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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얻는가?(2) (눅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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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얻는가?(2) (눅 18:1-8)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1)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2)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3)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4)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5)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6)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8)
<누가복음 18장 1~8절>


할렐루야! 
복된 자리에서 만나서 감사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먹을 반찬이 있고, 입을 수 있는 옷이 있고,
갈 곳이 있고, 만날 사람, 전화 할 사람이 있는 것 …
모두가 감사의 조건입니다.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배추값이 많이 올랐다고 해서 김치통을 안돌리려고 했는데 …
우리교회에서 보내는 김치를 기다리는 분들이 계시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은 한 포기, 두 포기 들어가는 김치통 하나면 겨울을 지낸다고 합니다. 
기다리는 분들을 실망시킬 수가 없어서 조금 준비했습니다.
마음에 원하시는 분들은 오늘 김치통을 가져가셔서 
채워 다음 주에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가져오라고, 돕자고’하는 것이 많은데 … 
이런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하신 <오늘> 
승리의 날, 축복의 날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시안게임 중계를 보니까 이긴 팀과 이기는 팀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눈빛이 다르고 얼굴에 여유가 있습니다.
건강하고 씩씩하고 멋있게 사는 사람의 증거가 눈빛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살아있는 눈빛으로(힘이 있는 눈빛으로)
옆의 분과 여유 있는 미소를 띠며 인사합시다.
“승리의 삶을 사십시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마음대로 해석하면 …

우리는 신문이나 TV같은 언론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는 일을 종종 보게 됩니다. 
대부분 기사를 쓰는 기자나 보도하는 아나운서가 사건의 내용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깁니다.
기자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상업적인 의도를 갖게 되면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자극적인 기사를 쓰게 되고
그러면, 전혀 엉뚱한 일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듣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구 중 하나가
빌립보서 4장 13절의 말씀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냥 이 구절만 떼어놓고 보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능력을 주시니까, 난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라고 불가능은 없다는 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과 다릅니다. 
빌립보서 1장에 보면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4장 13절 앞뒤로 보면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는 말씀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 4:14)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내가 복음을 전하면서 겪게 되는 고통, 배고픔, 궁핍(몹시 가난함)도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기 때문에 모두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은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진학, 취업, 결혼, 사업확장 같은 도전 … 등 
자신의 개인적인 일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인용하여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 편한대로 성경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 말씀 성경을 잘못 이해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을/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게 되어 
전혀 엉뚱한 말을 하고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 1:20)라고 했습니다.
다르게 번역된 성경을 보면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라는 뜻입니다.
-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아무도 성경의 모든 예언을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새번역)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own interpretation)하다보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제 멋대로 해석한다’는 것은 자기가 편리한 대로, 
자기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주위에도 성경을 거짓되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결국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단’(異端: 다를 이, 끝 단)은 
출발은 비슷한 것 같고, 똑같은 것 같지만 끝이 다른 것입니다.
별 차이 없는 것 같아 보여도 가다보면 전혀 만날 수 없는 다른 곳이 됩니다.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이단자들은
오히려 교회와 목사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아무데나 가서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만 잘 배우면 됩니다.
이단자들이 유혹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기막히게 가르치는 선생이 있다”고 가보자고 합니다.
그리고 “배우는데 공짜”라고 가자고 합니다.
이런 유혹하는 이단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교회 앞에 와서 예배 마치고 가는 이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 주면서까지 유혹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바르게 하시기 바랍니다.
정신차리고 근신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이단의 유혹에 빠져 믿음이 흔들리고 가정이 파괴되고
불미스러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한번 유혹에 빠지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자칫 잘못 이해하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18장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만 놓고 보면
예수님께서 ‘끈질긴 기도의 자세’를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이해하려면 말씀의 앞뒤 문맥까지 잘 읽어봐야 
그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

오늘 본문의 비유는 끈질기게 기도해서 
응답을 받아내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자세’가 아니라 ‘기도의 내용’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본문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재판장’입니다. 
어느 시대나 재판장 정도면 사회에서 벼슬을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나 재판장을 하지는 않습니다. 
또 한 명은 ‘홀로 사는 여인’입니다. 
가정을 꾸렸으나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든지
아니면 전쟁터나 어디 먼 곳에 가서 행방불명이 되어 
홀로 사는 여인을 말합니다.

2절에 보면 그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2절) 
한마디로 불의한 사람, 의롭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홀로된 여인은 “자주” 그 재판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3절에 보면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이 번역한
<메시지(The Message)> 성경에 보면 이 구절을 
<내 권리가 침해받고 있으니 나를 보호해 주십시오.>(눅 18:3) 라고 했습니다.
즉 ‘재판장님, 나의 사건을 맡아서, 공정하게 처리해 주십시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녀의 호소를 보복의 개념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원수를 보복해달라는 탄원이 나옵니다. 
구약의 시편이나 이사야에서도 나오고,(시18:47, 사34:8, 사59:17~18) 
신약의 고린도후서나 계시록에서도 나옵니다.(고후10:6, 계6:10, 19:2)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보복의 의미는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인간이 직접 원수에게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복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즉, 원수에 대한 보복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의 홀로된 여인은 
자신의 억울함을 재판장에게 호소했습니다. 
한 두 번 그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3절에 보면 “자주”가서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재판장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4절, 5절 봅니다.
“ …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눅 18장 4b-5절)

얼마나 자주 찾아왔으면 ‘이 여자 문제는 빨리 해결해야지 
안해주면 될 때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히겠구나.’하는 뜻입니다.
재판장이 말한 “나를 괴롭게 하리라”는 말의 원래 뜻은 
‘눈퉁이를 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여인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내 눈퉁이를 치겠구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약자인 홀로 사는 여인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강자인 재판장의 눈퉁이를 칠 수 있었겠습니까?
그만큼 그 뜻은 재판장이 그 여인의 간청을 
그 정도로 심각하게 느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만큼 여인의 형편이 절박하다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그때 예수님은 ‘하물며’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1장에서 기도에 대해 가르치실 때도
‘하물며’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이렇듯 재판장을 귀찮게 할 정도로 간청을 해도 들어 줄 텐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7) 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도는 끝까지 해야 한다. 매달려야 한다’라는 뜻으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100%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안 되면 말고’하는 식으로 한 번 찔러보는 기도가 아니라,
한 두 번 해보고 마는 기도가 아니라 … 
끊임없이, 쉬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하나님과 연결된 줄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응답 받기 위해서 무조건 끈질기게 기도만 하면 다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복음 17장 20~37절의 말씀을 먼저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과 연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7장 후반부는 
‘미래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눅 17:22) 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말세에 환난과 핍박이 심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몹시도 고대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눅21:8-9, 마24:21-29, 막 13:5-13) <두란노 HOW 주석 참조>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비유는,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말고 …
계속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권면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지라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뤄질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종말적인) 상황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큰 어려움과 고난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참아야 하고,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 믿어도 힘든 것이 하나도 없어’라고 말하는 분들은 가짜입니다.
찬송가에도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참아야 하는 것이 많습니다.

평상시에는 잘 모릅니다. 
내가 참지 못했던 일이 있었을 때,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면 
‘옛날에 네가 이랬지.’하며 예전 일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의외로 뒤끝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누구에게도 
‘섭섭하게 해서는 안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혹 누군가를 섭섭하게 했을 때는 
즉시 ‘잘못했다’고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섭섭함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 할 때 그분이 앉은 반대편만 보고 설교하더라고 하더라고요.
아무려면 제가 한쪽만 보고 설교하겠습니까.
그 다음 주에는 그분이 반대 쪽에 앉으셨는데
제가 또 그분이 앉은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답니다.
‘얼마나 보기 싫었으면 그랬겠느냐’고 하시는데 … 그분이 그렇게 느낀 것이지요.
사람이 한번 꼬이면 그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고, 
예수 믿기 때문에 참아야 되는 것이 있고, 이해해야 되는 것도 있습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상황을 견뎌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어려움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로 
낙심치 말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믿음(눅18:8)”을 소유한 자가 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을 기다리며, 
여인(과부)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면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기다림’

여러분은 무엇을 기도하며 무엇을 기다리고 사시나요?
4복음서 중에 누가복음은 기다림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성경을 기록한 누가는 기다림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기다려야 할지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15~16절에 보면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들은 들판의 목자들도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장 25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 2:25) 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눅 2:26) 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는데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께 찬송합니다. (눅2:28)
예수님 보기를 간절히 기다렸던 시므온은 결국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3장 15절에도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눅 3:15) 하였고, 
누가복음 7장 19절에서도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눅 7:19)라는 말씀을 통해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36절에서는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눅 12:36)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23장 51절에는 아리마대 요셉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51~52절 말씀에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눅 23:51~52) 하였습니다.
이처럼 
- 기다리던 사람이 예수님의 탄생을 보았고, 
- 기다리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고,
- 기다리던 사람이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였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 뿐 아니라 사도행전도 기록하였는데,
사도행전 1장 4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고 했습니다.
즉, 성령이 임할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누가는 기다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통해 임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누가복음 전체가 그렇듯이 오늘 본문의 비유도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며 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가 구하고 있는 기도제목이 하나님의 뜻인지, 하나님의 원하심인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인지 …
아니면 단지 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인지 …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신앙생활 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내 욕구를 채워 줄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인지 …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기다리는지 … 우리 스스로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을 위해 기도하고 전혀 상관없는 것을 기다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남편과 아내를 위해, 자녀들을 위해, 
직장을 위해, 사업을 위해, 건강을 위해 … 많이 기도합니다.
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들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는 것과 
아무 상관없이 단순히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기도를 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81년도에 인천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교인은 없었지만 주보를 만들었습니다.
교인이 있으면 광고도 있고 여러 가지 넣을 내용이 많겠지만
겉표지하고, 예배 순서, 예배시간 안내와 약도를 넣고도 한 면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뭔가 글을 써야 할 것 같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글을 쓰다 보니 글 내용이 좋다고 책으로 내자고 해서
<껌딱지 할아버지>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책에 있는 내용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 시간에 들은 이야기를 정리한 것입니다.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큼직한 돌 두 개를 들고 교회에 들어서셨다. 
굽은 허리로 서 계신 모습에서 족히 80세는 되어보였다.
기도실로 들어가신 할머니는 돌을 앞에 놓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하셨지요?(마7:7)
그리고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지요?(막11:24) 
여기가지고 온 돌들이 내일 새벽에 금이 되게 해주세요.

조금도 의심치 않고 꼭 믿습니다. 
이것들이 금이 되면 하나는 교회에 바치고 하나만 내가 쓰겠습니다. 
꼭 약속드려요. 틀림없이 하나는 바치겠어요. 
주여! 믿습니다. 밤새도록 반복되는 기도는 애절하기까지 했다.
새벽에 “주여, 믿습니다!”를 큰 소리로 외치고 눈을 뜨신 할머니는
실망하고 말았다. 금이 되었을 줄 알았으나 그대로 시꺼먼 돌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하나님, 하나님도 너무하슈! 나 혼자 다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나는 바치겠다는데 …”

우리들의 기도도 이와 비슷한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 같고 하나님께 드릴 것 같이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자기의 욕심으로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수준’을 달리 해야 합니다.
수능시험을 본 학생들이 단지 
‘대학에 가게 해주세요. 무슨 과에 합격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그 할머니의 기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왜 공부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기도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런 삶을 살겠습니다. 이렇게 살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세요.
내 욕심이 채워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작정 좋은 직장을 구하는 기도보다
땀 흘려 일하여 얻은 소득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며 무엇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그 기다림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까.
그 기도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지요?

너희는 먼저 … 

우리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것 같은 기도를 할 때가 많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산타클로스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이십니다.
그런데 수많은 아이들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기다립니다.
아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선물을 받으면 산타클로스에 관심이 없고 오직 선물에만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도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구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해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기도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는 삶을 살되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눅 18;1)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인지
‘주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는
기도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밤부터 시작되는 부흥회를 합니다.
부흥회를 통해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 …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 어떻게 신앙생활 해야 하는 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부흥회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번 부흥회 주제를 보면서 마음에 확 와 닿았습니다.
<역전의 인생으로 다시 서기>라고 했는데
목사인 제 자신부터 먼저 은혜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려면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포기(give up)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 부흥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TV시청을 포기하고,
친구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잠을 포기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선순위(priority)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번에 말씀 듣는 일에 우선순위를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영적 전환점(turning point)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부흥회는 연례행사가 아닙니다.
- 바로 저를 위한 기회입니다.
- 바로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오늘 저녁부터 오시는 강사님을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쓰실 것입니다. 
그의 입을 통해 주시는 말씀이 
저를 향한 말씀이고, 여러분을 향한 말씀이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다린다고도 말하고,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뜻에 조금만 벗어나면 파르르 떱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하는 일, 속회, 선교회를 조정하는 일이
여러분의 뜻에 맞지 않으면 부르르 떨지 않나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산다고 하지만 자기의 뜻을 앞세울 때가 더 많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며 무엇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인지 … 하나님의 원하심인지 … 
그것을 먼저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이 거룩한 주일에 예배의 자리에 나온 우리들
정말 무엇을 구하며 사는지 … 무엇을 기다리며 사는지 …
우리 스스로 돌아보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누가 응답을 받는지 … 누가 얻는 사람인지 …
우리 스스로 우리의 기도를 돌아보는 복된 주일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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