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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왕하 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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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왕하 20:1-11)


우리는 지금 2년 넘게 특별한 절기나 기념주일을 빼고는 격주로 구약성경의 역대기를 통해서 옛 남왕국 유다의 역대 왕들의 행적을 차례로 살펴보며 거기서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신앙적 교훈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두 주일 전에 살펴본 왕이 아하스입니다. 오늘은 아하스의 아들로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된 히스기야를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히스기야에 관한 기록은 역대기 전체에서 다윗과 솔로몬에 관한 기록을 제외하고는 가장 깁니다. 

히스기야는 죽을병에 걸렸다가 기도하여 사흘 만에 나았고 십오 년이나 더 살다 죽은 사실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역대기는 그 사실을 단 한 절(대하32:24)로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갑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을 보이셨다.”는 아주 짤막한 기록입니다. 반면 열왕기하에는 그 일에 관해서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열한 절에 걸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열왕기하의 기록을 따라 히스기야가 죽을 뻔하였다가 나은 사실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부왕 아하스에 이어 스물다섯 살 때 왕이 되어 29년간 다스린 히스기야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틀어 몇 안 되는 선왕 중의 하나입니다. 역대기 기자는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대하29:2). 또 열왕기 기자는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왕하18:5-7)고 썼습니다. 한 마디로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나이 40세가 채 되기 전에 그만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와서 전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했습니다(본문 1절). 그 말을 들은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에 대고 하나님께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했습니다(본문 2-3절).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예고하고 돌아오던 이사야를 다시 히스기야에게 돌려보내셔서 새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라.”(본문 4-6절). 그 말을 들은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표가 있나이까?” 했습니다(본문 7-8절). 그러자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왕에게 임할 징표로서 두 가지 중에 무엇을 보여줄지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본문 9절). 

즉 “해 그림자가 십도 나아가게 되는 것”과 “십도 물러가게 되는 것” 중에서 하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해 그림자가 “십도 뒤로 물러가는 것”이 “십도를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더 어려울 터이니 십도 뒤로 물러가는 것을 보게 해달라고 대답했습니다(본문 10절). 이사야는 하나님께 그렇게 간구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받아들이셔서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습니다(본문 11절). 물론 그 징표대로 히스기아는 병이 나았다고(본문 7절) 오늘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참으로 놀라운 일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죽을병 걸린 사람이 나앗을 뿐 아니라 수명이 십오 년이나 연장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해시계의 그림자가 십도나 뒤로 물러난 것입니다.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났다는 것은 일정한 방향으로 운행하던 해가 반대방향으로 뒷걸음질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천지창조 이래로 그 유례가 없는 사건입니다. 꼭 같지는 않지만 해가 움직이지 않고 머물러 있었던 사건은 여호수아 때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 성을 빼앗아 진멸하자 왕도와 같이 큰 성 기브온의 주민이 이스라엘과 화친했습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이웃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들이 함께 모여 자기들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올라와 기브온에 맞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기브온은 여호수아에게 사람을 보내어 급히 와서 자기들을 구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돕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적으로 우세한 적 연합군과 싸우기 위해서 여호수아는 야음을 틈타 적군에 접근한 후 기습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러한 공격은 오래 끌면 끌수록 수적 열세에 있는 군대에게는 불리하다고 판단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하루에 전투를 끝낼 수 있도록 이스라엘이 완승을 거둘 때까지 해가 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힘껏 싸워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역사가 수10:12-14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해가 아예 뒤로 물러갔다는 것은 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허락하셨던 일보다 더 불가능한 일을 히스기야에게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해를 뒷걸음질하게 하신 일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왜 해를 뒷걸음질하게 하셨느냐 하는 이유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무에서 만유를 창조하시고 지으신 모든 세계에 그 존재와 운행의 원리를 부여하신 하나님께서 그 때 그 때 필요하셔서 원하시면 얼마든지 그의 피조물들을 그의 뜻대로 다루실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사실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닌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고전적인 신앙고백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5장의 3절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반적 섭리에 있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방법들 없이도, 그러한 방법들을 넘어서서도, 그리고 그러한 방법들에 거슬러서도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역사하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놀라운 것은 다른 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해를 뒷걸음질하게 하셨습니까? 히스기야가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가 왜 해를 뒷걸음질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까? 자기를 낫게 해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성전에 올라가게 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있도록 그 징표로 그렇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이없는 일이고 기가 막힐 노릇이며 말도 되지 않는 요구인데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그 생명을 연장시키기로 하신 한 사람을 위해 태양의 운행을 멈추시거나 거꾸로 돌리시기까지 하시는 이 하나님이야말로 놀라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좋게 보셨다 하드라도 태양의 운행까지 역행시키는 엄청난 불편을 감수하시면서까지 하시겠느냐?”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을 그렇게 희생시키시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태양의 운행을 잠시 역행시키시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한 마리 양을 잃은 사람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찾으면 너무나 기뻐서 집에 돌아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베푼다는 것입니다(눅15:4-6). 다른 한 가지 비유말씀은 은전 열 개를 가진 사람이 그 하나를 잃어버리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부지런히 찾다가 찾으면 너무나 좋아서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즐긴다는 것입니다(눅15:8-9). 

냉정히 생각해 보면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내버려두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은전 하나 잃었다고 등불을 켜고 밤을 새워 온 집안을 쓸며 찾는다는 것이나 또 그것을 찾았다고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이는 것은 다 너무나 비경제적인 낭비일 수 있습니다. 말도 되지 않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말도 되지 않는 사랑을 우리를 향하여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 그 존귀하신 몸을 바쳐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말이 될 법이나 한 것입니까?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 태양계의 운행을 정지시키시고 역행시키시기까지 하시는 그 일조차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 말도 되지 않는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현실이 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또 중요한 것 하나를 확인합니다. 그것은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입니다. 히스기야를 데려가시려다가 그가 눈물 흘리며 기도하니까 즉시 뜻을 돌이키시고 살려주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히스기아의 병은 결코 오진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죽는 것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어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전하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돌이키시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를 삼일 만에 낫게 하시며 십오년이나 수명을 연장시켜주셨습니다. “한 번 입 밖에 낸 나의 말이니 나는 결코 바꿀 수 없노라.” 하며 권위를 내세우고 체면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로서는 감히 손댈 수 없는 하나님께 속한 존귀함과 엄위함 마저도 얼마든지 버리실 수 있는 자유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너무나 크고 놀라운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돌아볼 수 있는 믿음의 눈만 있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수없이 많은 놀라운 은혜의 사건들로 가득 차있음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감사할 것뿐입니다.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삶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왔고 하나님께 너무나 가증스럽고 배은망덕한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증거입니다. 오늘 감사주일을 맞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에나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기로 새롭게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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