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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의 종이 되어 (롬 6: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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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가 미국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 웃지 못할 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었다. 베토벤 교향곡의 서곡(overture)을 연주하게 되었는데 이 곡은 연주 도중 트럼펫 하나가 관중석 뒤에서 독주(solo)를 하는 부분이 있었다. 연주가 시작되고 이 곡의 하이라이트인 트럼펫 독주 순간이 되었을 때 지휘자가 돌아서서 지휘봉으로 관중석을 가리켰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지휘자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트럼펫 연주를 맡았던 연주자는 이때 엉뚱한 봉변을 당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연주장의 수위가 이 트럼펫 연주자의 팔을 뒤로 비틀어서 꼼작 못하게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미친 녀석 같으니. 네가 감히 스토코프스키씨의 연주를 망치려고? 어림도 없지. 네가 이런 데서 나팔을 불게 내가 내버려둘 것 같아?” 이렇게 해서 그날의 음악회는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수위는 자기 나름대로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사실은 음악 전체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이런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주님의 뜻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왜인가?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고 변화되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 생각과 내 방법대로 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이 좋아하고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서 죄를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3절에 우리의 몸을 불의의 도구로 드리지 말고 의의 도구로 드리라고 했는데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가? 14절에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가?

15절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앞의 14절을 받는 것으로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를 말씀한다. 14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1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하면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해서 옛 사람이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해서 새 사람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했다. 즉 예수님을 믿어서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은 우리는 죄의 법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죄의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종으로 산다는 뜻이다. 5장에서 아담이 죄를 지어서 사망이 우리 위에 왕 노릇하고 죄가 우리를 다스렸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어서 죄를 용서받았기에 이제는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우리 위에 왕 노릇하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탄에 묶이지 않고 사는 참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제는 우리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으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위해서 의를 행하며 사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죄를 지어서 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서 복역하는데 그동안 모범수로 생활을 잘해서 8.15 광복절에 대통령 특사로 형기가 되기 전에 석방이 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감옥에서 풀려나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이제는 마음대로 죄를 지으며 살아도 된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특별사면을 받았으면 이제는 올바르고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내 맘대로 사는 자유가 아니라 마음껏 선을 행하며 살고 얼마든지 의를 행하며 살 수 있는 자유이다. 더 이상 죄에 끌려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 수 있는 자유이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도 되는 자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 안에서의 자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죄를 지으며 살 수 없는 것이다. 새번역 “15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종’이란 말이 나온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누구의 종으로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16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듣고 따라가든지 우리가 순종하고 따라가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 밖에 없다. 죄에게 순종해서 사망에 이르는 길과 의에게 순종해서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이 둘 중에 누구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가?

‘종’은 어떤 존재인가? 종은 아무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종에게는 자기의 생각이나 의지가 있을 수 없고 아무런 결정권도 없다. 모든 것을 주인의 뜻을 따르고 항상 주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죄의 종으로 살든지 의의 종으로 살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죄를 짓지 않으면 의를 행하고 의를 행하지 않으면 죄를 짓게 된다. 죄도 짓지 않고 의도 행하지 않는 중간상태는 없다. 죄의 종으로 죄에 끌려 살든지 의의 종으로 하나님께 이끌려 살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나는 지금 무엇에 끌려 살고 있는가? 죄의 종인가 의의 종인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우리가 어떻게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의의 종으로 살 수 있을까?

첫째, 나는 이미 은혜 아래 있는 사람임을 선언하라. 
15절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해서 옛 사람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해서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우리는 이미 죄를 용서받았으므로 나를 정죄하는 죄의 법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 아래 있는 존재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으라. 그리고 이렇게 선언하라. “나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나는 이미 의의 종이 되었다.” 17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우리는 이미 의의 종, 주님의 종이 이미 되었기 때문에 죄를 지어서 마귀를 기쁘게 할 수 없다. 의를 행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죄의 유혹이 들어올 때에 나는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고백하고 선언하라. 나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고 의의 종이며 하나님의 종이라고 선언하라.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나는 이제 하나님의 종이므로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며 살겠다고 선언하라. 

둘째,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의지적 결단을 하라.
16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9절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이 두 절에 “드려”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다. ‘드린다’는 말은 ‘바친다’ 또는 ‘맡긴다’는 뜻이다. 즉 내가 누구의 종이 될 것인가는 내가 나를 누구에게 드리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누구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누구에게 맡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의 종으로 살려면 내가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의지적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에는 내가 나를 죄에게 맡겨서 죄의 종이 되었었지만 이제는 내가 나를 하나님께 드려서 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결단을 해야 한다.

왜인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이 내 안에는 죄의 요구와 의의 요구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내 안에서 들려오는 육체의 소리, 죄의 소리를 따라가지 말고 내 안에 계시면서 내게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갈 때 의의 종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는 처음에는 나에게 자유가 있다. 그 일을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자유의 상태에서 유혹을 받는다. 그 다음에는 선택의 기회가 오는데 아직도 취하거나 버릴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일단 선택하고 결정하면 그 후에는 그 선택에 따라야 하고 이제 그것이 나를 지배하고 나는 자유가 없다. 

죄가 유혹해 올 때는 아주 매력적이다. 아직 취사선택의 자유가 내게 있다. 그러나 일단 잡아보면 그 죄가 나를 잡아채서 나를 지배하고 나를 마음대로 끌고 다닌다. 그래서 나는 죄에 매여서 비참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죄는 “딱 한 번만, 이번 한 번만”이라고 유혹한다. 죄를 짓고 형무소에 갔다 나온 사람들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고도 또 다시 죄를 짓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번 딱 한 번만”이란 유혹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 한 번 때문에 걸려들어서 또 다시 계속 죄를 짓게 된다. 죄의 종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의지적으로 죄를 짓지만 나중에는 죄의 종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는 내가 죄를 짓고, 그 다음에는 죄가 죄를 짓고, 나중에는 결국 죄가 나를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이 원리를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 그런 단계가 있다. 선한 일이나 의로운 일도 다 마찬가지이다. 이런 단계를 지나서 한 번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면 그 은혜에 점점 깊이 들어가게 되고 결국에는 내게는 자유가 없이 은혜의 종이 된다. 그러므로 은혜의 종이 되어 자유가 없어진 사람이 어찌 다시 죄를 지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종의 원리이다. 순종의 종으로서, 의에 진리에 사랑에 순종하여 의의 종이 되어서, 의가 내 생각을, 사랑이 내 생각을, 진리가 내 생각을 다스리므로 죄가 들어갈 틈이 없이 은혜가 나를 다스리는 것이다.

참 자유란 내가 그 자유를 버릴 수 있는데 있다. 진리 때문에 내 자유를 그 진리에 묶어둘 수 있는 사람이 참 자유가 무엇이지 아는 사람이다. 무턱대고 자유를 내세우는 사람은 방종의 노예요 타락의 노예이다. 요한복음 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이것이 참된 자유이다. 의와 선에 대해서 의지적인 결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죄를 짓는 일이나 불의한 일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일에 매이고,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 스스로 의에 순종하는 의지적 결단을 할 수 있는 참 자유자가 되라. 

셋째,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라.
17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바울의 이 편지를 받는 로마교회 성도들이 이방신을 섬기며 죄를 짓고 살다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그들의 마음 중심에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그 말씀에 순종해서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서 의의 종이 되라는 것이다.

우리가 죄의 종이 되어 죄에 끌려 살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 형식적인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중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순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 죄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의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마음으로부터 중심으로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 힘과 노력과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된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된 것임을 고백하고 감사하라.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 구원의 은혜에 중심으로 감사하고 온 맘을 다해 하나님께 순종하라. 고린도후서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내 안에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구원받은 즐거움이 사라지면 죄를 짓고 죄의 종이 되게 된다. 다윗은 충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을 죽이는 죄를 짓고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았을 때에 이렇게 회개하며 기도한다.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구원의 즐거움이 식어지니까 자원해서 헌신하는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짓고 죄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의의 종이 되어 사는 믿음이 되라.

넷째, 순종의 결과를 생각하라.
전에 예수님을 알기 전에, 예수님을 믿기 전에 죄의 종으로 살았을 때에 그 결과가 어떠했는가? 20절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의에 대해서 자유했다”는 것은 죄의 종으로 살 때는 의를 행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죄의 종으로 산 결과는 사망이었다는 것이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무엇을 하기는 했는데 그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는 것이었다. 이제 예수를 믿어 구원받고 보니 그때의 그런 삶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므로 죄의 종으로 사는 결과가 무엇인지 분명히 안다면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살 수 없다. 죽을 줄 알면서도 죽을 일을 계속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 의의 종으로 사는 결과는 무엇인가? 22절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의를 행하며 살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신다.

여기서 ‘삯’이란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이다. 그런데 노예들에게 주는 것과 용병들 즉 군인들에게 주는 것을 가리킨다. 노예가 하루 종일 쉬지도 못하고 힘들게 일하고 받는 삯, 또 군인이 목숨을 걸고 싸워서 받는 삯이다. 즉 사람이 죄의 종이 되어서 고생하며 힘들게 일해 보았자 돌아오는 것은 사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은사’는 선물이란 뜻으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의의 종으로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한 것의 대가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열심히 목숨을 걸고 순종해서 얻는 것은 죽음뿐이다. 당연한 결과요 자업자득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면, 사실 그럴만한 자격도 없는데, 영생이 은혜로 선물로 주어진다. 예수를 믿은 우리에게 주신 이 영생의 선물을 바라보고 의의 종으로 살아가라.

오래전 미국에 아직 노예제도가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사업차 뉴올리언즈에 갔다가 노예시장에서 흑인여자노예가 갓난아기와 따로 팔려서 눈물로 생이별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는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사업자금을 털어서 이 모녀를 사고는 노예증서를 찢어버리면서 당신은 이제 자유니까 어디든지 가서 자유롭게 살라고 풀어주었다. 그런데 돌아서서 길을 가다 보니까 그 흑인여자가 아기를 가슴에 안고 이 사람을 따라오고 있었다. 그만 가라고 아무리 말해도 계속 따라온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나 같은 사람을 살려 주신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평생 당신을 주인으로 삼고 섬기며 살겠다”고 제발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이것이 은혜를 입은 사람의 모습이다. 이것이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의 삶이다. 

오늘도 죄는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고 한다. 세상의 종이 되게 하려고 우리를 유혹한다. 불의의 종이 되게 하고, 잘못된 감정의 종이 되게 하고, 욕심과 정욕의 종이 되게 하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다. 물질의 종이 되고, 환경의 종이 되고, 사람의 종이 되어 살고 있는 것을 많이 본다.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릭 워렌 목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자신을 위해 전업 외에 부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줄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의 종이 되어서 의를 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의 종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신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기를 원하신다.

이제 나의 마음과 믿음을 진단해보자. 나는 어디에 매여 있는 종인가? 나는 누구의 종인가? 죄의 종인가 의의 종인가? 의와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 아직도 행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의를 행하지 않을 수 없고 선을 행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인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어야만 하는,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사람인가? 

나는 죄를 짓기가 쉬운가? 의를 행하기가 쉬운가? 사랑하기가 쉬운가? 미워하기가 쉬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나도 모르게 의의 종이 되어 나도 모르게 선을 행하고 진리를 따르게 된다. 나도 모르게 주고 싶고 용서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진다. 따지고 싸우러 갔다가 오히려 위로해주고 기도해주고 오게 된다. 

이것이 의의 종이 된 상태이고 예수에게 매인 성도의 삶의 모습이다. 얼핏 보기에는 부자유한 것 같으나 그 속에 참 자유가 있고, 어리석은 것 같으나 그 속에 지혜가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다. 이것이 구원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믿음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으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서 의의 종이 되어서 선을 행하며 죄를 이기며 살아가는 믿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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