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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우리를 회복시켜 주소서 (시 80: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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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회복시켜 주소서 (시 80:14-19)


[만군의 하나님, 우리에게 돌아오십시오.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보살펴 주십시오. 주님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이 줄기와 주님께서 몸소 굳세게 키우신 햇가지를 보살펴 주십시오. 주님의 포도나무는 불타고 꺾이고 있습니다. 주님의 분노로 그들은 멸망해 갑니다. 주님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 주님께서 몸소 굳게 잡아 주신 인자 위에, 주님의 손을 얹어 주십시오. 그리하면 우리가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니,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시오. 만군의 하나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우리가 구원을 받도록,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나타내어 주십시오.]

• 라멕의 노래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참으로 뒤숭숭한 가운데 한 주가 지나갔습니다. 평화롭던 연평도 마을에 떨어진 폭탄은 우리가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생때같은 우리 젊은이들이 죽었습니다. 착하고 어질던 가장들도 죽었습니다. 촛불 하나씩을 밝히는 마음으로 그들의 이름을 호명합니다. 

서정우 하사, 문광욱 일병, 김치백 님, 배복철 님. 예기치 않은 시간,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주님께서 품에 안아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중경상을 입은 많은 이들의 몸과 마음이 속히 치유되기를 기원합니다. 대대로 생업을 일구어오던 땅이 공포의 땅으로 변해 졸지에 실향민이 되어버린 연평도 주민들에게도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자녀들을 군대에 보낸 이 땅의 수많은 부모들에게도 주님의 평강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번 사태에 대한 정치적인 분석을 할 능력도 여유도 없습니다. 다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것은 반인륜적인 폭거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적대행위라는 사실을 지적할 뿐입니다. 성경은 에덴 이후 인간의 역사가 형제간의 갈등과 반목의 역사임을 보여줍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서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뱃속에서부터 다퉜습니다. 요셉과 형제들은 서로 반목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모듬살이가 빚어내는 갈등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가인의 5대손인 라멕의 노래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창4:23-24)

이 노래는 지금도 도처에서 들려옵니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인 것은 갈등을 폭력으로 푸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갈등의 상황 속에서도 공존을 모색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없애셨다고 말합니다. 그분 안에서 새 사람이 될 때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분단의 땅, 인류의 모순이 집적된 땅 한반도의 운명을 슬퍼하다가 만난 것이 오늘의 시입니다. 

• 절망의 나락에서 

이 시가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시인과 그가 속한 공동체는 지금 상당히 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2절에서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시인은 북 왕국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시는 앗시리아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하던 주전 8세기 전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시를 바벨론에 의해 남왕국이 멸망한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시기야 어떻든 지금 시인과 그의 동족들이 처한 상황은 절박합니다.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은 무너졌고, 인심도 흉흉합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 절박함은 이 시에 사용된 동사들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주님의 능력을 떨쳐주십시오.”
“우리를 도우러 와 주십시오.”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우리에게 돌아오십시오.”
“보살펴 주십시오.” 
“주님의 손을 얹어 주십시오.”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시오.”

연평도 주민들의 마음이 이러할 것 같습니다. 돌아가 불에 타고 무너진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울 엄두는 나질 않고, 앞으로 살아갈 방도는 더욱 막연합니다. 두고 온 집짐승들이 눈에 밟히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추운 겨울을 어찌 나야 합니까? 형편이 이런 데도 하늘은 여전히 청명하고, 새들도 무심하게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잠시 놀랐던 사람들은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재빨리 이전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하나님도 그들을 외면하시는 걸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기도를 노엽게 여기시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 백성이 눈물의 빵을 먹고 눈물을 물리도록 마시기까지 버려두시고, 이웃의 시빗거리가 되게 하신단 말씀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이 깊은 회의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절망을 통하지 않고는 오는 법이 없습니다. 시원한 샘물은 땅을 파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선 순간입니다. 나치가 지배하고 있던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에서 유대인 고아들을 돌봤던 야누스 코르착(Janusz Korczak)은 마침내 아이들을 떠나보낼 시간이 다가오자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하나님을 줄 수 없다. 너희는 영혼의 고요함 속에서 그분을 찾아야 한다. 나는 너희들에게 인간의 사랑을 줄 수 없다. 용서 없이는 사랑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서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배워야 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 진리와 정의의 삶에 대한 갈망이 그것이다. 그것은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아도 너희가 끈질기게 갈망한다면 결국 보게 될 것이다.”
(Jonathan Sacks, [To Heal A Fractured World], p.69) 

그는 결국 200여 명의 고아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아이들은 어쩌면 야누스 코르착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 하나님의 세 얼굴 

이 시에서 하나님은 세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첫째 얼굴은 목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목자’(1)라고 부릅니다. 여전히 앞길은 캄캄하고 희망의 불빛은 가물거려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리라는 확신을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의식 속에는 출애굽사건에 대한 기억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애굽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도 잘 알고 있었고, 넘실대는 홍해가 어떻게 갈라져 길을 냈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도, 반석에서 솟은 물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확신이 있기에 시인은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릅니다.

이 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두 번째 얼굴은 전사(warrior)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네 번이나 ‘만군의 하나님’(Yahweh Sabaoth 4,7,14,19)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자유를 찾아가는 그들의 고달픈 여정에 동행하시면서 그 백성의 편에 서서 싸우시는 분이십니다. 지난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잠시 그들을 외면하고 계시지만,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오는 어머니처럼 전사이신 하나님은 결국은 그 백성을 구하기 위해 달려올 것이라고 시인은 믿고 있습니다. 

불의한 자들과 싸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싸우라고 하면 사람들은 늘 먼저 바깥의 적부터 살핍니다. 하지만 진짜 전사는 자기 속에 있는 적과 먼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우리들 속에 있는 두려움, 편협함, 증오, 차별의식 등과 먼저 치열하게 싸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군사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 번째 얼굴은 농부이십니다. 시인은 농부이신 하나님이 애굽 땅에 있던 포도나무를 뽑아다가 약속의 땅에 심으셨다고 말합니다. 정성을 다해 심고 가꾸신 덕분에 누가 보아도 멋진 포도원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산들이 포도나무 그늘에 덮이고, 울창한 백향목도 포도나무 가지로 덮일 정도였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의 전성기였습니다. 국경도 확장되고 물질적인 풍요로움도 누렸습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힘과 아름다움에 도취되면서 그 포도원은 주인이 누구인지를 잊고 말았던 것입니다. 망자존대妄自尊大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손을 거두자 포도원의 울타리는 무너졌고, 포도나무 가지는 잘려나갔고, 포도원에는 불이 났습니다. 결국 지나가는 사람마다 들어와 열매를 따먹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그들은 자기들이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되는 때입니다. 내 힘으로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파멸의 씨가 파종됩니다. 

• 회복의 꿈

이런 현실을 목도한 시인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동족을 새로운 공동체로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집단 혹은 공동체를 뜻하는 단어가 여러 가지입니다. 암am은 일종의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반 만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 공동체도 어떻게 보면 am이라 할 수 있습니다. 케힐라kehilla는 다양한 집단들의 모임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들은 어떤 일을 집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모인 임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공동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협력합니다. 

뜻만 맞으면 아주 신명나게 일을 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어중이떠중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기다리다 못해 금송아지를 만든 사람들이 그 예입니다. 에다edah는 공동의 목적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에다라는 말은 ‘증언’을 뜻하는 ‘에드ed’에서 유래된 말인 데, 공통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즉 언약백성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란 am 혹은 kehilla에서 edah로 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새로운 이스라엘’로 세우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이고 어머니이신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의 사랑을 나누며 사는 새로운 세상의 모델이었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모두가 자기 이해에 따라 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가장으로 모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오늘의 시인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다면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은 망자존대하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시인의 간절한 소원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죽으면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으니 살고 싶다는 바람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살고 싶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집은 살림의 현장입니다. 우리가 어떤 집에 들어가 보면 즉시 그 집안의 살림살이가 규모가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집안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식구들이 두루두루 평안하고 표정이 밝으면 그 집 살림이 튼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풍족한 집이긴 한데 뭔가 어수선하고 집에서 이상한 냉기가 흐른다면 그 집 주인의 살림살이는 그다지 맵짜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님의 집을 잘 가꾸고, 주님의 식구들을 돌보고 보살펴야 합니다. 경쟁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모두가 이기적이고 야수적으로 변해갈 때도,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곳임을 일깨우는 사람들, 선善의 희미한 가능성을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들, 성도들은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교회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건강해질 겁니다. 

곳곳에서 분쟁의 소식이 들려오고, 한반도에도 긴장의 먹구름이 자욱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면, 목자이신 주님이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전사이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농부이신 주님이 오늘도 우리 가슴에 선의 씨앗을 심어주십니다. 평화의 세계에 한 달음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지금 울면서라도 평화를 선택하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은 밝아질 것입니다. 어둠이 지극해도 우리는 대림절 초에 촛불을 하나씩 밝히며 우리 가운데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님과 더불어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될 것입니다. 이 희망으로 이 냉랭한 세상에 온기를 가져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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