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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울지말아라(눅7:11-17)

첨부 1


울지말아라

▶성경본문: 눅7:11-17 

여러분, 도모다까 시모지를 아십니까? 물론 저도 만나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는 꽤 유명한 교육자요, 사회사업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이 처음부터 훌륭한 사회사업가는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람은 원래 흉악한 사형수였습니다. 많은 사람을 힙겹게 하며 고통스럽게 하던 세상의 쓰레기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과연 어떻게 사람들을 죽이는 자가 아니요 살리는 자로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자가 아니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자로 남은 평생을 살게 되었을까? 
그가 사형수로 복역 당시 그 때만 해도 일본에서는 북해도 탄광을 한창 개발을 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너무 열악한지라 누구도 탄광에 가서 일하고 돈 벌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에서는 불가불 사형수들을 탄광으로 보내어 일을 하게 했습니다. 탄광에 가서 일하는 동안은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연기를 해 주었던 것이죠  그래서 사형수 수천 명이 탄광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한 사형수들에게도 토요일이면 면회를 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모지에게는 면회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숙소에 누워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디서 면회를 왔다고 합니다. “누가 날 찾아 왔을까? 찾아 올 사람이 없는데?”라고 생각하면서 나가 보았습니다. 
나가 보았더니 허리가 굽고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의지하여 서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사형수아들, 남들이 죽일 놈이라고 욕하는 그 아들을 위해 일본의 제일 남쪽 끝 작은 섬에서 3000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허리가 굽어서 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안 될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찾아 온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 시모지는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가 여기까지 무엇 하러 왔어요?”하고 얼마나 짜증을 내고 야단을 하는지 모릅니다. 
아들이 이렇게 구박을 하자 어머니가 아들에게 “그래 내가 돌아갈께, 그러나 이 보따리 하나는 받아라”하고 보따리 하나를 놓고 갔습니다. 
그 보따리를 들고 숙소로 돌아와서 열어 보니 성경이 들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 동안에 예수쟁이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재수 없다는 듯이 방구석에 성경을 내던져 버렸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몇 일을 지나다 보니 거기서 함께 일하면서 한 방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한 장 한 장 뜯어서 담배를 말아 피웁니다. 요즘은 그렇게 담배를 말아서 피우는 사람이 없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담배를 말아서 피웠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시모지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어머니가 3,000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서 전해 주고 간 성경책인데 이 놈들이 담배를 말아 피워’ 야단을 치고는 재수 없다고 집어 던졌던 성경책을 빼앗아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뭐가 좋길래 성경에 빠져 버렸는가 싶어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석에 붙은 듯이 눈을 떼지 못합니다. 계속 읽어 나가면서 성경에 빨려 들어갑니다. 잠자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성경만 읽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가지고 탄광 갱도 속에 들어가 일을 하던 때였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점심을 빨리 먹고 다른 친구들은 모여서 떠들고 있을 때 시모지는 시끄러워 다른 갱도로 옮겨갔습니다. 다른 곳에 가 조용히 성경을 읽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벼락 치는 소리가 납니다. 바로 자기가 아까 일하고 있던 그 갱도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아까 함께 일하던 37명이 몰살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시모지는 거기에서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시모지는 ‘하나님이 날 살려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거기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하고 모범수가 되었습니다. 감형이 되고 또 감형이 되어서 결국은 살아서 출옥했습니다. 

하지만 살아 나와 보니 어머니는 벌써 세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그 동안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속 태웠던 것을 후회하면서 돈을 열심히 벌어서 양로원을 세웠습니다. 또 자기같이 청소년기를 어둡게 보내지 않도록 일본의 교육을 위해 중학교, 고등학교를 6개나 세웁니다. 그래서 그는 일본 정부가 주는 교육자 대상을 받았습니다. 사회사업가에게 주는 대상도 받았습니다. 그는 77살에 하늘나라에 가는 순간까지 얼마나 아름다운 생애를 남겨 놓고 갔는지 모릅니다. 

쓰레기나 다름없던,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던 사형수 시모지가 어떻게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남은 생애를 살 수 있었을까? 어머니가 전해 준 성경 속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의 예수님을 만나면 이처럼 죽을 사람이 살게 되고 쓰레기 같은 인생이 의미 있는 인생으로 바뀌어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7장11-17절 말씀에서도 예수님을 만나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한 과부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시면 그후에 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후에 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후에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한 지역에 머물러계시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시는 사랑의 예수님이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버나움에서 약 40km쯤 떨어져있는 나인이란 지역으로 들어오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문에 가까이 오셨을 때에 사람들이 그 성에서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자는 바로 남편을 여읜 한 과부의 하나밖에 없는 독자 외아들이었습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지금 두 행렬이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 병든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연약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 성으로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행렬은 생명의 행렬이요, 소망의 행렬이요, 은혜의 행렬이요 기쁨의 행렬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과부를 필두로 눈물 흘리며 뒤따르는 수 많은 조객들의 행렬은 어떤 행렬이었겠습니까? 하나 밖에 없는 생떼 같은 자식을 잃어버려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을 만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그야말로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 죽음과 같은 슬픔 속에서 어찌할 바 몰라 나오고 있는 죽음의 행렬이요, 슬픔의 행렬이요, 고통의 행렬이요, 눈문의 행렬이 아니었겠습니까? 

만약 이 죽음의 행렬, 슬픔의 행렬, 눈물의 행렬에 서 있던 이 한 많은 과부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 과부는 계속해서 죽음과 같은 고통과 슬픔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아들을 따라 그 남은 생애를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만나주셨습니다. 

13절을 볼까요?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아마도 이 과부는 눈물과 콧물이 뒤범이 된 채 사람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그 슬프디 슬픈 장례행렬을 곧 쓰러질 것 같은 힘겨움 속에서 힘없이 한 걸음 한 걸음 아무런 소망도 없이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이 여인도 처녀 때에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여태까지 제가 만나 본 성도님 중에 자기가 처녀 때 안 날씬하고 안 예뻤다고 말하는 성도님은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처녀 때는 다들 한 몸매하고 한 얼굴 하는 동네에서도 내놓으라고 할 만한 미인들이었다고 다들 말씀합니다. 저도 그 말을 믿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도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이 여인도 처녀때는 동네에서 내놓으라고 할만한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을것이고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식을 올려 행복한 가정을 꾸민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결혼 후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던 그녀에게도 아들이 태어났고 아들이 피우는 재롱을 보며 함께 박장대소하며 웃음꽃을 피웠던 순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랑하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남편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죽게 되어 하루아침에 처량한 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청년에게 동생이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이런 일이 있었다고 우리는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 그 당시에 과부로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너무도 힘겹고 어려운 삶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는 여성이 경제적 활동을 할 수도 없었던 데다 사회적 편견도 너무 심해 그야말로 과부는 사람답게 대접받으며 살 수 없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처럼 고통스럽고 힘겨운 삶을 이겨내고 또 이겨냈을 것입니다. 
커가는 아들을 보면서 피눈물을 참고 또 참아냈을 것입니다. 아들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굳세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 듣게 하기 싫어서 이를 악물고 정성을 다해 키웠을 것입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제 어느 정도 다 키워 이제는 아들이 가정의 기둥으로 든든히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이제는 고생이 좀 그치려나? 싶을 그때가 되자 이번에는 또 갑작스레 생떼 같은 아들이, 인생의 모진 비바람 속에서 피땀 흘려 키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이 여인에게 무슨 희망이 남아있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 여인이라면 여러분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요?

그런 그 과부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그 마음과 고통과 눈물과 한숨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병을 고친 후 어떻게 그렇게 절묘한 순간에 예수님이 죽은 자를 메어나가는 죽음의 행렬과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우연히 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가버나움에 있을 때 부터 과부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발걸음을 나인성으로 옮기신 주님이십니다. 그것도 더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는 정확한 시간에 와 주실 만큼 과부의 모든 형편과 아픔과 눈물을 다 알고 계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아니 목사님, 그럼 그렇게 잘 아시는 주님이라면 아들이 죽기 전에 오셔서 고쳐주시면 안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사랑 많으신 주님이시라면 아들이 죽기 전에 와서 고쳐주시면 안되었습니까? 라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예수님이 사람을 살려 낸 기적이 몇 번 나오는지 아십니까? 3번 나옵니다. 바로 이 나인성과부의 아들을 살린 사건과 요한복음11장의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그리고 누가복음 8장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입니다. 

이 세 사건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그 세 사람이 죽기 전에 그들을 고쳐주어서 살리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고쳐주어서 죽게 하지 않으시고 죽은 다음에 살려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결코 누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바로 죽은 사람을 살리는 그일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죽은 자를 살리실 영원한 구세주요,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영원한 구세인줄로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의 영원한 구세주이신 것입니다. 

13절을 볼까요? 그 생명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아무 소망도 없이 아무 꿈도 없이 마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소망 없는 과부를 보고 계십니다. 
이 과부는 유대인들의 풍습대로 장례 행렬의 맨 앞에서 울면서 걸어 나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면서, 또 때로는 발을 동동 구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미친 여자처럼 망연자실하며 힘없이 걸어 나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과부를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 과부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그의 아픔과 눈물과 한숨과 한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랑의 눈으로, 긍휼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과부가 예수님을 먼저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 과부를 바라보셨습니다. 그 과부가 예수님께 먼저 가까이 나아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과부에게 다가가신 것입니다. 
13절부터 15절까지의 주어를 보십시오.. 주께서.. 14절 예수께서.. 15절에 예수께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예수님이 오늘 이 밤 우리들 역시 바라보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의지할 것 하나 없는 소망 없는 우리들, 지칠 대로 지쳐있는 고통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여러 문제에 치여 낙담 할대로 낙담한 우리들을,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가운데 눈물 흘리는 우리들 바로 저와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적은 있을지 몰라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서 그 분의 시선을 떼는 일은 결단코 없으십니다. 
우리가 그 분께 가까이 가지 못하는 일은 있더라도 그 분은 우리의 곁을 절대 떠나지 않으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그 과부를 보시며 불쌍히 여기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표현의 원어적 의미를 살펴보니 창자까지 뒤틀릴 만큼 가슴 아파했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깨질 것처럼 함께 고통스러워하며 가슴 아파했다는 것입니다. 그 과부의 심장이 바로 예수님의 심장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과부의 눈물이 예수님의 눈물이었으며 그 과부의 한숨이 바로 예수님의 한숨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그 아픔과 눈물에 한숨과 고통에 함께 하셨듯이 그를 불쌍히 여기셨듯이 우리 모든 성도들의 아픔과 눈물과 한숨과 고통과 시련에 함께 하기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느끼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모든 고통과 고난 가운데 예수님은 함께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3장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 뜻대로 살기위해 신상에 절하지 않았고 그로 말미암아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지는 환란과 고통의 순간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끼리만 그 험난한 고통을 겪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운데 함께 하셨습니다. 
성경을 볼까요? 다니엘서 3:25절입니다.
극렬히 타는 풀무불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하여 그들을 태워죽이기 위해 불곁에 갔던 사람까지도 태워 죽인 그 죽음의 풀무불속에서 예수님은 그 3명만 그 고통가운데 있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고통 가운데 예수님은 함께 하셨고 결국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머리털 하나도 그슬리지 않고 불 탄 냄새조차 없는 깨끗한 모습으로 그 가운데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당하는 시련의 풀무불이 너무 뜨거워 견딜 수 없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 풀무불속에 주님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흘리는 눈물이 너무 고통스럽고 쓰라리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 눈물은 주님이 함께 흘리고 있는 눈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부를 불쌍히 여겨주셨던 그 주님이 오늘 이 밤 여러분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알고 계시며 바라보고 계시며 불쌍히 여겨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알아주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고통스럽고 쓰라려도 주님이 알아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 예수님은 이어서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울지 마 울긴 왜 울어하며 그냥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지신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슬픈 일을 당한 사람에게 울지마 하며 어깨나 툭 때려주면 더 이상 어떻게 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함께 가슴 아파하며 울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눈물 흘리게 하는 상황, 가슴 아프게 하는 그 상황을 종식시키셔서 눈물이 변하여 웃음으로 한숨이 변하여 감사로 만드시는 참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위로입니다. 
14절에 예수님은 울지 말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십니다. 
차디찬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고 말씀하심으로 청년을 살려내십니다. 
그리고는 그 청년을 어머니에게 돌려주십니다. 회복시켜 주십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은 위로는 할 수 있지만 상황을 돌려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 뿐인 위로가 아니요 상황을 돌려놓으심으로 상황을 변화시키심으로 상황을 회복시키심으로 문제의 근원을 완전히 해결하시는 참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까지도 해결하신 그 분 앞에 무슨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되겠습니까?죽음보다 더 큰 문제가 우리 앞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앞에 있는 문제가 무엇이든 오늘 이 밤 예수님의 손길만 닿으면 새롭게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죽어 싸늘하게 식어있는 시체가 새 생명을 얻었던 것처럼 도저히 소망 없어 보이고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죽은 시체 같은 여러분의 모든 문제와 상황들도 새로운 소망을 안고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이 밤 예수님의 손길이 여러분의 그 싸늘하게 식어져있는 죽음 같은 문제와 상황에 닿기만 하면 여러분은 죽음을 생명으로, 불가능으로 가능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눈물을 웃음으로 바꾸어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밤이 그러한 회복의 밤, 소망의 밤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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