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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빌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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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빌 4:1-3)


오늘 본문을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읽으면 가슴이 찡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1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그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씀은 육십을 바라보는 초로의 바울 사도의 거짓 없는 사랑고백입니다. 그는 그들을 정말로 사랑했습니다.
 
사실 바울의 인생에는 사랑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가족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재물이 있었습니까? 역시 없었습니다. 명예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처럼 유대 전통을 지키고 대제사장들과 가깝게 지냈다면 큰 명예가 주어졌겠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그에게는 명예도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바울에게 마음을 바쳐 사랑할만한 대상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대상은 오직 한 분 주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치가 멋진 고급 레스토랑으로 초대할 수 있나요? 두툼하고 따스한 코트 한 벌을 사 드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단 하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 마음으로만 사랑할 뿐이고, 실제에 있어서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울은 일찍부터 이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데 모든 것을 걸고 살았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었기에 바울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아무런 조건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 때문에 전도 여행을 했고, 사람들 때문에 고난을 받았고, 사람들 때문에 기도했습니다. 바울의 모든 사역은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위해 하늘 보좌를 떠나 이 세상에 오시는 가장 위대한 여행을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도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두 가지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결국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11월 셋째 주일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가슴이 시려오는 것을 느낍니다. 후회되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몇 일 전 제가 서울에 있을 때 지도했던 한 청년이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뇌종양 수술을 받고 의식불명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청년과 연락을 하지 못한 지가 3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전화라도 좀 할 걸, 위해서 기도라도 더 해 줄 걸....>하는 후회에 마음이 아픕니다. 영도에 와서 많이 존경했던 성광교회 김기복 목사님께서 25년 가까운 세월을 섬기시고 은퇴하셔서 이 달 말에 서울로 이사를 하신다고 합니다. 목사님께서 영도에 계실 때 좀더 가까이 모시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의 연결고리를 더 든든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돈을 더 많이 벌지 못한 것, 더 성공하지 못한 것, 더 배우지 못한 것 등을 후회합니다만, 가장 최후에 후회하는 것은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죽는 존재입니다. 

1945년 4월 30일 오후 3시30분쯤, 독일의 비밀스런 지하 벙커에서 한 발의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한 남자가 자신의 입에 권총을 들이밀고 방아쇠를 당겨 자살했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스스로 청산가리를 마시고 죽은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남녀의 자살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이들이 누구였을까요? 남자는 2차 세계 대전의 원흉이라고 불리는 독일의 <히틀러>였고, 여자는 히틀러가 사랑한 23세 연하의 여인 <에바 브라운>이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이 두 사람이 죽기 바로 전 날 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1929년에 처음 만났고 비밀스런 관계가 이어져 왔습니다. 전쟁이 독일의 참패로 거의 끝나서 아무 희망이 없던 4월 29일, 에바 브라운은 히틀러가 전쟁을 지휘하고 있던 지하 벙커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괴벨스를 증인으로 삼고 그 날 새벽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 날 오후 히틀러와 함께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가 애인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는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그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 오후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도 자살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사람입니다. 우리는 흔히 히틀러를 피도 눈물도 없는 전쟁광, 독재자, 그리고 유대인을 육백만 명이나 죽인 살인자로 생각합니다. 그는 결혼마저도 <당이 정권을 획득하고 국가를 높은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헌신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서 반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종말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을 때, 맨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한 여인의 사랑이었습니다. 에바 브라운도 <히틀러 없는 독일>에서는 살기 싫다고 하면서 결혼과 죽음의 의식을 한꺼번에 치르기 위해 지하벙커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생애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한 남자의 최후의 관심사는 전쟁도, 독일 제국도, 유대인 학살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도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거기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그가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맨 마지막에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 보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다른 조건이 다 구비되었다고 하더라도 사랑하고 사랑 받지 못하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야말로 에덴을 완성하는 마침표였습니다. 사랑 있는 곳이 에덴입니다.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 우리는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것도 기술이고, 사랑 받는 것도 기술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도 죄요, 사랑 받기를 거절하는 것도 죄입니다. 

사랑이 성취되는 곳에서 우리 신앙은 놀랍게 확장됩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과의 수직적 신앙이 수평의 차원으로 확장됩니다. 위를 향하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수평으로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하지만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은 매우 불행합니다. 현대인이 잃어버린 가장 치명적인 것은 <사람>입니다. 영화감독 봉준호씨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첨단 과학에 의해 만들어진 휴대폰이 너무도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갔다고 했습니다. 휴대폰은 우리로부터 고독을 빼앗고, 사색과 성찰을 빼앗았다고 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수시로 전화가 걸려오기 때문에 고독할 틈도 없고, 깊이 사색하고 성찰할 시간도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면 늘 전화가 걸려오니 오히려 우리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휴대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사람과 말하고 정보를 교환하게 되었지만, 깊은 대화는 오히려 줄었고, 마음을 교환하는 것은 더 줄었습니다. 사람은 많이 접촉하지만, 인생의 동행자들은 줄었습니다. 수많은 사람과 부딪히지만 사랑은 더 적어졌습니다. 현대인은 문자 그대로 <군중 속의 고독>속에서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늦가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사람을 사랑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들 속에서 사람들을 잘 사랑하셨습니까? 아니면 잘못된 사랑을 하셨습니까? 
많이 사랑하셨습니까? 아니면 마음을 닫고 조금만 사랑하셨습니까? 
진실하게 사랑하셨습니까? 아니면 가식적 사랑을 하셨습니까? 
건강한 사랑을 하셨습니까? 아니면 해서는 안 될 병적 사랑을 하셨습니까? 
열매가 풍성한 사랑을 하셨습니까? 아니면 메마른 사랑을 하셨습니까? 
상처가 치유되게 하는 사랑을 하셨습니까? 아니면 그 상처를 더 깊게 만드는 사랑을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라.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라. 조국을 사랑하라. 사회를 사랑하라...> 이런 식으로 거창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 이 말은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죽어 가는 이들을 건지고, 아픈 이들을 섬기라는 말입니다. 그게 제자의 사명이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 그래서 사람을 살리는 일, 이것이 제자의 길이었습니다. 결국 제자도란 <사람 사랑의 도>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시기까지 그는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그 때까지 베드로는 고기 외에는 잡아본 일이 없습니다. 고기는 언제나 그의 머리 속에서 일정한 돈으로 계산되었습니다. <한 마리에 얼마, 오늘은 몇 마리니 모두 얼마>라는 식으로 계산하였습니다. 그는 그 가치에 따라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번에는 <고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사람을 낚으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생명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숫자로, 양으로, 액수로 계산될 수 있는 것을 낚으려고 하지말고, 돈으로 계산되지 않는 것, 생명에 관계된 것,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을 낚는 낚시꾼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숫자의 지배를 받아 비인간화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숫자로 판단합니다. 숫자로 판단해서 크고 많은 것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의 문호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라는 유명한 동화집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따지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를 소개할 때에도 어른들은 진작에 물어봐야 할 주요한 것들은 하나도 물어볼 줄을 모른다.  이를테면 "그 친구 목소리가 어떻더냐?" 라던가, "그 친구는 무슨 장난감을 제일 좋아하니?" 라던가, "그 친구도 나비 채집을 하니?" 이런 질문은 할 줄을 모른다. 그저 묻기를 "그 친구 몇 살이니?" 아니면 "그 친구 형제가 몇 명이냐?" 아니면 고작 묻는다는 것이 "그 친구 아버지 수입이 얼마냐?" 

이런 식의 따분한 이야기만 한다. 그래야 그 친구를 안 것으로 생각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나 오늘 예쁜 집을 보았어요 장미 빛 벽돌로 지었는데, 창틀에는 제라늄 꽃이 피어있고, 지붕 위에서는 비둘기가 구구 거리는 아주 멋있는 집이었어요"라고 아무리 수선을 떨어도 어른들의 머리에는 그런 것들이 먹혀들지 않는다. 하지만, "나 오늘 4천 프랑 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그 때서야 "야 그 집 훌륭하겠구나"라고 말하며 기성을 지를 것이다. 어른들이란 본래 이렇다. 그래서 우리 어린이들은 평소 어른들을 관대하게 이해해야 하며, 참을성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한다> 
      
쌩떽쥐베리의 지적은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교회 사랑과 은혜가 있습니까?>라고 묻는 대신에 <역사는 얼마나 오래 되었나요? 교회당은 얼마나 큽니까? 교인은 얼마나 모입니까? 예산은 얼마나 되는지요?>라고 묻습니다. <그 분은 얼마나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입니까?>라고 묻는 대신에 <얼마나 좋은 차를 타고 다닙니까? 직업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교회들은 목사님을 모실 때 <그 목사님이 얼마나 진실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입니까?>를 고려하는 대신에 <학벌은 어떻고, 인물은 잘 생겼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렇게 계량화되고 숫자로 표시되는 곳에는 사랑은 없습니다. 단지 숫자만 존재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사람 사랑의 마음을 갖지 못하고, 사랑에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결혼하는 젊은이들은 자칫 잘못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돈이나 직업, 지식과 결혼하게 됩니다. 

얼마간 지나면 그것들이 편리함은 가져다 주지만, 행복은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공허감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많이>를 묻지 않으시고, <무엇>과 <어떻게>를 물으십니다. 고기를 아무리 많이 잡았어도, 사람 사랑에 실패한다면 결코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당당히 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랑의 열매를 가지고 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려운 이들을 보아도 마음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을 보아도 우리 마음이 바싹 메마른 채로 있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보다 뛰어난 사람을 볼 때 <한번 친하게 지내볼 만한 사람, 언젠가는 내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 정도로 여기고 그를 이용하려고 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베푼 친절과 도움은 모두 가식입니다.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유명한 <나와 너>란 책에서 상대방을 <그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순수한 사랑의 대상으로 <너>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만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 무엇을 탐내신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오는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여 영접하는 것은 그가 엄청난 돈을 벌어 오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출세해서 돌아오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거지가 되고, 돼지와 함께 뒹굴다가 돌아오지만, 무조건 사랑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그 아들을 사랑할 뿐입니다. 

야곱이 애굽의 요셉에게로 달려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셉이 총리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들 덕에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함입니까? 만약 요셉이 끌려가던 때 그대로 노예로 살고 있었다면 어떨까요? 요셉이 살아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까짓 녀석 내버려둬라. 노예 자식을 만나면 뭐해?>라고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가 여전히 노예일지라도, 죄수일지라도 달려갔을 것입니다. 노예라면 억 만금을 주고라도 사서 데려왔을 것이고, 죄수라면 대신 감옥에 가서라도 데려왔을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이들을 대할 때 사랑을 근거로 대하였습니다. 3절을 보면 그는 사람들을 <함께 하는 사람>으로 인식합니다. 3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아멘.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 <나의 동역자들>, <함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 이게 다른 사람을 향한 바울의 인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길, 복음의 길, 천국으로 가는 생명의 길을 같이 걷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마음을 하나로 해서 함께 그 길을 가야한다고 가르칩니다. 2절을 보세요.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사랑하는 이들과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동일한 천국을 향하여, 동일한 사랑의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하나되어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삶>, 이것이야말로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언젠가 읽어 드린 시 한 편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천천히 걸어도 / 빨리 달려도 /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 오직 한 세상이다 

더러는 조금 살다가 / 더러는 오래 살다가 / 우리는 가야할 곳으로 떠나간다 
소중한 시간에 / 우리 사랑하며 살자 / 우리 이해하며 살자 / 우리 그렇게 하자. 

우리에게 주어진 둘도 없는 삶 / 지난 날 돌이키며 후회하기보다는 
남은 날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 희망을 걸어 보자 / 행복을 찾아내자 

마침내 / 바람에게도 / 돌멩이에게도 / 보이지 않는 마음에게도 / 고마움을 느끼며 
정다운 사람들과 오붓하게 / 웃음을 나누는 일에 / 참 행복을 느끼는 /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되자 / 우리 그렇게 하자. 

김숙곤 님의 <소중한 시간에 우리 그렇게 하자>라는 시입니다. 올해의 남은 시간, 우리의 남은 생애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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