한 그것이 야곱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하여 어떻게 성취되고야 말았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은 이 야곱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성도의 인생에 어김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상고함으로써 우리 모두의 큰 감사 제목으로 삼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성도는 과거에 '공수(空手)'로 시작했을지라도 현재에는 '부요(富饒)'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본문 32장 9절과 10절에 "9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야곱은 제일 먼저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 후에 바로 그 "주께서" 이제는 "내게 명하시기를"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자기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것을 '성취'시켜 주셨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도 똑같은 언약을 내려주셨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곧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는 말씀이었는데, 바로 창세기 31장 3절에서 야곱이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언뜻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조부 아브라함에게 원래 주셨던 언약 즉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창 12:1상)라고 하신 말씀과는 정반대의 내용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돌아가라고 명하시는 고향이나 당시 하나님께서 자기 조부에게 가라고 말씀하신 "내가 네게 지시할 땅"(창 12:1하)이나 다 같은 '가나안 땅'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야곱은 자신의 '귀향'이 그저 단순한 'homecoming'이 아니라 자기의 조부와 아버지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축복의 언약이 그 자신에게도 똑같이 베풀어지고 있는 과정임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언약이야말로 야곱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최고의 유업이었으며 그가 '축복의 조상'이라고 불리게 된 최대의 자산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야곱은 자기가 그 언약대로 이미 받은 축복을 먼저 상기해 내면서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은총"은 바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steadfast love)을 지칭하는 말이며, "진리"라고 번역된 단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faithfulness)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서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듯이 이 두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속성을 묘사할 때에 가장 자주 쓴 대표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타향살이 20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그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체험했었습니다. 

야곱은 바로 그 사실을 두고 "내가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라고 감사드리고 있었습니다.
"지팡이만 가지고"라는 말은 '아무 것도 없는 빈손으로'라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20년 전에 도망자 신세로 낯선 타향으로 떠날 때에 야곱은 그야말로 공수(空手)였을 뿐 아니라 아무 '빽'도 없는 혈혈단신이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조차 전무했었습니다.
또한 외삼촌 집에서 자신의 청춘을 다 보내면서 더부살이를 하는 동안 라반으로부터 온갖 속임수와 착취와 협박까지 당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야곱이 누리게 된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에게는 두 아내와 열한 명의 아들들을 비롯한 자식들과 수많은 종들이 있었고 또한 "두 떼"나 이루는 가축까지 소유한 거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개천에서 용이 난' 격이며, '무일푼'으로 시작했다가 '일확천금'을 거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극단적으로 바뀐 자신의 과거의 처지와 현재의 상황을 비교해 볼 때에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그 모든 은혜를 자신은 "조금이라도(the least) 감당할 수 없사오니"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자신 쪽에는 이런 엄청난 축복을 받을 아무 자격도 가치도 이유도 전혀 없음을 야곱 스스로 겸손히 인정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야곱이 누리고 있는 현재의 모든 축복은 전적으로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은혜"라고, 모든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만 돌리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원로목사님께서도 이런 감사를 자주 드리시지 않습니까?
37년 전에 원로목사님의 가족 6명만 달랑 서울로 올라와서 을지로에 있던 창고 건물을 세내어서 시작했던 경향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선교지까지 합쳐서 3만여 명의 경향가족이 되었으며 이 기적적인 강서성전에다 경향회관과 교육관까지 얻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수백 떼, 수천 떼'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주님의 언약이 고스란히 성취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의 개인의 삶을 두고도 역시 과거와 현재를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른이 되면 도대체 어떻게 먹고 살까?'하는 걱정에 전전긍긍하던 미성년자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어엿한 성인, 능력 있는 사회인이 되었습니다.
'나 같은 남자에게 누가 시집을 올까?', '나 같은 여자를 누가 데려가 줄까?'라고 초조했던 미혼 시절이 분명히 있었는데, 이제는 자녀들을 거느리고 한 집안을 꾸려가는 가장이요 주부가 되었으며 더러는 벌써 손자손녀까지 주렁주렁 달리게 되었습니다. 
실로 '지팡이만 가지고' 출발했던 인생이 지금은 '천석꾼, 만석꾼'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조국의 과거를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조국의 현재와 비교해 볼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시절만 해도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양 구경' 한번 해 보지 못하고 그저 자기가 태어난 시골이나 산골 한구석에서 땅을 파고 물을 길어오면서 한평생을 다 보내신 분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고등학생 중에서도 수학여행을 외국으로 다녀오는 학생들이 있지 않습니까?
 
 제 아버지만 해도 아무 곡식이 없어서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을 수밖에 없었던 '보릿고개'라는 기막힌 시절을 청소년 때에 겪으셨는데, 그토록 가난했던 나라가 채 반백년밖에 지나지 않은 오늘날에 와서는 세계의 경제대국들만 모인 'G20 정상회담'의 의장국이 되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우리나라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신생국들 가운데 유일하게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며 다른 개발도상국가에게 역할모델이 될 정도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이 그저 '우연'이거나 '시간이 흐르면 아무 나라에서도 절로 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것이 오로지 우리 순교자 선조들이 조국을 위하여 간절히 올렸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그대로 응답받은 것이라고 믿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잠시만 비교해 보아도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고 우리가 감사드려야 할 제목들은 너무나 크고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미 받은 은혜'는 조금도 생각할 줄 모르고 오늘 같은 감사절에조차 '아직 못 이룬 욕구'에 대한 불만에만 가득 찬 얼굴로 하나님 앞에 나온다면 정말 말이나 될 일이겠습니까?
지난날 실로 '빈손'뿐이었던 자신의 삶에 하나님께서 그 약속하신 대로 오늘까지 채워 주신 '축복'들이 그 얼마나 많고도 풍성한지를 하나하나 세어 보면서 진심으로 뜨거운 감사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하는 성도는 현재에는 '난관(難關)'을 당할지라도 그 미래는 '형통(亨通)'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이어지는 11절과 12절의 말씀에 "11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12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야곱의 '현재'는 그처럼 축복의 금의환향 중이기는 했지만 또한 결정적인 위기에 직면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가나안으로 돌아오기로 작정할 때부터 딱 한 가지 마음에 꺼림칙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20년 전에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형 에서가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 몇 사람을 먼저 에서에게 보내서 자기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인사의 전갈을 보내면서 형의 의중을 떠보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들이 갔다 와서는 "지금 주인의 형이 사백 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고 있습니다."라는 불길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야곱으로서는 "심히 두렵고 답답해질"(7절)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 에서는 20년 전에 자기에게 속임을 당한 일에 대하여 여전히 분기탱천해 있으며,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이끌고 오고 있다면 그 의도하는 바가 십중팔구는 심히 적대적이며 폭력적일 것이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일단 "자기와 함께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어" 놓았는데, 그것은 만약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8절)는, 자기 나름대로의 대비책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야곱은 하나님께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기 "내 형의 손에서"와 "에서의 손에서"라고 같은 말을 반복한 것과 또 연이어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이라고 재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야곱이 그 시점에서 느끼고 있던 공포가 그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줍니다.
실로 그는 문자 그대로 인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고생하면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에서의 칼날에 한순간에 다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습니다.
단지 재산뿐 아니라 자기와 자기 "처자" 즉 가족 전체의 생명까지 위협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지척에 현실로 다가왔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야곱은 확실히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곧 이어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하나님 앞에 다시 내밀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앞서 10절에서 보았듯이 야곱은 자기가 '지금까지 받은 축복'에 대해서도 그것을 누릴 아무 자격도 이유도 없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또한 '지금 닥치게 된 난관'을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할 자격이나 이유 역시 전무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주께서 이렇게 제게 약속하셨지 않습니까?'라고, 하나님의 언약에만 철저히 의지하여 간구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언약은 바로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며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야곱이 20년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던 중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받았던 언약 즉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4-15)고 말씀해 주셨던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 '두렵고 답답한' 와중에서도 야곱은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해 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약속을 해 주신 이상, 그 하나님께서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약속을 하나도 어김없이 다 지켜 주신 이상, '현재로부터 미래에까지도' 역시 그 언약을 반드시 지켜 주실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야곱의 이런 믿음은 아까 9절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I will do you good.)"고 인용했다가 이 12절에 와서는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I will surely do you good.)"라고 인용하고 있는 데서도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언약대로 이루어 주셨으니 앞으로도 '정녕'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그 얼마나 '논리적인 의지'이며 '필연적인 확신'이었겠습니까?
'주님께서 제게 자손의 축복을 약속해 주셨는데 어떻게 제 자식들이 여기서 죽게 하실 수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제게 허락한 모든 것을 다 이룰 때까지 절대로 저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어떻게 여기서 저의 모든 재산을 다 잃게 만드실 수가 있습니까?'라는 이 기도는 정말 하나님께서 들어 주지 않으실 도리가 없는 기도였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기도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형 에서와의 조우는 야곱이 두려워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실로 화기애애한 형제의 재상봉이 되었으며, 야곱의 가나안 귀향은 더 이상 아무 방해나 위협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야곱의 말년에 가서는 그의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까지 되는 등, 그야말로 축복의 가도, 형통의 대로를 달리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다 잘되게 해 주겠다.'라고 아무리 철석같이 약속을 해 주어도 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금만'이 아니라 '정말 오래' 기다린 후에 가서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 '문서로 남겨진 증거가 있느냐?'라고 안면을 싹 바꾸고 오리발을 쫙 내밀기가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그런 애매모호한 약속을 해 주기보다는 아예 지금 당장 깨끗하게 잘라 거절해 주는 편이 백번 더 나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있어서는 그런 '약속의 부도'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달리 맹세하실 대상, 즉 당신보다 더 높은 존재가 없는 까닭에 오직 '스스로를 두고 맹세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용(credit)'을 스스로 깨뜨리실 수가 결코 없으신 지극히 '신실(faithfulness)'하신 분이신 까닭에 그 어떤 경우에도 그 언약을 어기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약속해 주지 않으셨습니까?'라는 말보다 더 유효한 기도는 없습니다.
실로 저와 여러분은 "당신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한 주 하나님 아버지는 참 미쁘다 그 귀한 모든 약속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무슨 일이 있을까"라는 최고의 '보증수표'를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의 어려움이나 위기만 바라보면 미래는 항상 '답답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교육관 헌관'을 완수하기 위하여 '청지기 기도회'를 모일 때에도 지금 당장 태산처럼 보이는 원리금 상환 문제만 생각하면 기도조차 그저 한숨만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핍박하는 남편만 눈에 보이고 속 썩이는 자식만 생각하고 산다면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고역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지금까지는 이처럼 놀라운 축복을 받은 대한민국이지만 지금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급속도로 확장되고 있는 종북좌파 세력만 보고 있으면 실로 조국과 민족의 장래란 하루아침에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떨쳐 버릴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 기독신자들은 더욱 '하나님의 언약'의 불변함과 신실함을 의지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경향교회를 '세계를 받은 교회'로 크게 쓰시겠다는 언약, 불신남편을 두고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고전 7:14)라고 격려해 주신 말씀, 과거에 가난에 찌들었던 조국을 위한 선조들의 기도를 들어 주셨던 주님께서 이제 미래에는 이 대한민국을 '구속사의 마지막 시대에 선교의 대국'으로 높이 들어 사용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성도에게는 그야말로 '능치 못할 일이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오늘날 우리의 주변에 현실적인 고통, 난관, 위기가 있을지라도 '당신의 거룩하심을 두고 스스로 맹세하신 언약'을 결코 저버리실 수가 없으신 하나님만을 철저히 의지함으로써 끝내 모든 것을 합력하여 '형통'케 이루어 주시는 미래의 더 큰 축복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좋은 것'을 약속해 준다고 해서 다 '좋은 약속'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야말로 '하나마나'한 약속, 아니 오히려 '안 하느니보다 못한' 약속도 있습니다.
북한의 공산독재자처럼 전혀 약속에 대한 진실함이 없고 또한 지킬 힘도 없는 사람이 해 주는 약속이 그러합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그 말한 것에 대하여 '신실한 마음'이 있어야 함과 동시에 그것을 시행할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이 동반되어야 진정 '좋은 약속'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을 필적할 상대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신실하신지 다른 사람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실 수 없고 오직 절대로 어길 수 없는 당신의 거룩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스스로 언약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능력으로 말하자면 '무한의 전능'을 소유하고 계셔서 그 어떤 복잡다단한 일이라도 해도 그 모든 것을 절묘하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야 마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이런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가운데 '과거의 빈곤'을 '현재의 부요'와 비교해 보고, 또한 '불안한 현재'의 시점에서도 '미래의 형통'을 미리 확신하게 되는 성도는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영원토록 주를 찬송하리라"고 그 놀랍고도 충만한 은혜를 인하여 이처럼 감격적인 찬양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메시야 언약'은 '과거에 죄인'이었던 저와 여러분을 '현재에는 의인'으로 만들어 주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영생구원의 언약'을 세우신 그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이 받는 '현재 당하는 고난'도 '장차 받을 영광'으로 바꾸어 주실 것 역시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서 그 어떤 상황에서 그 무엇을 생각해 보더라도 우리의 삶은 실로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지는 '풍성한 은혜'로만 가득 차 있음을 확신하면서, 오늘 추수감사절에 더욱 진실한 감사, 뜨거운 감사, 넘치는 감사를 주님께 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