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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길 (출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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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길 (출 23:4-9)


[너희는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거든, 반드시 그것을 임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너희가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눌려서 쓰러진 것을 보거든,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반드시 임자가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 너희는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거짓 고발을 물리쳐라. 죄 없는 사람과 의로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나는 악인을 의롭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 뇌물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의로운 사람의 말을 왜곡시킨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몸붙여 살았으니, 나그네의 서러움을 잘 알 것이다.] 

한 해의 반성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교우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교회 절기상으로 가장 긴 오순절기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부터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기가 시작됩니다. 교회력으로 하면 오늘이 일 년의 마지막 주일이 됩니다. 주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면서 에벤에셀의 돌비를 세웠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떠오릅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 살면서 그동안 얼마나 무르익으셨습니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화려한 빛깔을 자랑하던 우리 집 앞 벚나무 잎들이 어느 결에 다 떨어져버리고 앙상한 가지만으로 찬 바람을 견디고 있습니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옛 사람은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 말했습니다. 겨울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지고 나면 비로소 나무의 본 모습이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허위의 옷을 다 벗고 존재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돌아보니 걸어온 길 어지럽습니다. 분주함을 핑계로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전심전력하지 못했습니다. 쉴 틈 없이 우리를 몰아치는 일상의 일들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습니다. 주님은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신신당부하셨건만 우리는 이웃들 곁을 무심히 지나칠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길이라 고백하면서도 그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용서와 화해와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작은 차이조차 용납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요즘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복음성가 가사가 자꾸만 입에 맴돕니다.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듯하나/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제가 떠올린 것이 아니라 주님이 떠올려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라도 돌이켜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정이라더군요. 머리로 깨달은 말씀을 가슴으로 공감하고 그것을 손과 발로 번역하는 과정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또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경지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요구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한 것이라면 평화로운 삶은 애초에 언감생심焉敢生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길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가르쳐줍니다. 한달음에 원수 사랑이라는 목표에 이를 수는 없어도, 적어도 그 길로 접어드는 방법은 가르쳐준다는 말입니다.

화해의 단초 
오늘 제가 택한 본문은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성경은 하나의 상황을 제시합니다.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그 짐승이 잘 아는 사람이나 가까운 이들의 소유라면 우리는 얼른 그 짐승을 붙잡아 주인에게 돌려줄 것입니다. 짐에 눌려 쓰러진 짐승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주인을 잘 모른다 해도 우리는 그 딱한 광경을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 짐승의 주인이 원수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해관계가 얽혀 사이가 나빠졌든, 삶의 방식이 너무 달라 비위가 맞지 않는 사이이든, 원수의 불행은 그다지 기분 나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원수의 것이라 해도 길을 잃고 헤매는 짐승을 보거든 반드시 임자에게 돌려주고, 짐에 눌려 쓰러진 짐승을 보거든 그냥 내버려 두지 말고 반드시 임자를 도와 나귀를 일으켜 세우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런 곤란한 상황을 만날 일이 거의 없으니 이 대목은 그저 무시하고 넘어가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보다 보편적인 윤리를 지시하기 위한 구체적인 예일 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길을 잃거나 무거운 짐에 눌려 쓰러진 ‘원수의 짐승’이 아니라, 그런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내게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모습을 보면 ‘잘 됐다’,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래선 안 된다면서 그들을 ‘반드시’ 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영어로는 ‘must’입니다. 왜 이런 어려운 요구를 하시는 것일까요? 결국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록 적대감이 그와 나를 갈라놓았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곤란에 처한 원수를 돕는 것은 사실은 자기를 돕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쓴 뿌리, 즉 악한 경향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결국 더 큰 화해의 길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1954년에 무자페르 쉐리프(Muzafer Sherif)는 집단 갈등과 이기심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모의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11살짜리 백인 아이들 22명을 선발했습니다. 그 아이들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무자페르는 그 아이들을 무작위로 두 그룹으로 나눈 후 따로따로 오클라호마에 있는 여름 캠프에 데려갔습니다. 아이들은 다른 그룹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첫째 주에는 아이들 사이에 팀웤을 만드는데 진력했습니다. 팀 이름을 정하고, 그것을 깃발과 셔츠에 새겨넣은 후 함께 걷기도 하고 수영도 했습니다. 둘째 주에는 두 팀을 대면시키고 여러 가지 상황을 부여해 경쟁심을 유도했습니다. 이긴 팀에게 트로피와 메달 그리고 상금을 줬습니다. 긴장감이 조성되었고, 아이들은 다른 팀을 야유하는 노래를 부르거나 노골적으로 약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급기야는 각자의 캠프를 습격하기도 하고 상대의 깃발을 내려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같은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도 거절했습니다. 셋째 주는 그들을 통합하는 길을 모색했습니다. 화해를 위한 모임이 주선되고, 영화를 함께 보고, 불꽃놀이도 함께 했습니다. 실험자들은 이런 노력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 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 실험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아이들은 이내 이전의 갈등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래서 무자페르는 새로운 실험에 착수했습니다. 두 팀 모두를 위협하는 상황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는 캠프에 물을 공급하는 파이프를 막아버렸습니다. 두 팀 모두 문제에 직면하자 해결책을 찾기 위해 모였고,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문제가 해결되자 아이들은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뻐했습니다. 타고 다니는 버스가 진창에 빠지자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달려들어 차를 밀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두 팀은 서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버리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승리한 팀 아이들은 상으로 받은 돈으로 음료수를 구입해 다른 팀 아이들에게도 나눠주었습니다. 

그룹 상호간의 적대감의 장벽을 허문 것은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했던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따지다 보면 갈등의 골은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협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다 보면 상대의 좋은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평화가 위협받고,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는 현실에서 각 나라와 문화와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선택해야 할 유일한 길입니다. 원수의 짐승이 길을 잃었을 때 임자에게 돌려주고, 짐에 눌려 쓰러진 짐승을 일으키기 위해 협력할 때 우리 속에 있는 적대감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전쟁이 아니라 협력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불의한 재판
본문은 한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사법적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토라는 거짓 증언을 엄격히 금지합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고,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수의 의견에 거슬러 말한다는 것은 어지간히 굳은 마음을 먹기 전에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거짓 증언을 금하는 것은 거짓 증언의 피해자가 대개 사회적 약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증언은 한 사회를 지탱해주고 있는 신뢰의 토대를 허뭅니다. 법이 강자의 편익을 위해 사용될 때 불신 사회가 됩니다.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법은 선이 떠나버린 세계에서 선의 대리자’라고 말했습니다. 법조차 무너지면 세상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두둔해서도 안 되지만,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도 안 됩니다. 

法이라는 글자는 원래 ‘갈 거去’ 자 밑에 ‘외뿔 양’을 뜻하는 ‘록鹿’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신화적 동물인 외뿔 양은 마을에 정의를 훼손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뿔로 받아서 마을 밖으로 제거한다고 믿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양이 달라졌습니다. 法이라는 글자는 ‘물 수氵’변에 ‘갈 去’ 자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물이 늘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평평해지는 성격을 법의 본질로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법이 정치인이나 관료 혹은 대기업에는 관대하고,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는 가혹하다면 법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비일비재하고 보고 있습니다. 정치 자금을 둘러싼 공방, 민간인 사찰에 대한 공방, 기업형 비리문제는 제대로 단죄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성경은 재판관들에게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공직자들에 대한 인사 청문회를 볼 때마다 서민들은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 중에 탈법, 불법에 가담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이드로는 사위 모세에게 공직자들을 뽑는 기준을 이렇게 말합니다. “또 자네는 백성 가운데서 능력과 덕을 함께 갖춘 사람,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참되어서 거짓이 없으며,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을 뽑아서 백성 위에 세우게.”(출18:21) 

이런 지도자 어디 없을까요? 능력도 없고 덕도 없는 사람, 사람은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람, 부정직한 소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겠습니다만 국민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뇌물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의로운 사람의 말을 왜곡시킨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요즘의 뇌물은 금품이나 물건만이 아닙니다. 자녀들에 대한 직업 알선도 있고, 특채도 있습니다. 뇌물이 말하는 사회는 불의한 사회입니다. 

나그네 보살피기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내용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나그네는 잠시 집을 떠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머물고 있는 이방인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세계에서 자기의 고향을 떠나 낯선 외국인들 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 가슴 시린 일이었을 겁니다. 나그네란 ‘게르’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게르에는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동화되어 살아가는 개종자였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차마 홀로 버려둘 수 없어서 자기 고향인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이주한 여인입니다. 룻은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 철저히 동화된 이들을 게르 체덱(ger tzedek)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들과는 달리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지만 이스라엘에 덜 동화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 말입니다. 이들을 게르 토샤브(ger toshav)라고 하는데,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거의 밑바닥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안식일 규정을 잘 살펴보면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쉬어야 할 대상들이 열거된 순서는 ‘너희’, ‘너희의 아들이나 딸’,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 ‘너희 집짐승’, 그리고 마지막이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나그네는 정말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시에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도 없습니다/‘민적이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며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 시의 앞부분에는 먹을거리가 없어 조나 감자를 꿀 수 있을까 해서 찾아간 이웃집 주인은 “거지에게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생명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라며 거절합니다. 

그런데 누구도 돌보지 않는 나그네, 즉 사회적 약자에게 하나님은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들이 두려움에 떨거나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게르에 대한 생계 대책을 세우라고 엄중하게 지시하고 계십니다. 곡식과 올리브 혹은 포도를 거두고 남은 것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삼년에 한 번씩 거두는 십일조도 그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할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먼저 그들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였음을 잊지 말라고 말합니다.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말이 있지요? 실패를 겪어본 사람만이 실패자들의 쓰라린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아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야 할 두 번째 이유는 복과 관련이 됩니다. “당신들이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이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신14:29) 저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할 세 번째 이유는 사회적 약자를 가혹하게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날의 품삯을 받지 못한 이들이 주인을 원망하면서 주께 호소하면, 죄가 주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신24:15).

어떤 일로 이웃과 척졌다 해도 화해를 모색하기 위해 노력하고,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 신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사회적 약자들을 따뜻하게 배려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삶이야말로 예수님이 앞서 걸으신 길이고,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삶의 근본을 성찰하는 이 계절, 우리 삶이 이런 성경의 정신을 따라 재구성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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