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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에로의 초대 (합 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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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에로의 초대 (합 3:16-19)


삼중고의 고통 속에서도 기적과 감동의 삶을 살았던 ‘헬렌 켈러’여사를 아십니까? 그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갖고도 감사하지 못하며 불평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할 수만 있다면, 이런 3일을 주었으면 좋겠다. 하루는 나처럼 볼 수 없고 눈먼 채로 살도록 하고. 또 하루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자로 살고, 마지막 하루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벙어리처럼 살게 한다면 감사의 의미를 알 것이다." 

이 헬렌 켈러가 쓴 "나의 자서전"이란 책 마지막 부분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내가 한 번만 저 무지개를 볼 수가 있다면, 내가 단 한번만 저 떨어지는 낙엽의 아름다움을 볼 수만 있다면, 단 한번만 이 산 속에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저에게 용기와 끊임없는 가르침을 베풀었던 설리반 선생님의 그 아름다운 미소를 내 눈으로 단 한번만 볼 수 있다면, 나에게 이 귀한 설교의 감동을 주었던 필립 부룩스 목사님의 그 얼굴을 단 한번만 볼 수가 있다면, 내 인생, 내 삶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던 감동스러운 이 성경을 내가, 내가 단 한번만 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받는 축복에 익숙하면 우리는 그 축복을 당연한 것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감격을 상실합니다. 감사를 망각합니다. 불평합니다. 원망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우리에게 감사하는 삶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이란 뜻은 "포옹한다. 껴안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시대의 고통을 끌어안고 살았던 사람, 고통 한복판에 서서 그 고통을 붙들고 몸부림하며 기도했던 사람, 그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대안과 문제 해결의 방법을 제시했던 사람. 그리고 거기서 전능한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할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하박국입니다. 

여러분, 사실 하박국은 처음부터 감사하며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하박국의 서두는 원망과 불평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 내가 이처럼 부르짖어도 왜 듣지 않으십니까? 왜 나를 강포로부터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왜 악인을 방치하여 정의가 실종되게 하십니까? 이처럼 처음에는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찼던 하박국이 끝부분에서는 찬양의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처음에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가득 찼던 하박국이 이제는 기쁨과 확신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낮은 곳에서 기는 것 같은 부끄러운 모습을 벗어버리고 사슴처럼 높은 곳으로 뛰어다니는 당당함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바로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감사의 힘은 우리로 아름답게 변화시켜 줍니다. 감사의 힘은 우리로 높은 곳을 뛰어다니게끔 끌어 올려줍니다. 감사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기쁨으로 바뀌게 만들어줍니다. 나는 오늘 추수 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여러분을 감사에로의 초대를 하고 싶습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여기 보면 부정어가 6번( 못하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반복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3대 과실수가 무화과, 포도, 감람(올리브) 입니다. 과수원마다 애써서 지은 농사가 안됩니다. 밭도 마찬가지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다 짓밟혀버립니다. 이젠 어디를 찾아보아도 먹을 게 없습니다. 사람 먹을 것도 모자라니 가축들이 죽어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에 양이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인간 조건으로 보면 완전 절망입니다. 끝장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감사할 수 있을지!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원망하고 불안해하는 게 정상입니다. 감사의 이유가 다 사라져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우가 있죠. 건강하던 사람이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부요하던 사람이 물질을 잃어버렸습니다. 권세와 지위가 있던 사람이 추락해버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박국은 ‘없음’의 소유에서부터 일어섭니다. “이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그리고 그는 감사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이처럼 두려움에서 일어나서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1. 첫째 하박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축복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사람에게 힘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 물질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돈이 손에 들어오면 힘이 생깁니다. 또 꿈꾸던 일이 소원대로 이루어질 때 용기가 생깁니다. 남보다 더 좋은 위치나 권력, 명예를 얻게 되면 인생 살아갈 의미를 발견합니다. 

오늘 우리가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현실에서 이런 것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돈이 없다든지, 목표를 잃었든지, 건강을 잃었든지 말입니다. 남과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요소들을 잃을 때 힘도 잃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요소들을 찾아 나섭니다. 예쁜 자매를 만나면 힘이 나잖습니까? 얼짱, 몸짱인 친구가 옆에 있으면 폼이 나잖아요? 

그러나 하박국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힘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했습니다. 힘의 근원이 되어 주리라 기대했던 나라가 소망 없고, 외양간에 소도 감람나무 소출도 없지만 그래도 힘이 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인생에서 돈과 명예, 지식의 풍성함이 내가 존경받도록 해주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깨우쳐주고 가르쳐 주시기 원했던 것이 바로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테스트하신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물질도 평안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것을 물리적, 환경적으로 보여주시면서 얼마나 귀한 축복인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6장 53-5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말씀하십니다. 

또한 예수님 당신이 생명의 물이라 하십니다. 인간 몸의 70%가 물인데 물 없이는 인간이 살 수 없습니다. 즉 예수님 없이는 인간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주님은 선한목자요 우리는 양이라고 말씀합니다. 목자 없는 양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포도나무가 없으면 가지는 붙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닫고 그 관계에서 오는 축복을 아는 사람은 인생을 살아갈 때에 진정한 자기 가치 뿐 아니라 삶의 이유를 알고 진정한 감사와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계속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애양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100년 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나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여수 지역에 만든 나환자촌입니다. 애양원이 유명해진 것은 지금부터 약 60년 전 위대한 성자 손양원 목사님이 배출되면서부터 입니다. 그분이 그곳에서 사역하다가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하고, 그 두 아들도 순교를 당해 유명해진 곳입니다. 

그 애양원에는 손발과 얼굴이 뒤틀린, 한 마디로 소망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특별한 몇 가지가 있습니다. 주일예배,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금요예배에 모이는 숫자가 똑 같은 한국의 유일한 교회입니다. 한 사람도 결석을 안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배에 다 나오는 교회. 따라서 그들의 가슴은 뜨겁습니다. 

그들은 양계, 양돈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이 되면 거기에서 번 돈으로 헌금을 하는데 수천만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십일조는 말할 나위도 없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감사하면서 헌금을 많이 드리는지 모릅니다. 한 예로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을 세울 때 예산이 10억이 조금 넘었는데, 그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그들의 손에서 나온 헌금으로 충당했습니다. 그리고 여수 지방에 400여 교회가 있는데, 그 중 40개 교회가 이 나환자촌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해서 드린 예물로 개척한 교회라고 합니다. 문둥병자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세상을 비관하고 저주하며 살수밖에 없는 그들이 어떻게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까? 그들의 손에 무슨 감사하다는 예물이 들려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은혜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영적으로 누리고 보니 비록 육신은 망가졌지만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입으로 감사하는 것으로는 도무지 모자라 그 손가락이 없는 손으로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들고 나와 하나님 앞에 예물로 드리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주지 못하는 주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박국은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다.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의 말씀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정신병자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앞뒤가 안 맞잖습니까? 상식적으로 기뻐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데 감사하다니요. 

사람이 환경이나 사물을 볼 때 몇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환경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 마음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물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물을 보았습니다. 환경의 관점으로 보면 정말 엉망인 상황입니다. 자기 마음의 관점으로 봐도 비참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때만 감사가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은 많지만 18절을 보세요.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은 이 짧은 구절에 하나님을 두 가지로 표시합니다. "여호와"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는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하나님.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한번도 택한 자녀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는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은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최악의 것을 최상의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 그로 하여금 두려움에서 절망의 골짜기에서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서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합니다.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적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던 하나님, 그리고 모든 것을 회복시킬 수 있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그는 확신할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때로 내게 부딪힌 어려움, 고난, 이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만 아닙니다. 때때로 고난은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영원한 축복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대가 어려울수록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삶의 정황이 좋아진 다음에 하는 감사가 아니고 고통 한가운데 서서 고통을 바라보면서 다시 고통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는 감사가 진실한 감사입니다. 행복은 좋은 환경이 아니라 감사를 발견하는 것,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윌리암 로우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오늘 본문을 주경하며 그렇게 얘기합니다. "최고의 승자는 자선을 많이 베푼 사람이 아니다. 

최고의 승자는 금식을 오랫동안 한 사람도 아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며 살았던 사람이 최고의 승자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상황이 어디까지 갈 때까지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의 수준일 수 있습니다. 얼마만큼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은혜의 수준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다 얻고도 불평하며 불행해 하는 사람이 있고 세상을 다 잃고도 하나님 한분으로 감사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정말 감사하십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한 겁니다. ‘가시고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했던 ?내일?이다.? 정말 그렇습니다! 오늘의 일상이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별 게 아니고, 남보다 못한 것 같아도, 때로는 짜증이 나도, 신앙의 눈으로 보면 사는 것 자체가 감사의 조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때로는 힘들고 짜증이 나도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바꿔도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제 19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은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여기 사슴 하면 그 뿔과 날렵한 다리가 생각납니다. 사슴은 투명한 눈동자로 위험을 감지합니다. 골짜기에서 위험을 느낀 사슴은 그 즉시 날렵한 다리로 고지를 향해 춤추며 오르기 시작합니다. 잠시 후 골짜기에 서있던 사슴을 어느새 저 높은 고원의 언덕에 서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골짜기를 굽어봅니다. 그 날렵한 사슴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 놓은 곳에 있는 사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그렇게 인도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방금 전까지 우리는 어두움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괴로워하며 고통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절망하고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사슴의 발같이 내 발을 들어올려 그 위험을 피하게 하시고 드디어 저 놓은 언덕, 나의 높은 곳, 가능성의 고지에 서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위기가 닥쳐올 때 사람들은 다 큰일났다, 죽겠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담대해야 합니다. 이 시간 기억하십시오. 모두가 답답한 현실이지만, 그 다음 우리가 내일을 바라 볼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 폭풍우와 비바람 건너편에 있는 내일 새벽에 비쳐질 그 영롱한 아름다운 빛살을 볼 수 있는 안목만 있다면,/ 그리고 이 고통스러운 환경다음에 나를 만드시고 또 나를 붙들고,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그 분의 손길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벌떡 일어 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뻐하며 감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자리에 있을지라도 감사하는 삶을 잃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 한 번 더 하박국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숙한 감사자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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