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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롬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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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롬 1:16-17)


지난 주간에 술을 좋아하는 제 고향 후배에게서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사흘이 멀다하고 술을 마시고 오는 이 친구 때문에 아내가 속이 상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 아침에는 회사에 출근하는 남편에게 오늘은 제발 좀 일찍 집에 들어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 친구는 아내에게 알았다고 오늘은 정말 일찍 들어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출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갑자기 고등학교 동창회가 있어서 집에 늦게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술 마시고 온다는 남편의 말에 부인은 화가 났습니다.  그때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귀엽고 깜찍한 막내 동생에게 시켰습니다.

"진희야, 아빠 술 먹고 온대.  밉지?  그러니까 아빠한테 전화해서 술 먹고 오지 말라고 해!  알았지?"
여섯 살배기 막내 동생인 진희가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세요."
"아빠, 나 진흰데…."
"응, 우리 이쁜 진희, 왜?"
"아빠, 있잖아.  술 먹으면 나쁜 사람이야.  술 먹으면 미워∼."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 진희는 한참 가만히 있다가 "응, 알았어!"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옆에서 전화통화를 엿듣고 있던 엄마와 아들이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진희에게 물었습니다.
"진희야, 아빠가 뭐래?  술 안 먹고 온대?"
 엄마의 물음에 진희는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엄마!  아빠가 초코파이 사온대!"

관심의 차이입니다.  아빠가 술을 드시고 들어오는 일이 어린 꼬마 진희에게는 관심 밖의 일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의 안 좋은 점을 아직은 잘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희의 관심사는 오로지 초코파이일 뿐입니다.  사실 이것은 어린 진희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다 큰 사람들도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것만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에게 느낌이 오는 것에만 집중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의 전에 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아마 여러분도 여러분에게 관심이 있는 것만 들으려고 할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 가운데 부동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지금 광저우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시안게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귀를 곤두세우고 세밀하게 들으려고 할 것입니다.  

반면에 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다른 이야기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다가 스포츠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귀를 쫑긋 세우고 정신없이 들으려고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미치게 만들고, 생명을 걸게 만드는 그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어리석은 인간은 헛된 것에 목을 메고 살아갑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놓쳐 버리고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되는 그것에 생명을 걸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위해서 자신이 세상에서 누렸던 모든 부귀영화를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복음을 자랑할 시간이 자신에게 많지 못함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해서 죽어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의 평생에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오직 영혼 구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나라 5000만 국민 중에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등록된 교인이 약 25% 정도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2005년도 통계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 매월 12만명이 죽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통계치로 따진다면 이들 중에 3만명이 천국에 갔고, 9만명이 지옥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루에 3천명이 지옥에 갔고, 매 시간마다 125명이 지옥에 갔으며, 1분에 2명의 사랑하는 영혼이 지옥에 갔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우리들 주위에는 수많은 영혼들이 지옥에 들어가려고 대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옆집의 아무개도 지옥에 갈 것이고, 위층의 아무개 엄마도 머지않아 지옥에 갈 것입니다.  나랑 그렇게 친하게 지내면서 자주 밥을 먹었던 아무개도 곧 지옥에 갈 것입니다.

복음전도의 긴급성에 쫓겨 젊은 시절 아프리카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어마어마한 복음전도의 열매를 거두고 있는 라인하르트 본케는 지금 우리의 시대를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복음전도 밤 11시 59분, 구원시계 밤 11시 59분"
한 마디로 말해서 지금 우리는 역사의 마지막 때를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 우리의 시대는 구원의 마지막 열차가 떠나기 직전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뭇거리거나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이웃과 형제를 향한 복음전도는 그만큼 촉박하고도 긴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 이 땅에는 복음의 열정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로움으로 인해서 영혼 구원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 품었던 복음의 긴박성이 없습니다.  오늘 신앙 생활하는 교인들을 보면 마치 이 세대는 영원할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도적같이 오십니다.  역사의 마지막, 내 인생의 마지막은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아주 짧은 시간에 찾아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지금도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태양이 발하는 에너지를 1초 동안만 정확하게 가두어서 축적할 수만 있다면 이 지구상에 있는 60억의 인구가 100년을 쓰고도 남음이 있다고 합니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우리 주님의 보혈의 은총은 사탄의 권세를 부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피 한 방울이면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살려내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로마서 1장 1절부터 17절까지를 읽어보면 복음이란 단어가 무려 일곱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복음 즉, '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의 '유'는 '좋다'는 뜻이고, '앙겔리아'는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유앙겔리온은 좋은 소식,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 Gospel은 좋은 이야기, 복된 이야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945년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여 29년 동안 필리핀 루방섬 정글에 은신해서 짐승처럼 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본군 중위 오노다 히루씨입니다.  그는 일본군 장교로 22세 때 필리핀에 파견되어 29년이 지난 1974년 그의 나이 52세 때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났고 일본이 경제적 대국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나이 52세가 되기까지 깊은 동굴에 숨어서 혼자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사람보다 더한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에서 자유하게 하는 복음을 알지 못하여 고통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지옥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예수가 이겼습니다.  우리는 이제 죄로부터 자유합니다."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치열한 전투에서 이겼다는 '승전의 소식' 이것을 '유앙겔리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의 이 사회적인 개념을 기독교에 적용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그를 의지하는 모든 백성을 살려내는 영원한 구원의 소식을 복음,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말은 나는 복음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는 반어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당대의 석학이었습니다.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당당한 권세를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지금 이 선언적인 내용이 로마 시민들을 향해서 외치는 서신이라는 데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로마는 오직 힘만이 통하는 국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강자만이 진리요, 승리하는 것만이 진리였습니다.  더구나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을 몹시도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살인 강도와 함께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였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에게는 힘이 센 것이 자랑이었습니다.  어디 나가서 누군가에게 대접받는 것이 자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외치는 설교의 주제는 로마 시민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겸손과 사랑과 섬김과 회개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로마를 향하여 그들과 함께 복음을 부끄러워하던 사도 바울이 지금 선전 포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유앙겔리온!  승전의 소식은 로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복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이여, 너희들이 말하는 힘과 능력이 무엇인가?  진정한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외침이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로마가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던 그 당시에 복음이 힘이요, 능력이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이 선언은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능력이라는 말은 원어로 '뒤나미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다이나마이트' 폭탄과 같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반석이라도 폭발시켜 산산조각을 내는 엄청난 힘, 초자연적인 능력을 의미합니다.  다이너마이트는 산도 부수고 바위도 타작하듯이 깨뜨려 버립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수많은 위인과 성인과 철인들이 영원한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뚫기 위해서 온 힘을 기울였지만 그들의 수고는 헛수고였습니다.  성인과 현인들의 수고는 호미 한 자루, 괭이질, 삽질 하나라도 채울 수 없는 헛되고 헛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십자가의 능력만이 천국 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분명 이런 확신이 있었습니다.  "대 로마제국이 영원히 나라를 다스리고 세계를 지배할 것 같지만 영원히 이어질 왕국은 따로 있다.  그 왕국은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로마의 황제가 세계를 정복했다고 외치지 말라.  그들도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는 날이 있을 것이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요,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만왕의 왕이 되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이시다.  로마의 가치관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영원히 이 땅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능력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한 생명을 구원하는 능력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토록 자랑스럽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지옥 가지 않아도 된다.  사탄의 올무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만왕의 왕이신 그 분의 자녀가 되었다.  구원받은 백성, 영생을 얻은 천국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도 자랑스럽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구원은 지옥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을 향해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지옥에 가기 싫어서 예수를 믿느냐 면서 비아냥거립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그런 세상적인 비아냥거림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을 굉장히 자존심 상해합니다.  그래서 아주 고상한 이유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정 고상함이 무엇입니까?  사탄의 올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 더 고상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옥의 백성이 영원한 천국의 백성이 되는 이것보다 더 고상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죄악을 물먹듯이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보다 더 복되고, 더 고상한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복음에 대한 확신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내가 믿는 이 복음에 대해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이유가 되게 하십시오.  그래야 이웃을 구원하려고 하는 열정이 우러나오게 됩니다.  그래야 구원받지 못한 이웃들을 바라볼 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복음의 확신이 있을 때에 무한한 감격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구원에는 세 가지 정도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구원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내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내 공로와 내 자격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선행을 쌓아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주변에 보면, 예수를 믿고 산다고 하면서도 어떤 때는 구원받은 것 같고 어떤 때는 이렇게 믿어 가지고 구원이라도 받겠나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좀 열심을 내고 착하게 사는 듯 할 때는 "내가 구원받았구나"하고 안심합니다.

그러나 자주 죄악에 쓰러지고 신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마치 구원을 잃어버린 것처럼 여겨집니다.  의외로 이렇게 갈등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구원은 내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잘나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면 그 구원은 변덕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 딸과 내 아들이 내 자녀로 한 번 태어났으면 그 자녀됨의 효과는 영원합니다.  아이들이 내게 효도하고 착하게 굴 때만 내 자녀이고, 아이들이 실수하고 내 속을 썩일 때면 내 아이들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는 자식의 태도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변경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한 번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 삼아 주셨으면 내가 실수해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때로 당신이 쓰러지고 넘어져 신음하는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자녀로 사랑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에 있든지 나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셨다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속죄함을 얻습니다.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선포가 바로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구원받는 여러 길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몇 가지 진리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생명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우리 인간들이 하늘 나라에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유일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천국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갈 수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현대 인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강한 사상은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합니다.  그래야 이 다양한 시대 속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신부가 목탁 두드리는데 가서 앉아 있고, 승려가 미사에 참석하면 아주 통큰 사람처럼 보입니다.  언론은 저들을 폭넓은 종교인이라고 칭찬을 합니다.  멋있는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들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기독교는 독선이요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이 기독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지극히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천주교를 인정합니다.  불교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불교를 불교로 인정하는 것이지 거기에 우리가 믿는 구원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종교와 우리의 종교가 똑같이 천국에 가는 동일한 길이라고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구원은 오직 하나입니다.  진리도 오직 하나입니다.  구세주도 오직 한 분입니다.

셋째, 구원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다른 종교들은 저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고행과 수행을 합니다.  성철 스님을 보십시오.  그는 성불하고자 한때 8년간 드러눕지 않고 정자세로 앉아서 초인적인 극기수행을 했습니다.  10년간 사람의 근접을 막기 위해 암자 주위에 철망을 쳐놓고 홀로 용맹정진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죽을 때에 남겼던 열반송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된다."  그렇게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극기수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생의 결과는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극기수행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집앞에 철망을 쳐놓지 않아도 됩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얻습니다.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간단하고 기막힌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까?  이것이 기쁜 소식이요 좋은 소식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이 얼마나 간사합니까?  구원받는 것이 너무 쉬우니까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내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든지 간에, 내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다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히 사는 천국에 간다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뭔가를 보탭니다.  선행도 조금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뭔가를 보태고 싶은 게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50%는 믿지만, 50%는 선행이 따라야 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99%는 하나님, 1%는 내 선행이 아닙니다.  100% 전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99%는 믿어야 되고 1%는 내 선행이 보태지는 것이 아닙니다.  100% 믿음에 구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는 것은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영접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 중심의 자리에서 내가 내려앉는 것입니다.  내 욕망이 내려앉는 것입니다.  나를 지배하고 있던 사탄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내 마음 중심의 자리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그 분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당신을 만나 주셨음을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말씀 앞에서 "아멘" 할 때에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영생을 얻었고 천국의 시민권을 얻은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100% 믿음 외에 다른 길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보다 넉넉한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복음의 말씀을 듣는 것도 다음에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듣는 이 시간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만큼 복음은 긴급한 것입니다.

구원의 긴급성을 알려주는 책 '11시 59분'의 저자 라인하르트 본케는 독일 출신 아프리카 선교사입니다.  본케는 단 한 번에 160만명이 참석하는 복음집회를 열기도 하고, 단 6일간의 집회에서 345만명이 그리스도를 향한 결단을 내리는 등 이 시대 가장 강력한 복음전도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11시 59분'  이 책은 1996년 미국 리젠트 신학대학원에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버지니아 비치에 가면 그림 같은 대학이 있습니다.  이 학교를 세운 로버트슨 총장은 선교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신 분입니다.  9개 대학원 가운데 법정대학원은 한국의 한동대학교와 자매 결연을 맺기도 했습니다.  그 중 신학대학원은 잠시 한국에서 저희 교단 신학교, 그리고 셀교회 사역 단체를 통해 문을 열기도 했습니다.

'11시 59분'  이 책에서 본케는 구원 열차를 전복시키려는 사탄의 몸부림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오늘 교회와 성도를 공격하는 최고의 무기는 복음전파보다도 다른 종교적 활동을 더 중시하도록 만드는 우선 순위의 전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전파 보다도 더 중요하거나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 그리고 치유와 이적이 나타난다고 본케는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했으면 절대로 세상에 다시 빼앗기지 말 것을 역설합니다.  물고기를 잡은 제자들은 몇 마리 잡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물이 찢겨지지 않았습니다.  배는 물에 잠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제자들은 영혼을 돌보는 원리를 알았습니다.  한 번 얻은 하나님의 가족을 다시는 마귀에게 빼앗기지 말자!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 전도,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들은 곧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복음을 전하면 그들은 구원을 받아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될 것입니다.  우리와 영원한 천국 가족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주특기는 복음전도입니다.  성도의 장기는 복음전파입니다.  우리의 취미도 복음전도입니다.  교회의 초점은 불신자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자랑해야 할 것은 복음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도 복음전파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잃어버린 영혼을 얻고 교회를 확장하기 위한 열정으로 넘쳐 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영성이 있다면 바로 복음전도의 영성이요 열정이요 야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두 주 후면 귀빈초청 축제 주일로 지킵니다.  어쩌면 우리들 주위에는 두 주가 오기 전에 인생을 마감해야 할 사람들이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시간은 결코 두 주까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마지막 구원의 열차가 지금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인류의 역사는 밤 11시 59분을 지나고 있습니다.
당신 곁에 속히 구원해야 할 사람이 없습니까?
용서해야 할 사람이 없습니까?
사랑해야 할 사람이 없습니까?

 문득 12시 종착점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입니다.  그 시각이 오기 전에 속히 나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복음전파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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