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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과 영성의 모델이 되십시오! (왕하 22:1-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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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영성의 모델이 되십시오! (왕하 22:1-23:23)
 

1. 여러분의 인생과 신앙의 모델은 누구?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란 책의 저자인 ‘나카타니 아키히로’는 20대에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원하는 인생의 모델을 찾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인생의 모델로 삼은 사람이 있고, 그의 발자국을 쫓아가다 보면 자신이 갈 길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즉 인생의 모델로 삼은 사람이 있고 그를 따라가다 보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죠. 

이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미국 소설가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이 지은 『큰 바위 얼굴, The Great Stone Face』입니다. 자기 마을에 있던 ‘큰 바위 얼굴’을 늘 바라보면서 자신도 그런 인자하고 덕스럽고 존경받는 인물이 되고자 했던 어네스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큰 바위 얼굴과 닮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바라보고 따라가다 보면 닮는다는 것이죠. 따라서 ‘삶이나 신앙의 모델을 누구로 하느냐’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자신의 삶의 모델을 정하여 그를 잘 따랐던 사람들의 성공담이 정말 많습니다. 광야 이후, 가나안 정착 시기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여호수아의 모델은 모세였습니다. 유다 列王들의 모델은 다윗이었습니다. 엘리사의 모델은 엘리야였습니다. 그리고 의사 누가와 청년 디모데의 모델은 바울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괜찮은 모델을 정하고 그들을 잘 따름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지요.

오늘 본문도 여러분의 신앙과 삶의 모델로 삼기에 충분한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시야입니다. 도대체 그가 어떤 신앙을 가졌고, 또 어떻게 살았기에 여러분의 삶과 신앙의 모델이 될 만한 지 본문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신앙과 삶의 좋은 모델 요시야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의 남은 반쪽인 유다 나라의 왕으로서 꺼져가는 유다 나라를 되살리기 위한 마지막 불꽃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겨우 여덟 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신하들에 의해서 왕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는 몰라도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아버지를 죽인 원수들에 대해 보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악하고 무능해도 아버지는 아버지이니까요! 그런데 그 아버지를 죽인 신하들에 대해서 그가 보복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시작부터 다음과 같습니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2).” 성도 여러분, 이것은 정말 대단한 평가입니다. 왜냐하면 열왕기상하서에 기록된 많은 왕들 가운데 이런 평가를 받은 왕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윗, 15장 11절의 아사, 18장 3절의 히스기야, 22장 43절의 여호사밧,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시야가 전부입니다. 

➊ 그렇다면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 이 말의 의미는 요시야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었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어린나이에 왕이 되었다는 것, 아버지를 죽인 원수들이 현재 자신의 신하로서 자기 앞에 있다는 것, 그리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이 어둡고 불안하다는 것 등도 사실 그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 나라의 왕이자 한 아버지의 아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에게 더 우선이고 더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선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리고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것이 그의 삶의 기준이었다는 뜻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나 자신이 보기에 옳은 것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실 때 옳다 인정하실만한 삶을 살았다는 뜻이지요. 

성도 여러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늘 의식하는 삶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요? 아마 여러분은 경험을 통하여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사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살면서 상대방을 우선으로 하고, 상대방이 인정하는 삶을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가장 우선으로 하고, 항상 그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그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 어떻게 말처럼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따라서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➋ 두 번째로 요시야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양궁 하는 장면을 보셨지요? 목표점을 향하여 활을 쏘는데 과녁에 그대로 가서 맞아야지 좌로 치우치든 우로 치우치든, 아니면 위쪽이나 아래쪽에 맞아도 안 됩니다. 목표와 그 가까이에 맞아야만 점수가 높기 때문입니다. 요시야가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뜻은 그가 오직 하나님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서 한 치의 벗어남이나 오차도 없는 삶을 살았다는 뜻이며, 조상 다윗이 산 그대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지요.

➌ 세 번째로 요시야는 “성전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3절 이하에 보면,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성전에 보내며 이르되 너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올라가서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 드린 은 … 을 계산하여 성전에 부숴진 것을 수리하게 하라.” 고 명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구약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성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시편에 나오는 성전 순례자들을 보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은 곧 성전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요시야 왕은 그동안 소홀했던 성전을 수리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가 이렇게 성전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인 것은 성전 그 자체, 즉 건물로서의 성전에 대한 관심도 있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예배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즉 그는 예배를 사모하는 사람, 예배에 대해서 남다른 갈망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당시 유다나라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 하는 것이 온 나라와 백성들의 삶에 가득했었고 심지어 성전 안에까지 우상이 세워질 정도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새롭게 하고 예배를 회복하려는 그의 열심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와 같이 하나님의 집을 향한 열심, 예배를 향한 갈망이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삶에서 우선적인 것이 되고 있습니까?

➍ 그런데 여러분, 이 정도만 해도 요시야 왕은 全心으로 하나님을 경외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말씀을 듣고 보인 반응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을 수리 보수하라”는 왕의 명을 받고 성전을 수리하던 대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 즉 모세오경을 발견했습니다. 

이 율법책을 힐기야는 서기관 사반을 통해서 왕에게 보냈습니다. 율법 책을 받은 사반은 요시야에게로 가져가서 그 앞에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책의 말씀을 듣던 요시야의 반응이 특별합니다. “왕이 율법 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11).” 여기서 그가 옷을 찢었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했다는 뜻입니다. 그때까지 요시야는 율법 책을 직접 보지도 못했고, 그 말씀을 직접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늦은 감이 있지만 율법 책이 발견되고 그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율법과 다른 삶을 살았는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옷을 찢으면서 괴로워했던 것이죠. 그뿐 아닙니다. 13절 말씀,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라고 절규했습니다. 즉 율법을 알고 보니 자신과 조상들과 현재 백성들이 얼마나 죄가 크고 많은 지, 그리고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지를 비로소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괴로워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주목해야 할 것은 말씀 앞에 선 요시야의 태도입니다. 만약 성전에서 율법 책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요시야는 어땠을까요? 당연히 옷을 찢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자신과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震怒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성전 수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난 후 깨끗해진 성전을 바라보면서 보람을 느꼈을 것이고, 자신의 업적에 대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요시야는 율법 책을 발견하기 전까지 산당과 아세라 목상 등 모든 우상을 제거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열왕기하에서는 율법 책이 발견된 것이 먼저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역대하서를 보면 우상을 제거한 일이 먼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 책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도 탁월하게 뛰어난 신앙인이었다는 것이고, 그가 유다의 종교개혁을 이룬 것에 대해 충분히 만족할 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요시야가 우상을 제거하는 일에 온 힘을 쏟을 때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시야는 자신의 죄악을 보지 못했고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진노 또한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 책을 발견하게 하심으로써 요시야로 하여금 자신을 하나님의 눈으로, 말씀으로 바라보게 했고, 그 결과 자신만이 아니라 유다 나라 전체가 얼마나 악한지, 그래서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지를 보게 하시고, 그것 때문에 옷을 찢을 정도로 애통하게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자신이 어떤지,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잘 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설 때 자신과 자신의 삶과 주변을 바로 보게 되는 것이죠.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 앞과 예배의 자리에 나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말씀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고 여러분의 죄를 봄으로써 痛悔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바를 생각하면서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성수 잘 하고, 봉사에 빠지지 않으며, 성경보고, 기도생활하려고 노력하는 것만 해도, ‘이 바쁘고 각박한 세상에서 얼마나 잘 하는 것이냐!’ 하고 스스로 만족해 합니다. 그러나 그런 만족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과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삶을 방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하나님 앞과 예배 자리에 서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자신의 선행이 보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된 예배의 자리에서 살아나는 것은 자신의 죄와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신령과 진정으로 참되게 예배드리고 있는 사람은 옷을 찢고 통회하는 심령이 됩니다. 그 어떤 종교적인 선행이 있다 해도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은혜 아니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 심판 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에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상태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종교적인 열심은 넘쳐나고 있고, 아름다운 찬양과 부르짖는 기도 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은 시대이지만, 그것마저 자신의 의와 자랑이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모습이 신앙의 길을 바르게 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지만, 그것은 죄가 살아나고 자신이 죽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과는 멀어진 모습입니다. 여러분, 혹시 ‘내가 이처럼 말씀을 잃어버린 상태가 아닌가’를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 온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한 자신을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십시오. 이것이 오늘 요시야가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➎ 요시야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산 사람,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은 사람, 성전과 예배를 사랑한 사람, 그리고 말씀 앞에서 벌벌 떨면서 哀痛해하는 심령의 소유자였습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자의 삶에서 이러한 모습은 반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만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의 가정을, 자신이 살아가는 주변과 지역과 나라 전체를 거룩하게 만드는 일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 요시야 왕은 23장 1절부터에서 보는 대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 즉 나라의 지도자들을 불렀고, 제사장과 선지자 등 종교 지도자들 또한 불렀으며, 모든 백성들을 노소를 막론하고 성전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듣게 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들은 후, 요시야가 단 위에 올라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웠습니다(23:3).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라.” 그러자 모든 백성들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보십시오. 요시야는 율법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이 어떤지,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온 백성을 불러 모아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을 고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려고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 하나 잘살면 된다’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자신과 주변과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요시야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 그리고 23장 4절부터 보면 요시야가 추진한 종교개혁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시야가 단행한 개혁은 참으로 철저했습니다. 성전에 있던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별을 섬기는 데 쓰던 모든 기구들을 내어다가 불살랐습니다. 또한 전국에서 활동하던 가짜 선지자들과 우상을 예배하던 사람들을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에 산재해 있던 산당들도 모조리 치워버리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개혁을 단행한 요시야 왕은 그 개혁의 마침표로서 유월절을 지키게 했습니다. 23장 21절부터 23절,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 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유월절은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기념이요 새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날이었던 이 유월절을 지킴으로서 언약식, 새로운 출발을 결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을 통틀어 처음 행한 왕이라는 명예도 안겨 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이렇게 시작과 끝이 동일할 수 있을까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을 때부터 평생을 한결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고 경건하고 개혁적인 삶을 산 요시야는 정말 특별한 신앙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어두운 시대, 유다가 저물어가는 시대에 왕이 되어 나라를 새롭게 한 요시야의 업적은 칭찬받아 마땅하고 하나님께서 복주실만한 모습이었습니다. 

➏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그의 마지막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삶을 끝까지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시야 왕이 우리 앞에 믿음의 모델이 되는 마지막 이유는 그의 삶의 마지막 모습마저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메시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으면 모든 일이 다 잘 된다’는 투의 말들이 사람의 귀를 솔깃하게 하고, 설사 나중에는 그리 되지 않을지라도 당장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잘한들 그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조건이 되고,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될 수 있을까요? 23장 26,27절을 보면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요시야가 성전을 비롯하여 예루살렘과 온 유다에 가득 찬 우상들을 부숴 버리고, 성전을 수리했으며, 그동안 지켜지지 않던 유월절까지 다시 지키는 신앙 개혁을 단행하여 큰 성공을 이루었는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유다를 향한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요시야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오랜 세월 동안 뿌리 깊이 내려오던 우상과 산당까지 모두 제거하는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여 유다를 바른 신앙 위에 세우는 공로가 있다면, ‘그 공로를 보셔서라도 유다에게 선포하셨던 진노를 거두시지 않을까’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러한 기대를 묵살해 버리고 오히려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확고한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정말 대단한 신앙과 삶을 살았던 요시야에게 개인적인 복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시야에게 어떤 특별한 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복을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젊은 나이에 죽게 했습니다. 요시야가 여덟 살에 왕이 된 후, 31년을 치리했으니, 서른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신앙으로 행한 요시야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복으로 갚아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요시야 왕이 저와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시야의 신앙과 헌신이 유다를 향한 진노를 거둘 수 있는 義가 되지 못한 것처럼, 우리 역시 아무리 뛰어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되거나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요시야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도 어려운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뭐 잘한 것이 있어야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면서 ‘상을 준다. 복을 준다’는 말을 기대할 수 있지요. 그런 잘한 것도 없이 그러한 말을 듣고자 한다면 너무 뻔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신자는 바로 그처럼 뻔뻔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잘한 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복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복을 받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나의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 그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는 생각을 합시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복 주셔서 편안함과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신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의 믿음을 좋으신 하나님께서 무시하실 리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덜 중요하다는 것을 알자는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고 만족하는 신앙, 하나님은 요시야 왕을 통하여 그것을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서 요시야 같은 사람, 믿음의 어른 같은 모습의 사람이 되어보실 생각은 없습니까?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습니다. 左나 右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聖殿을 사랑하고 禮拜를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哀痛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뿐 아니라, 온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에게 주어진 보상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평 한 마디 없이 만족하고 감사한 요시야의 신앙과 삶, 여러분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3. 좋은 모델을 닮아가고, 좋은 모델이 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여성 연주자가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방 벽에는 3명의 연주자의 사진이 걸려 있다고 했습니다. 3명의 연주자들은 이미 세계적으로 정상에 오른 사람들인데, 그 연주자는 항상 그 사진들을 바라보면서 영감과 도전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연습하다가 지치고 힘들면 그 3명의 연주자들 사진을 보면서 나태해지려는 자신을 채찍질하고 새로운 힘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누군가를 모델로 삼으면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더 열심히 노력한다는 말이며, 바로 그런 태도 때문에 그는 계속 성장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의 벽에는 어떤 사람이 걸려 있는지요? 여러분의 인생의 모델은 누구입니까? 

“아버지는 내 인생의 역할 모델이자 오늘의 저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이 말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53세)가 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빌 게이츠 시니어(83세)는 유명 변호사 출신으로서 현재 아들이 세운 302억 달러 규모의 세계 최대 자선기구인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공동 이사장으로 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아들의 삶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 않습니까? 그만큼 빌 게이츠의 아버지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빌 게이츠’의 아버지 ‘빌 게이츠 시니어’처럼 여러분도 자녀들과, 인생의 후배들, 신앙의 후배들에게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그럴 만한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그럴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먼저 여러분들이 성경의 인물들을 모델로 하여 그들을 닮아 가십시오. 특히 그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요시야처럼 신앙하고 그처럼 살려고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만 되면 여러분 주위에는 여러분을 닮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신앙과 삶의 좋은 모델이 되어서 가까이로는 자녀들과 가족들에게, 그리고 인생 후배 신앙의 후배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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