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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사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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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사 8:20) 
 
 
오늘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죄’를 가장 쉽게 설명하면 ‘법을 어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인 성경 말씀을 어길 때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입니다. ‘하지 말라’하신 말씀을 행해도 죄를 범한 것이고, ‘하라’ 하신 말씀을 행치 않아도 죄를 범한 것입니다. 죄의 가장 심각한 결과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는 말씀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서도 전혀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죄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즉 하나님 말씀을 어기면서는 하나님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구호는 다시금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자연 세계도 조물주가 계심은 말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어떤 성품과 어떤 뜻을 가지셨는지 말해주지는 못합니다. 이 때문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로 시작하는 시편 19편은 자연 계시를 말한 후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7-10)라며 말씀 계시의 특별함을 노래합니다.

성경만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말해줄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다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므로 인간의 말로 다 설명할 수도 없지요. 하지만 성경은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알아야 할 그분과 그분의 뜻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계시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고 증언하고 있지요.

성도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그 말은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증언과 다른 존재라면 참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닮은 우상’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송아지 우상을 처음 만들었을 때, 하나님을 버리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떠나 다른 종교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이전 계시에서 벗어나서 보이지 않는 분을 볼 수 있도록 형상화한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우상숭배로 여기시고 진노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벗어난 하나님은 우상이며, 성경을 벗어난 기독교는 참 기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도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바르게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벗어난다면 아무리 마음에 감동을 주고 삶에 유익하고 기쁨이 되더라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고후 11:14)한 사단의 속임수이므로 “마귀를 대적”(약 4:7)하듯이 그러한 증언에 대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젖만 먹는 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조차 가르침을 받지 못한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히 5:12). 쉽고 편한 말씀뿐만 아니라 어렵고 까다로운 말씀에 대해서도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변하는” 장성한 자에 이르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히 5:14).

오늘날 교회에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지 않은 구체적인 장래 일, 즉 ‘어떤 계획을 실행할지, 혹은 어떤 것을 선택할지’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합니다. 말씀으로 분별하려기보다 ‘소위 신령한 사람’의 ‘소위 예언 기도’라는 것을 통해서 하려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형통과 곤고라는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전 7:14)하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장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면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아 순종할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습니다(히 1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생을 실수 없이 인도하셨고, 완벽히 보호하셨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우셨습니다. 성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비록 갈 바를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신뢰하며 산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이며 불신자와 구별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장래 일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기도를 해봤더니 당신의 장래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알려줍니다. 얼마나 용하게 장래 일을 맞췄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용한 점쟁이도 많으니까요. 심각성은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을 뒤집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라고 말했습니다(사 8:20). 반드시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과 맞지는 않지만 신령한 일이라 말한다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로 바꾸고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며 하와를 유혹했던 사단의 일과 너무 흡사한 일이지요(창 2:17; 3:4-5).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결국 자기 마음의 생각일 뿐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 23:16)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 대신 평안만을 예언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진노와 심판을 언급하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렘 23:28)고 하셨습니다. 결과가 좋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바른 평가는 결과의 좋고 나쁨을 떠나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맞는지를 확인하는 것을 통해 됩니다.

성도는 알 수 없도록 작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작정적 뜻)에 대해 알려고 집착할 것이 아니라, 당신님의 백성으로 순종하도록 명하신 뜻(교훈적 뜻)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다는 구절 중에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하신 교훈적 명령이 있습니다. 만일 장래 문제로 심히 고민된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지요(마 6:33). 이처럼 명확하게 주신 말씀에 먼저 순종하면서, 지각을 사용하여 현재 상황을 판단하고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하면, 하나님께서 실수 없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채워주실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소비자 시대’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상품과 미디어가 소비자 중심으로 기획되고 재편됩니다. 이런 시대에 살다보면 의식하지 못한 채 소비자적인 태도에 물들기 쉽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자기가 원하는 스타일을 선택하고, 설교도 자기가 원하는 부분만 받아들이게 되지요. 더 심각한 문제는 성경 말씀도 자기가 원하는 것만 취사선택하고 하나님까지도 자기가 원하는 모습만 받아들이려는 태도입니다. 자신의 욕구에 맞는 말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욕구에 맞는 하나님만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태도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무한경쟁 시대에 현대인들은 기본적으로 삶에 지쳐 있습니다. 위로받으며 격려받기 원합니다. 긍정적이고 밝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TV 드라마도 부정적인 결말로 치달을 것 같으면 소비자들은 거센 항의를 합니다. 해피엔딩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추어 결말을 수정하기도 하지요. 이러한 소비자 중심의 시대에 ‘죄’ ‘심판’ ‘회개’를 말하는 설교들은 너무 칙칙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도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희망’ ‘사랑’ ‘평안’ ‘성공’과 같은 설교를 원하고 그런 하나님을 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소비자의 욕구에 따라 수정된 하나님을 전하는 공급자들이 생깁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할지라도 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단정한다면 어떤 인간적인 욕망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권위를 부여한다면, 더 이상 성경은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욕구에 따라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면 자기 마음에 꼭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자기의 입맛에 꼭 맞는 말씀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은 이렇게 인간의 욕망을 투영해서 만들어낸 하나님이 많습니다. 그리고 반쪽짜리 하나님이나 혹은 덧붙여진 하나님을 믿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을 형식적 원리로 강조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첫 항목도 성경입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이며, 그들이 정리한 신조나 구호들이 모두 성경에 기초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성경에 맞추어보지 않는다면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은 사라집니다. 모든 마음의 생각들이 다 옳고 권위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는 주관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세상이 되는 것이지요.

성경은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딤전 6:3-4)라 했습니다. 성도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시 19:10)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른 교훈들이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과 그분의 바른 교훈에 착념하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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