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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창 13: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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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창 13:14-18)


(창 13:14-18)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미 프로농구 NBA의 살아있는 전설 마이클 조던은 동료 선수들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엄청난 연습벌레로 유명합니다. 1984년 미국대표로 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조던은 인디애나 대학의 포인트가드 스티븐 알포드와 세인트존스 대학의 크리스 멀린에 비해 슈팅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였습니다. 훈련 초창기에 이들의 실력에 압도당한 조던은 그 이후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슈팅 연습에 몰두했고 결국 올림픽이 끝날 무렵에는 그들과의 내기에서 결국 승리를 했습니다. 후에 그의 인기가 치솟아 시즌을 앞두고 영화촬영을 하게 됐는데 연습량을 채우기 위해 근처에 돔(Dome)형식의 간이 체육관을 지어놓고 NBA선수들을 초청해서 연습을 할 정도로 연습에 철저한 선수였습니다. 이처럼 스스로의 관리에 철저했던 그는 미 프로농구 사상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남기고 영예로운 은퇴를 하였습니다.

창공을 나는 비행기와 대양을 항해하는 배는 안전한 운항을 위해서 다른 그 무엇보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철저한 정비를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서 정비를 제대로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안일하게 운행을 시도하다가 일어난 끔찍한 사고에 대한 소식을 종종 듣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미리, 그리고 제대로 정비하지 않으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재정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만유의 주 하나님이심을 망각하고 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비를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된 삶을 살려면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정비하고 그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비해야 할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1. 우리는 마음의 생각을 정비해야 합니다. 

20세기 초 영국의 초호화 유람선이던 타이타닉호는 터키식 사우나와 스쿼시 경기장, 수영장 등 온갖 시설을 갖춘 초호화 여객선 타이타닉은 안전에도 엄청난 투자를 해 ‘침몰할 수 없는 배’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러나 1912년 4월 14일 처녀항해에 나선 지 닷새 만에 북대서양에서 빙하와 부딪쳐 2시간30분 만에 침몰해 1500여 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85년 이 배의 잔해가 발견된 뒤 과학자들은 침몰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 미 국립표준기술연구원의 티머시 포엑 박사와 존스홉킨스대 제니퍼 후퍼 매카티 박사는 『무엇이 타이타닉호를 침몰시켰는가』라는 책자를 통해 불량 리벳(철판을 서로 연결하는 데 쓰이는 대형 못)이 타이타닉을 급속도로 침몰시킨 주범이라는 발표를 했습니다.

두 사람은 타이타닉의 잔해에서 찾은 리벳 48개를 당시 만들어진 다른 리벳과 비교했습니다. 그 결과 타이타닉의 리벳들이 동시대 것들보다 슬래그(철의 강도를 약하게 만드는 찌꺼기)성분을 3배 이상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슬래그가 많은 리벳은 부서지거나 부러지기 쉬운데, 타이타닉을 건조했던 북아일랜드 벨페스트의 할랜드&울프사의 회의록을 분석한 결과 이 회사는 당시 타이타닉 등 초대형 여객선 3척을 동시에 건조하느라 심각한 리벳 부족난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선소는 평소 쓰던 최고급 철강재 대신 한 등급 아래 철강재로 리벳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당시는 선박용 리벳의 소재가 일반 철에서 훨씬 탄탄한 강철로 한창 바뀌는 때였는데, 조선소는 리벳난으로 인해 하중이 많이 걸리는 선체 중앙에만 강철 리벳을 사용하고 나머지 부분에는 일반철 리벳을 썼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형 여객선의 침몰원인이 그 작은 리벳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가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이 때문에 아무리 부요한 환경을 확보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마음의 생각이 부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하셨으며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20)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까요? 우리는 먼저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인간은 그 생각이 부패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빛에 대한 생각보다는 어둠에 대한 생각을, 질서에 대한 생각보다는 무질서에 대한 생각을,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보다는 추함에 대한 생각을, 부요에 대한 생각보다는 가난에 대한 생각을, 사랑에 대한 생각보다는 미움에 대한 생각을 더 하고 그 생각을 마음의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부정적인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둠에서 빛을, 혼돈과 무질서에서 질서를, 추함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빈곤에서 부요를, 미움과 원망에서 사랑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에게 베푸셨습니다.

이러므로 어둠 대신에 빛을, 무질서 대신에 질서를, 추함 대신에 아름다움을, 저주 대신에 부요를, 미움 대신에 사랑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긍정적인 생각없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적극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안된다. 나는 못한다. 나는 능력이 없다. 나는 망한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말씀하고 있으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열 두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냈을 때 정탐을 마친 그들의 보고가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먼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은 ‘우리가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소극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 보고에 백성들이 울면서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라고 하면서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고 보고했습니다. 이야말로 얼마나 적극적인 생각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소극적인 보고를 한 열 정탐꾼을 죽이시고, 그들의 보고를 듣고 원망,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로 회진시켜 방황하다가 거기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적극적인 보고를 한 여호수아와 갈렙, 그 후손들만 택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적극적인 생각을 갖는 성도를 택해 주시고 축복의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 안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2. 우리는 꿈을 정비해야 합니다. 

꿈은 우리를 축복의 세계로 이끕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자신이 꿈을 가지면 그 꿈을 자신이 이끌고 가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꿈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꿈이 인간을 이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역사하실 때 꿈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바로 여러분과 나에게 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2:28)

이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꿈을 갖지 못한 사람은 버림을 받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창조적으로 생산적인 꿈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확실하고도 구체적인 꿈을 갖지 않고 그저 막연한 요행을 바라고 살아갑니다. 이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주 안에서 확실하고도 구체적인 꿈을 잉태하는 성도가 그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없는 것을 어떻게 있는 것같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꿈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꿈이 아니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한 것을 어떻게 받은 줄로 믿겠습니까? 우리가 구하는 그 대상을 찬란하게 꿈꾸지 않고 믿을 수 없습니다. 바로 꿈은 믿음의 어머니 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하셨습니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되며 강건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 안에서 그것을 찬란하게 꿈꾸십시오. 여러분이 꾼 꿈은 여러분을 그 길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한 청년이 어느 날 길에서 1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웠습니다. 그 후 그는 길바닥만 보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10년 후에 그가 얻은 것은 2만여 개의 핀과 돈 몇 푼, 구부정한 어깨가 전부였습니다. 반면, 그가 잃은 것은 찬란한 햇빛, 별들의 반짝임, 사람들의 미소 그리고 사는 맛이었습니다. 우리도 혹시 이 청년처럼 세상의 작은 소득에 집착하여 땅만 보고 걸으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라도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도 막연하게 축복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4,15)고 말씀하심으로 찬란한 꿈을 주셨습니다. 이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고 그것을 성취했습니다.
꿈을 갖지 않고 막연하게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불행을 자초하는 사람입니다. 주 안에서 건전하고 광대한 꿈을 안고 출발하십시오. 그 꿈이 여러분에게 기적을 체험케 해 줄 것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자세를 정비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보는 말씀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과 왕들과 사도들을 통해 완성하신 책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해 과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떻게 역사하셨나를 소상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과거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 살아서 역사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생명의 책이요, 영원불멸의 책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어느 한 말씀이 우리 온 영혼에 회오리처럼, 걷잡을 수 없이 충격을 주는 방망이처럼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 기록된 말씀이 현재 ‘내게 주시는’ 특별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들으면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주의 종을 통해 말씀을 들을 때 어느 한 말씀이 불길처럼 혹은 비수처럼 혹은 아늑한 봄기운처럼 심령에 다가오는 것을 체험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기도 중에 혹은 찬송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깊은 기도 중에, 찬송 중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말씀입니다.

그런가하면 장로님이나 권사님이나 집사님이나 우 통해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실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대화중에서도, 진지한 대화중에서도 ‘강력한 메시지’로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받은 말씀은 우리의 믿음과 지혜와 지식과 판단력과 아이디어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성경을 통해, 설교를 통해, 기도와 찬송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들려지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옷을 벗어버리고 거룩함의 옷을 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데 훈련이 된 사람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 험한 시대에 힘이 되고 지혜가 됩니다. 오늘날 지혜가 없어 낭패를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얻으면 그 어떤 위기라도 극복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세속에 젖어 있으면 그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청종하는 자세를 확실하게 정비하고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4. 우리는 믿음의 선언을 하는 자세를 정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말에도 창조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더욱이 회개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들의 말에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은 수많은 능력을 나타냈는데 그들은 모두 담대한 선언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미문 가에서 구걸을 하던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3:6) 선언했습니다. 
그 결과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 그는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나 뛰면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선행과 구제에 힘쓴 도르가가 죽었을 때도 그 시체를 향해 ‘다비다야 일어나라’(행9:40)고 선언했습니다. 그 결과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 그녀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말에도 권능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잠6:2)고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한 믿음의 선언을 해야 합니다. ‘나는 못해. 나는 절망이야. 나는 무능력해’ 이런 부정적인 말을 우리의 입에서 제해야합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힘차게 시인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을 좌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대뇌 학자는 뇌세포의 98%가 말의 지배를 받는다고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둠으로 꽉 들어찬 말, 부정적인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도와주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이 땅에서 담대한 믿음의 선언을 하면 하나님께서도 능력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선언해야 할까요? 우리가 어떤 믿음의 선언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총을 근거로 죄 사함에 대한 선언을 해야 합니다. ‘나는 의인이 되었다. 나는 조의 심판과 상관이 없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이런 선언은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은총을 근거로 성령충만에 대한 선언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으며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나 오직 성령님과 더불어 할 수 있다’는 이런 선언은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그 은총을 근거로 치료에 대한 선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평생토록 ‘나는 주 안에서 치료함을 받았다. 나는 강건하다. 원수의 세력이 나를 해치지 못한다’라고 힘차게 선언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선언을 통해 우리의 삶 가운데 치료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은총을 근거로 낭패와 실망, 저주와 빈곤에서 벗어난 것을 선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저주에서 자유함을 얻은 자유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한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요즘 사업이 어려워 죽겠습니다.’, ‘물질이 없어 살기가 괴로워요’, ‘경기가 형편없어요.’, ‘죽지 못해 살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의 열매가 삶 가운데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주에서 벗어나 복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비록 경기가 형편없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말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 가운데 있습니다. 나는 부요합니다.’ 이런 입술의 시인으로 복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은총을 근거로 사망이 철폐되고 천국의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을 선언해야 합니다. 우리는 눈물과 근심과 이별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는 영생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은 이런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불안과 공포와 초조 속에 맞이하지만 우리는 평안과 기쁨과 감격 속에 맞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라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천국의 소망, 부활의 기쁨에 대해 힘차게 선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가운데 부활의 새 생명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사항이 바로 우리가 정비해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가 이 네 가지 사항을 잘 정비하고 실천할 때 우리는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부실하면 인생도 황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 안에서 인생을 잘 정비해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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