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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인생 (엡 5: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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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인생 (엡 5:15-21)


오늘 우리는 성찬에 참여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전에는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거룩>(聖)이라는 단어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도’가 되고 여러 ‘성회’에 참여하여 ‘성삼위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고 ‘성전’을 출입하고 오늘처럼 ‘성찬’에 참여하고 ‘성령’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 단어들에 등장하는 ‘성’은 바로 ‘거룩’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을 좀 더 세심하게 연구해 보면 이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쓰여지는 도덕적인 의미와는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단어는 본래 원 의미가 ‘구별된다’(set apart)는 뜻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하게 쓰실 목적으로 구별된 존재가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는 구별된 삶을 통해 하나님의 과업을 이루는 일에 쓰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은 구별된 인생, 곧 거룩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세월을 낭비하지 말고 주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16-17절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런 거룩한 인생을 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거룩한 영 곧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8절의 말씀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에 취하면 술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술 취함이 아닌 성령의 충만함 곧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술이 우리를 지배하면 방탕한 삶이 되지만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면 거룩한 삶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무엇을 해야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어지는 19-21절의 말씀은 성령 충만의 결과이면서 조건을 다루는 말씀입니다. 

*자, 그러면 성령 충만하여 거룩한 인생을 사는 비밀, 무엇일까요?

1. 찬양하는 삶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찬양이 마음에서 터져 나옵니다. 찬양은 성령 충만의 분명한 하나의 결과입니다. 반대로 찬양에 몰두하다 보면 성령의 충만함이 임하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이 사라지면 제일 먼저 마음에서 찬양이 사라집니다. 찬양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은 마음으로도 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19절)고 했습니다. 

우라는 주께 노래할 뿐 아니라, 성도들이 모일 때마다 서로를 향한 교제의 방식으로 찬양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시절부터 성도의 교제의 방식이 찬양이었습니다. 그래서 19절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라”고 한 것입니다. 서로 모여 장마비 같은 찬양의 은혜에 젖어 보십시오. 육체와 마음의 병이 사라질 것입니다.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온 마음에 가득해 질 것입니다. 마음에서 시가 태어나고 노래가 태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로 마음이 채워지고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교회 역사는 사람들이 성령에 충만하면 시와 찬미와 노래를 작시하고 작곡한다는 예들을 넘치도록 보여줍니다. 아씨시의 성자 프란치스코가 성령 충만함을 입자 그는 하늘의 별과 달, 태양을 주제로 노래를 만들었습니다.(“온 천하 만물 우러러 다 주를 찬양하여라”는 찬송은 본래 1225년 성 프랜시스의 시/라고 쓰여 있음) 개혁자 말틴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위시한 여러 찬송 시와 곡을 남겼습니다. 

요한 웨슬레와 함께 메소디스트 부흥을 경험한 동생 촬스 웨슬레는 무려 6,000곡의 찬송을 남겼습니다. 시각 장애인 패니 크로스비는 어려서 실명했지만 영적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무려 8,000여개의 찬송시를 남기게 됩니다. 음치인 저도 예수 믿고 너무 기뻐 주일 학교 어린이들을 지도하다가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성경보고 밥 먹고 성경보고 잠자고 성경보고 일하면 하나님이 축복해/기도하고 밥 먹고 기도하고 잠자고 기도하고 일하면 하나님이 축복해/찬양하고 밥 먹고 찬양하고 잠자고 찬양하고 일하면 하나님이 축복해!”

2. 감사하는 삶입니다.

그 무엇보다 거룩한 인생을 살려면 감사하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감사는 성령 충만의 조건이며 결과입니다. 성령 충만을 상실한 즉각적인 현상은 내 입에서 불평이 나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모든 일에 감사하고 싶어집니다. 문자 그대로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내가 좋아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하면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개입을 믿고 알기에 감사하게 됩니다. 

20절을 읽어 보십시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기 우리의 관심을 주목하는 것은 ‘범사’라는 단어와 ‘항상’이라는 단어입니다. 모든 일에 그리고 모든 때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우리의 선배는 이런 감사를 <절대 감사>, <무조건적 감사>(unconditional thanksgiving)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죄나 악 그 자체에 대하여 감사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금번 평화로운 연평도 섬을 포격한 북한의 도발과 억울한 희생의 죽음 그 자체를 감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분명 이 사건은 악한 사람들에 의해 기획된 악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저는 최근 아침 묵상을 하면서 이 사건을 허용하신 신의 뜻을 알고 감사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만일 이 사건이 신을 제거해 버리고 종교를 아편으로 가르치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악한 체계인가에 대하여 오늘의 순진한 젊은 세대를 가르쳐 깨울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경각심을 갖고 보다 현실적으로 나라를 지키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면 감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고백을 하다가 롬8장을 찬양과 감사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악하고 역겨운 고통의 사건까지도 마침내 하나님의 선을 이루도록 주께서 개입하고 일하실 것이 확실하다면 이런 일조차도 찬양하고 감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3. 복종하는 삶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거룩한 인생은 서로가 서로에게 복종할줄 아는 삶입니다. 우리 시대는 오늘날 반항을 미덕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반항이 한번 삶의 스타일이 되면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된다 해도 섬기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는 이미 반항과 거스림에 너무 익숙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우리들 성도들의 각자의 삶의 주인이 그리스도임을 고백한다면 서로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의 인도하심을 믿고 서로에게 복종함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21절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에 복종하라” ‘피차를 향한 복종’은 섬김의 공동체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여기서 복종을 좀 더 현대적인 단어로 바꿀 수 있다면 ‘예의 바른 존경’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예의바르고 공손하게 대하십시오.”(메시지, 21절) 이런 서로를 향한 예의바름과 공손함이야 말로 성령 충만한 삶의 태도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태도로 모든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면 그리고 가정의 삶을 만들어 갈수 있다면 우리의 가정의 모습 얼마나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감사의 주인공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우연히 책을 읽다가 이분의 이름이 시선을 끌었습니다. 

미국 위스컨신 주에 살던 이분의 이름은 Mr.Stillwater(고요한 물가)였습니다. 그의 별명이 <감사 집사>(Deacon Thanks)이셨습니다. 늘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사람들과 대화할 때마다 “감사하지요”가 그의 일상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그의 아내 되신 분이 치매(알츠하이머)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의 감사의 미소, 감사의 언어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이 요양원에 보내자고 했지만 자신이 돌보고 싶다고 거절하고 정성스럽게 돌보았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가족조차 몰라보게 되자 자식들의 강권으로 치매 환자 요양원에 보내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의 일상은 아침에 요양원으로 출근하여 하루 종일 아내 곁에 머물며 아내와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병이 조금 더 깊어지면서 마침내 아내가 남편조차도 몰라보게 됩니다. 그러자 그가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평생에 감사하며 살았는데 아내로 인하여서도 더욱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아내의 병이 낫지 않아도 좋으나 한번만 옛날처럼 아내가 저를 알아보고 ‘여보’(honey, sweet heart)라고 부르게 해 주셔요.” 그리고 아침마다 아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요양원에 도착할 때마다 기적이 일어났는가를 확인합니다. “나, 누구?” 그러면 “아이스크림 선물하는 좋은 아저씨”라고 답합니다. 감사 집사님이 기도합니다. “주님, 정말 제 기도 안 들어 주시나요?” 이 기도를 한 순간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칩니다. 성령의 생각,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요양원 채플을 지도하는 목사님을 찾아 다가오는 성탄절에 자기 아내와 자기를 위해 결혼언약 갱신식을 올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결혼식을 하고 나면 자기 아내가 다시 자기를 ‘여보’라고 부를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내 에게 결혼하자고 조릅니다. 그 말만 나오면 “아니”라고 고개를 흔듭니다. 마침내 비장의 무기를 꺼냈습니다. “아이스크림 안 사주겠다고.” 그랬더니 ‘OK’ 하더랍니다. 드디어 성탄 오후 조용한 저녁에 목사님이 가족들만 입회한 자리에서 신랑과 신부에게 결혼 서약을 시킵니다. “당신은 당신 곁에 선 이 사람을 자신의 배우자로 삼아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건강하든지 병들든지 변함없이 당신의 남편/아내로 사랑하기로 서약하십니까?” 한참 만에 할머니가 “예”라고 대답합니다. 그때부터 정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자기 남편을 볼 때마다 ‘여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한 6개월을 살다가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할아버지, ‘감사 집사님’이 인사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달리 드릴수가 있겠습니까? 저의 아내를 향한 마지막 소원은 아내가 나를 한번만 더 ‘여보’라고 부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는 저를 ‘여보’라고 불러주었고 제 곁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이 소중한 친구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함으로 사는 거룩한 인생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남긴 거룩한 삶의 자취가 아니겠습니까? 그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고 잔을 돌리시며 감사를 드리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그날 밤 예수께서 제자들과 찬양을 부르며 만찬장을 떠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조용히 십자가를 지시고 말없이 골고다의 언덕으로 가십니다. 그 행보는 인류 구원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한 복종의 발걸음이셨습니다. 털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 양처럼 말입니다. 이 감사와 찬양, 그리고 복종으로 삶을 마무리하신 예수, 우리가 바로 그의 제자라면 이 감사의 계절 우리의 남은 삶도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의 영이신 성령의 다스림을 따라 찬양의 삶, 감사의 삶, 그리고 복종의 거룩한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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