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대림절] 평화의 주 예수 그리스도 (사 11:1-9)

첨부 1


평화의 주 예수 그리스도 (사 11:1-9)


사회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사람을 희망의 존재(Homo Esperans)라 규정했다. 희망이 없다면 사람의 존재 의미는 없다는 말이다. 성경도 우리가 희망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29:11)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희망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 전체의 주제이며 예수님이 공생애 전 사역을 통하여 선포하신 말씀의 핵심 주제이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본문은 그 나라가 평화의 나라임을 노래한다. 하나님 나라의 대표적인 표지는 평화라는 것이다. 완전한 평화이다. 이 평화가 어떤 평화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 평화를 얻게 되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1. 참된 평화는 샬롬이다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추구한다.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도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들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롬8:21).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다르다. 세상의 평화는 ''Peace''이다. 이 말은 라틴어 Pax에서 유래되었다. Pax Romana(로마의 평화)에서와 같이 힘 가진 자가 누리는 평화이다. 강자만이 누리는 평화이며 약자는 설 자리가 없다.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들이 피흘리며 싸우지만 그 승자만이 자유자가 되는 그런 평화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샬롬’이다. 샬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이다. 이 평화는 에덴동산의 평화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사람과 모든 피조세계와의 관계가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평화이다. 본문의 말씀에서처럼, 이리와 표범 어린 사자와 곰과 같은 강한 자들이 어린 양, 어린 염소, 송아지, 암소, 젖 먹는 아이와 같은 약한 자들과 공존하며 그 어떤 곳에서도 해됨고 없고 상함도 없는 평화이다. 세상에는 이런 평화가 없다. 

이론적으로는 공존의 윤리가 성립될 것 같지만, 사람의 본성의 악함을 인하여 샬롬은 하나의 이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희망의 철학자라고 하는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도 그의 책 <희망의 원리>에서,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은 이 땅에서 실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토피아의 실현(변혁)이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 그 실현(변혁)의 과정이 우리의 희망이다’라고 자조 섞인 한탄을 내놓았다. 

2. 참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는다 

그러므로 참된 평화는 사람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샬롬은 오직 하나님이 은총의 선물로 주어질 뿐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역설적인 희망이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참된 평화가 있고, 하나님은 이 평화를 찾고 구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반드시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이 평화를 가져오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종 예수 그리스도라고 본문은 증언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1절). 이새의 줄기,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된 평화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평화가 도래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은 평강의 왕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평화를 주실 수 있는 비밀은 무엇인가? 

1) 예수 그리스도만이 완전한 공의를 베푸신다.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않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않으신다.(3)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이신다.(4)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신다.(5). 이 모든 것이 참된 평화를 위한 조건이다. 먼저, 평화는 정의를 통해 실현된다. 세상에는 정의가 없다. 정의를 말하지만 당리당략에 치우칠 뿐이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시14:11-12). 세상은 자기 눈에 보이는 데로 판단하고, 자기 견해에 옳은 데로 행동한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다. 귀에 들리는 데로 심판하고 자신의 위신을 위하여 언제든지 진실을 왜곡시킬 수 있다. 떠다니는 소문만 듣고 마음대로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한다. 국가적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눈앞에서 펼쳐진 살인과 도발행위도 ‘냉정하고 객관적인’ 조사를 하자며 얼마든지 묵인할 수 있는 형국이다. 현실적으로 세상이 말하는 정의는 힘이다. 돈이 정의이고 권력이 정의이다. 힘을 가져야 자유도 누리고 재물을 쌓아야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강변한다. 

거짓과 폭력이 처벌받지 않고 힘 있는 자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평화는 참 평화가 아니라 거짓 평화이다. 세상이 어찌할 수 없는 불의와 부정의를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하신다. 반드시 그 입의 막대기로 치시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최후 심판날에 하나님은 악한 자의 그 모든 악행을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참된 평화는 완전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진다.
 
2) 예수 그리스도만이 완전한 긍휼을 펼치신다. 

세상은 정의를 말할 때 심판만을 말한다. 무자비한 보복이나 처벌만을 말한다. 그러나 보복이나 처벌만으로는 결코 평화가 올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의는 보복이나 처벌이 아니라, 그 형벌 받을 자를 위해 대신 피 흘리신 완전한 사랑의 정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의는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하는 공의이다.

(4) 세상에는 힘이 정의라고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정의는 힘없는 자를 살리는 정의이다. 빈핍한 자들이 공평하게 재판받을 수 있게 하는 긍휼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의이다. 겸손하여서 자기를 낮추고, 그래서 항상 관심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는 연약한 자들도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사랑의 정의이다. 세상은 힘 있는 자들 편에 서서 그 권세를 누리도록 함으로써 평화를 운운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눅1:52), 긍휼이 충만한 공의를 베푸신다.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의는 자기를 찌르는 악한 자들까지도 살리기 위하여 그 죄를 대신 감당하고자 자신의 생명을 대신 내놓으시는 사랑이다. 악한 자를 악한 자로 보지 않고 그들조차도 약한 자로 보시고, 대신 그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피 흘리시기까지 그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므로 그들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는 그 사랑이다. 참된 평화는 이 사랑 안에 있다. 세상의 사랑은 완전하지 못하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음이 정의이고, 사랑은 내게 유익한 자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는 이해타산에 불과하다. 이 사랑은 참된 평화를 줄 수 없다. 

참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원수를 사랑하며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하신대로 친히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위하여 대신 피흘려 죽으시고, 십자가상에서 조차 자신을 찌른 자들을 용서하신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만이 세상의 참된 평화의 비결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3. 평화의 증인이 되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평화는 평화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평화를, 이 평화의 증인들인 우리들을 통하여 실현하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과 같이, 오늘날에 이 참된 하나님의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실현되고 확장되기를 원하시고 이를 섭리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그 증인이 되어야 한다. 그 원리는 무엇인가? 

1)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확장된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현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14:17). 평화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의 기름부음이 충만한 하나님의 사자이셨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공의로 심판할 것이라”(2,4) 

우리가 평화의 전령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한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이 주님께 여쭈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 이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러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될 것이다’(행1:7-8). 우리는 참된 샬롬을 위해 성령의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 나라가 성령의 역사에 있다는 것은, 참 평화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한 인격의 변화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 9절 “하나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없고 상함도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기 때문이라”고 증언한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아는 것이다. 호세아 6장 1절에서 3절 말씀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호와는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우리를 싸매어 주실 것이라. 여호와는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하셨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은 우리를 위해 대신 찢기시고 상하심으로 우리를 셋째 날, 부활의 그날에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다. 그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지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만이 참된 평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 곧 그 인격이 사랑으로 충만한 자를 통해 하나님의 평화는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리가 어린 양을 해치지 않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이리와 표범같은 사나운 인품이 변하여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성령의 열매, 곧 하나님의 성품으로서의 인격적 변화에 있다. 이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이요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의 강권적인 역사 안에 있는 사랑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이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시키며 확장시킬 수 있다. 아씨시의 프란시스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사랑 안에서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3) 하나님의 평화는 변화된 인격과 함께 변화된 삶을 통해서 확장된다. 하나님 나라의 전령사로서 예수 그리스도 앞서 보내심을 받은 세례자 요한은 선포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마3:2,3,8). 평화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것은 다름아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이 회개는 입술로나 의식적으로만의 뉘우침이 아니라 부정의에서 정의로, 탐욕에서 긍휼로의 삶의 변화이다. “선생이여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주라.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 세리들이여 부과된 세금 외에는 늑징치 말라, 군인들이여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아라”(눅3:10-14). 
참된 평화는 입술로 오지 않는다. 평화의 증인인 우리들의 변화된 인격과 함께 변화된 삶,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음을 통하여 온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성령의 열매 맺음에 있다. 

평화의 대망이 절실한 이 시대,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평화의 증인으로서 결단이 요청되고 있다. 이 평화의 증인으로 결단하라고 주님은 지금도 문 밖에서 두드리고 계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22). 이 음성은 평화의 도구가 되며 평화의 증인이 되라고 촉구하는 평화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다. 그러나 이 음성은 강압적인 엄포가 아니라 영원한 평화의 선물꾸러미를 전해주시고자 하는 무한한 사랑의 음성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초대하는 두드림인 것이다. 이 음성에 응답하여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에 응하기만 하면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된다. 평화의 증인이 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의 선택이요 영원한 평화를 확장시키는 일에 있어서 평화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파트너가 되는 영광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단은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들이 간절히 소원한 것같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간구가 되어야 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님의 초대의 음성에 결단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소원한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고, 이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참된 평화의 강수가 내 속에서, 그리고 나를 통하여 온 세상에 흘러 넘치게 될 것이다. 

평화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대망하는 우리 모두가, 지금 그 무한한 사랑의 음성으로 두드리고 계시는, 평화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 중심에 모셔 들이고 그 명령에 응답함으로, 그 사랑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또한 내 중심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로 여호와를 아는 지식,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앎으로서 나의 인격이 변하고, 회개에 합당한 삶, 변화된 삶을 살아서,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를, 다시는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다시는 전쟁의 포성과 도발과 위협이 없는 완전한 평화,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실현시키고 확장시키는 평화의 사도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일꾼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이영화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