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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 (요 1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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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 (요 14:1-14)
   

우리는 2010년을 보내면서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림절을 맞이하고 있다는 말은 한 해가 벌써 다 지나가고 마지막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대림절(Advent)은 어느 한 주일이 아니라, 성탄절 전의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대림절은 성탄절-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내며, 이제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마음으로 네 번의 주일을 포함해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서방교회에서는 이 대림절을 4세기부터 지켜왔다고 하니, 아주 오랫동안 지켜온 절기입니다.   우리 주님이 수난 받으시고 부활하신 날을 잘 지키기 위하여, 40일간의 사순절을 지키면서 준비하는 것처럼 성탄절을 앞두고 주님을 사모하며,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면서 4주간의 대림절기를 지켰습니다.   

대림절이 되면, 성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면서 촛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촛불은 어둠을 밝히는 것으로, 주님의 탄생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림절 첫 번째 주일에는 진보라색의 초를 하나 켜놓았습니다.  두 번째 주일이 되면 다시 연보라색의 촛불을 하나 더 켜놓습니다.  세 번째 주일에는 장미색의 초를, 네 번째 주일에는 진보라색으로 초를 켜놓았는데, 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습니다.  속죄와 회개를 상징하여 보라색의 초를 사용하고 있으며,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라고 장미색의 초를 사용하였고, 진리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생각하며, 흰색이나 노란색의 초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네 번의 주일을 보내면서 촛불을 밝히고, 성탄절이 되면 5개의 모든 촛불을 밝히게 됩니다.  

고대 교부 중에 터튤리아누스라는 교부가 있는데, ‘대림’이라는 말 라틴어 ‘Adventus’ 라는 말은 “하나님이 예배 장소에 임하시는 것, 도착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대림절이라는 말은 주님의 오심을 대망하는 절기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오심과 다시오심을 대망하면서 보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대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대림절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날’로 지켰습니다.  오늘에 와서는 대림절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며 기다리게 하였고, 또한 예수님을 자기의 중심에 모시고 구원받은 감격을 되새기게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중세교회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기 전에 금식하면서 준비하였습니다.  대림절은 단순히 성탄절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영광중에 다시 오시는 것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기간으로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림절에는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사랑, 아들을 보내어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는 구속의 사랑과 은총을 기억하며 자기의 것으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 1-6을 중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만나는 우리 주님은 어떤 주님이십니까?

1.  평안을 주시는 주님(1)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1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근심’이 떠나지 않습니다.  이 근심이라는 말은 심적인 어려움으로 마음이 뒤흔들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불안과 초조, 두려움, 이 근심이 우리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제자들을 남겨두고 떠나가시겠다고 하시고, 수제자라고 자처하는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제자들은 불안해졌습니다. 유다는 최후의 만찬을 하던 중에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제자들은 마음에 근심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실 것으로 보고 3년씩이나 따라다녔습니다.  세속적인 욕망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출세도 하고, 명예도 얻으리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겠다, 어디론가 떠나가신다고, 제자들이 부인할 것이라, 더 나아가 한 제자는 배반할 것이라고 하시니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고 두려움이 엄습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어디론가 가시고 나면 오합지졸의 제자들만 남게 될 터이니 불안해집니다.  갑자기 외로운 고아가 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지’, ‘지금까지 주님을 따라다녔는데 이제는 무엇을 하지’불안해집니다.  현대인들은 심리적으로 불안을 떠안고 살고 있습니다.  이 거친 사회를 살아가면서 능력 발휘하면서 앞서 나가도 불안합니다. 

이 험한 경쟁 사회에서 뒤처지고 낙오될까봐 많은 젊은이들이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면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닌가, 잘 나가는 동창을 보면 기가 죽어서 동창회도 나가기가 두렵습니다.  

현대인들 중에 공황장해를 경험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불안증상, 극도의 공포심이 일어나면서 심장이 터지도록 빠르게 뜁니다.  숨이 차며 땀이 납니다.  이러다가 죽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듭니다.  공황장해가 광장공포증을 동반합니다.    여행을 갔는데, 외국에서 큰 광장에 혼자만 떨어져 미아가 되면, 극도의 혼란에 빠져듭니다. 광장 공포증이 몰려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왜 그렇게도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진 사람은 가진 것을 지키느라고 스트레스요, 조금 가진 사람을 더 가지고 싶어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아는 것을 다 써먹지 못하여 불안합니다.  나는 안 된다, 못한다, 못해신앙이야, 이런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불안해집니다.  불안초조, 두려움이 사로잡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약간의 스트레스는 약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전혀 부담이 없다면, 인생을 어떻게 의미 있게 살아갈 것입니까? 

아시안게임에서 마라톤에 우승하여 금메달을 목에 건 지영준선수의 고백을 들어보았습니다.  “먹여 살릴 처자식이 생기니까 남들보다 한걸음 더 뛰어야 했습니다.”세상에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너무나 솔직한 소감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큰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마음이란 우리 인간의 지성, 감정, 의지의 중심이며 속사람이며 인간의 진솔한 내면세계입니다.  그런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근심을 중단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근심을 품고 있으면 영적인 치명상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이 말씀은 마음에 평안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런 근원에 불안을 심고, 근심을 쌓는다면 영적인 절망에 이르게 됩니다.  

잠4:23에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평안을 불러오고, 긍정을 불러오고, 감사를 불러오면 그는 생명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은 명령문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평서문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카리스 주석에는 4가지의 다른 번역을 내놓을 수 있다고 합니다.  1) “너는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는다” 평서문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2) “너희는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 평서문과 명령문을 연결시켜본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믿으라. 또 나를 믿으라”  이것은 완전히 명령문으로 번역합니다.   4) “하나님을 믿으라.  그러면 너희는 나를 믿는다.” 이것은 명령문과 평서문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3번째의 번역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고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유명한 불트만이라는 신학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분위기와 문맥을 연구하면서 “너희가 하나님을 믿느냐 그러면 또한 나를 믿으라”라고 의역하기도 합니다. 

새번역에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개정판에서는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고 했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현재 명령법으로 계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이 명령문이기 때문에 뒤 따라오는 문장도 명령문으로 말씀하신 것을 보아야 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어라. 또 나를 믿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에 나온 문장이 부정명령문이기 때문에 뒤에 오는 말씀은 긍정명령문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는 참 평안을 주시고 있습니다.  요14:27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예수님은 요16:31에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집을 수리하면서 지붕에 올라가 일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들 녀석이 마당에서 놀다가 “아빠 나도 올라갈 거야.  나 올라가면 안 돼?”  “사다리 타고 올라오면 돼 올라와봐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신이 나서 사다리를 붙잡고 지붕으로 올라가는데, 아래 땅을 쳐다보니 무섭습니다.  은근히 겁이 났습니다.  사다리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다리가 후둘 거립니다.  이제는 올라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려갈 수도 없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소리칩니다.  “얘야, 아빠만 쳐다보고 올라오면 돼, 땅 아래 쳐다보지 말고, 아빠만 쳐다보고 올라오라는 말이야!”하고 소리칩니다.  

그 말에 아들은 아빠를 쳐다보는데, 아빠가 환히 웃으면서 올라오면 손을 붙잡아준다고 팔을 내밀고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쳐다보는 순간 모든 두려움은 다 사라지고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기어오르다보니 지붕에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문제들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몰려올 때면, 우리는 위를 쳐다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붙잡아주시고, 문제에서 끌어올리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바라보는 시선이 주님에게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대언의 기도,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우리 편에 서 계십니다.  

모든 염려 근심을 주님께 맡겨버리셔야 합니다.  벧전5:7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눅1:37에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마19:26에서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근심을 그만하라, 중단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넘실거리는 물결을 바라보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2.  천국을 주시는 주님(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습니다.  이 세상이란 잠시 잠깐이요, 우리가 죽은 후에 살아갈 세상은 영원합니다.  영원무궁합니다.  한 없이 오래 삽니다.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거처, 천국을 허락해주시고, 그 천국을 예비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영원히 살아갈 거처를 예비해주시고 선물로 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거한다”는 말은 머무르다, 거주한다, 산다는 ‘메노’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거할 곳”이란 ‘거할 장소’, ‘방’, 흠정역에서는 ‘맨션’(mansions)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적은 집이 아니라, 궁궐 같은 저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선생님 예수님과 떨어져 있지만, 앞으로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갈 저택들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많다고 하신 말씀, 우리 주님이 많다고 하신 말씀은 조금 많은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 많다는 표현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을 말씀합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상상초월입니다.  그 많은 거할 곳을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신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의 집에 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목숨만 연명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 구주 예수님과 풍성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목적은 풍성한 교제가 있는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들어가서 주님이 약속하신대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이 계신 그곳에 우리도 영원히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하여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재림은 318번이나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미 그 준비가 끝나 있어야 합니다.  대림절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 성령의 등불을 준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3.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6)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집과 있을 곳을 예비하시러 가셨다가 자기 백성들을 데려가기 위하여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의심이 많은 도마가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유명하신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예수님 이후에 이런 말씀을 반복하신 분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길이 아니라, 오직 한 길,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내가 길이다”라고 말씀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는 길이 있는 것 같지만, 다 실망하고 중도에 끊어진 길이요, 아예 처음부터 그 길은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의 길 그 자체가 되어주십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시는 유일한 길, 십자가는 죄악으로 벌어진 간격을 이어주고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다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계시이십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참된 자유함을 주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하나의 참된 진리를 발견하였고, 그 진리를 터득하였고, 그 진리를 소유하였다고 하면 우리는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요1:14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셨습니다.  

요8:31-32에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진리요, 영원한 진리라고 깨달았다면 그것으로 모든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함이 주어집니다.  

지금까지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진리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 앞에 서고 보니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려오신 말씀이요, 진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세상의 많은 선생들은 진리를 이럴 것이라고 가르쳤지만, 우리 주님은 당신 자신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진리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생명이십니다.  우리 주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고 있습니다.  저는 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보니, 사실 세상에 있는 부귀영화가 부럽지 않습니다.  세상의 잘 사는 사람도 부럽지 않습니다.  그들이 생활의 편리함을 있을지 모르나, 진정한 평안이 넘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천국을 약속하셨고, 그곳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십니다. 구원받은 감격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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