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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i Deo Gloria (사 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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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i Deo Gloria (사 42:8) 
 
 
오늘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로마 가톨릭의 세미-펠라기안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품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 얻고도 남을 만큼의 충분한 선행을 행한 ‘공로’를 인정을 받아 ‘성자’로 불립니다. 그들은 특별히 숭배의 대상이 되지요. 이로써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롬 1:23)으로 바꿉니다. 이에 대해 종교개혁자들은 사람들에게 돌려지는 영광을 하나님께로 회복하기 원했습니다. 구원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오직 믿음을 통해 받는 것을 강조한 것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영광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 이 당신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지요.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고 노래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24장로들도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라고 고백합니다.

창조주라는 사실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만일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면 자연 세계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히 보고 찬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영적인 눈을 멀게 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자연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알기는커녕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조차도 그분을 알지 못했고 영접하지도 않았지요(요 1:10-11).

하나님께서는 역사도 당신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방향으로 주관하십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합 2:14)고 했습니다. 역사는 여호와의 영광이 드러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고 진행되어 갈 것입니다. 성경적인 안목을 가졌다면 역사의 많은 사건들 속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나라의 흥망성쇠와 한 개인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면서,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당신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은 막으시고 당신님께만 영광이 돌려지도록 하시는 손길을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자 그 왕위를 폐하시고 그 영광을 빼앗으셨습니다. 그의 아들 벨사살이 이 사건을 알고도 스스로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을 때, 역시 그의 나라를 빼앗고 그를 죽게 하셨습니다(단 5:18-30). 이러한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역사를 운행하심을 보여줍니다.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고 선언같이 되었지요.

성도를 구속하신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성도를 택하신 이유를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밝힙니다(엡 1:4-6). 하나님은 애굽에서 구속하신 이스라엘을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사 43:7)라 칭하셨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을 하나님의 백성의 모형이지요. 하나님은 구속주로서도 영광과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고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고 노래했습니다. 천사들이 볼 때에, 예수님의 오심으로 사람들이 평화를 얻게 되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복 이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고후 4:6)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곳이 구속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지혜와 은혜는 십자가에서 가장 잘 드러나지요. 하지만 죄인은 십자가에서도 하나님의 영광 대신 자기 영광을 봅니다. 자연인은 개인의 영광이나 가문의 영광, 혹은 조국의 영광을 위해서는 살지라도 창조주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구속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존경받는 열정적인 신자의 대표가 바리새인입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3)입니다.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그들은 예수님을 육안으로 보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는 고백을 하는 요한과 같은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중세 시대는 사회 전체가 종교적이었고 웅장한 기독교 건물들도 많이 건축되었던 시대입니다. 하지만 그 시대는 구속의 현장에서조차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영광을 가르쳤던 영적 암흑기였지요. 인간의 공로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던 그 시대에 종교개혁자들을 중심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속하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외쳤습니다. 

그 후 시대는 변했지만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죄악 된 열망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알미니안이 구원 공로의 일부를 인간에게 돌리는 사상을 다시 보급했습니다. 지극히 일부분이라도 인간이 구원에 기여한다면 구속주의 영광은 손상됩니다. 하지만 그 이론은 인간을 높이려는 오늘날 시대 풍조에 따라 널리 퍼져있습니다. 신앙을 자기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경향, 즉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딤전 6:5)이 많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가르침과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행복에 초점을 두는 가르침은 결코 복음이 아님을 알고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두는 소수가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누구든지 예외가 없이 요구되는 첫 번째 요소가 ‘자기 부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복음을 빙자한 교묘한 이론들은 오히려 ‘자기 강화’를 부추깁니다. 자기 부인 없이 하나님을 따르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행복을 궁극적인 관심으로 삼게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는 세례 요한의 고백에 빗대어보자면, 기껏해야 ‘그도 흥하고 나도 흥하여야 하리라’는 자세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회복되어야 할 시대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먼저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하고자 하는 마음의 태도가 분명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11)는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우리 마음의 깊은 소원이 자신의 행복보다 하나님의 영광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런 마음을 쳐서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기도 또한 필요하겠지요.

다음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마음을 다해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염두에 두시고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10)고 기도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24시간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하심을 보고 배우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는 것’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뭔가 종교적인 일을 해야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평가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제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 4:20)살았다고 평가 받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아들 한명 낳고 무덤 하나 소유한 것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무관심하던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약속을 믿고 살았습니다. 세속적인 방식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고, 이 땅에 소망 두는 대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종교적인 활동이나 웅장한 건물을 세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믿음이 죽을 때까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도 구제를 많이 행했지만, 선한 행실이 아닌 ‘외식’으로 책망을 받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영광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착한 행실” 역시 하나님의 바르게 알고 신뢰하는 삶의 결과로 나온 행실, 곧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자연스럽게 세상 사람과는 구별된 행실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속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역사를 주관하심과 구속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누구보다 분명히 보고 그분을 찬양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여러분이 그러한 존재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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