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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안에서 행하는 그리스도인 (골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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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행하는 그리스도인 (골 2:6-7)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사람들은 다양한 답을 말할 것입니다. 답이 많다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지난달에 ‘행복전도사’로 인기를 누리던 여성이 질병을 비관해서 남편과 동반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강연과 책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사는 비결을 일러주던 사람이었기에 그 여성의 자살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누구나 건강하고 만사가 형통할 때 행복에 대하여 말하기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건강할 때는 행복하지만 병들면 행복이 없어진다면 그런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젊어서는 행복하지만 노쇠해지면 행복하지 않다면 그런 행복도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형통할 때는 행복하지만 시련을 만나면 행복이 없어진다면 그 역시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형편과 처지를 초월해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야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행복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행복은 무슨 인위적인 방법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는 무슨 형편이나 환경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직결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의 영적 소속과 신분이 행복의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40년 광야생활을 마칠 즈음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면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신 33:29)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행복자인 이유는, 그들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황량한 광야에서 지낼지라도 행복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된 것처럼 행복한 것은 달리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84편을 지은 성도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10)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성도는 호화로운 왕궁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지내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다, 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이 성도처럼 우리는 자신이 행복자인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살면서도 행복한 줄 몰랐습니다. 그것은 그 아들의 신분이나 여건이 불우해서가 아니라 그 아들의 마음이 어두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자기가 바라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아버지를 졸라 상속재산을 받아 먼 나라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행복을 만끽했습니다. 그러나 수중에 돈이 다 떨어지고 나자 행복도 끝이 났습니다. 더구나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연명하기 위해 들에서 돼지 치는 자가 되었는데, 돼지가 먹는 쥐염 열매조차 배불리 먹지 못할 만큼 비참한 지경에 떨어졌습니다. 그제야 이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지낼 때가 얼마나 행복했는가를 깨닫습니다. 그는 비로소 제 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드디어 이 아들은 염치 불구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직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기를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열고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둘째 아들의 신분이나 그가 처한 여건은 아버지의 곁을 떠나기 전이나 되돌아온 후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가 느꼈던 행복감은 천양지차가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행복을 몰랐으나 돌아온 후에는 진정한 행복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으로 인해 행복해 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 같은 차이가 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후자는 그 의미를 올바로 알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형식적인 신자 또는 영적 어린아이이며, 후자는 진실한 신자 또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이 된 연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지 못하면 절대로 믿음이 자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곁에 있는 분들에게 말해 봅시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진심으로 이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권면해도 그것은 공연한 잔소리처럼 들릴 뿐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한 사람에게는 그 같은 권면을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으로 열과 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6)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이 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말씀해 줍니다. 그것은 “그 안”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일까요? 6절에서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 예수를 주(主)로 받아들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주(主)는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읽을 때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감히 입에 담을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아도나이’라고 읽었습니다. ‘아도나이’는 ‘주(主)’라는 말입니다. ‘아도나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큐리오스’라고 하는데,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큐리오스’ 곧 주(主)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들였다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주인이심을 믿고 고백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하니 도마가 말하기를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도마가 대답하기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확인하기까지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하였을 때 그는 예수님을 자기의 주시며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사도 도마는 멀리 인도에까지 가서 그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이교도들의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이로 보건대,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영적으로 볼 때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속해 있거나 아니면 사단에게 속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는 의(義)에 속해 있거나 불의(不義)에 속해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7절에 “모든 불의가 죄”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죄의 종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 이하에 보니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했습니다. 

죄의 종이 된 사람은 물마시듯이 죄를 지으면서 삽니다. 죄 짓는 것을 좋아하고 즐깁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그 사람이 자원해서 죄를 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죄의 종으로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런 사람은 언제나 죄의 영향력 곧 죄의 지배 아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는 인생들을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인생들을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이십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공회 앞에 서서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행 4:12)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생들을 죄의 권세에서 풀어주시려고 인성(人性)을 취하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에 이르기를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독생자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십자가에 달려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 같은 은혜를 입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0장 22절에 이르기를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했는데, 이로써 우리 마음에 뿌려진 것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진 것을 믿으시면 “아멘”하십시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이름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집사도 아니고,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그리스도인이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들인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본문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뿌리를 박으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세움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셋째로,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라고 했습니다.
넷째로, 감사를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방금 언급한 네 가지는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들인 사람 곧 그리스도인이 항상, 지속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먼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밭에 비유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 13:)

농부가 씨를 뿌렸더니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그 씨앗은 곧 싹을 틔웠으나 흙이 깊지 않아 뿌리를 내릴 수 없었으므로 해가 돋자 뜨거운 햇볕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식물의 생존은 뿌리에 달려 있습니다. 팔레스틴의 유대 광야에 가면 황량한 돌과 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유독 띄엄띄엄 서 있는 푸른 잎의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나무는 우리말 성경에는 조각목이라고 번역한 싯딤 나무입니다. 

그 척박한 땅에 이 나무가 생존할 수 있는 비결은 그 뿌리에 있습니다. 싯딤 나무는 그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립니다. 지상에 보이는 나무의 키의 몇 배 또는 몇 십 배나 되는 뿌리가 땅속에 뻗어 있어서 물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아무리 건조한 광야에서도 자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 같이 뿌리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뿌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려야 합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가 당면한 위험이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않고 현세적인 축복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은 믿음의 뿌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내리지 못한 까닭에 시험이 다가오면 곧장 믿기를 포기하고 뒤로 물러가고 맙니다. 

그러나 믿음의 뿌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내린 성도는 어떠한 시험이 다가와도 믿음을 저버리는 일이 없이 기어코 시험을 이겨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같은 성도에게 영적 생명력을 쉼없이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믿음의 뿌리를 박아 흔들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세움을 입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건물을 세우는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터전 삼아서 그 위에 믿음의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견고한 신앙인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우리의 인격이 자라고, 우리의 사랑이 자라나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손님 노릇을 하지 말고 봉사의 자리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다른 성도들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짓는데 동참해야 합니다. 건물을 짓는데 수많은 벽돌이 소용되듯이, 성도들은 저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이루는 벽돌과도 같습니다. 벽돌 한 장은 아무 소용이 없지만 수백, 수천 장이 서로 연결되면 큰 집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소속감과 연대감을 갖고 신앙생활을 해야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세움을 입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성도들은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자랍니다. 만약에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절대로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교훈을 받은 대로”라는 구절은 “교훈을 받은 대로 실천함으로”라는 뜻입니다. 그리할 때 믿음에 굳게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로 인해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하였고, 예레미야 23장 29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죄를 지적하여 회개케 하며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원하시거든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설 수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감사를 넘치게 해야 합니다.

감사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표시와도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떠한 형편에서도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생각할 때 모든 불평이 사라지고 감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고전 15:57). 따라서 우리는 시험을 이기면서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사도는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도 주님의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 각자에게 직분을 주신 주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믿음을 지켜온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역 식구들의 믿음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이르기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기도 응답을 원하시거든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가 없는 기도는 원망 섞인 아우성에 불과하므로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항상 감사가 그 입술에 따라 다녀야 합니다. 그러기에 골로새서 3장 17절에 이르기를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였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보면 아주  분명한 어조로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보니,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물통에 물이 철철 넘치듯이 감사를 그렇게 풍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감사가 넘치는 성도는 곧 그 심령이 은혜롭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감사가 없는 사람은 은혜가 고갈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가 없는 것을 예사롭게 여기지 말고 신앙생활에 빨간 경고등이 켜진 것으로 바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디모데후서 3장 2절에 이르기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인데) 그 때 사람들은 감사치 아니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것은 말세에 패역한 자들의 상태와 흡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우리가 감사를 넘치게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베풀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면 “아멘” 하십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안주하지 마시고 주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고,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며, 감사를 넘치게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루나 이틀만 그럴 것이 아니며, 한 달이나 두 달만 그럴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 해나 두 해만 그럴 것도 물론 아닙니다. 

이 네 가지는 강림하시는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같이 힘써야 합니다. 성도님들 모두, 언제나 이 네 가지 권면을 실행하심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서 언제나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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