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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싸안는 다윗의 마음 (삼하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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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안는 다윗의 마음 (삼하 9:1-8)
  

‘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대량실업시대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외국인들의 눈으로 볼 때 부지런하지만 가족을 제외한 이웃들에게는 인색한 한국인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한참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자기 가족에 대하여 끔찍하게 생각하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는 냉정한가?’ 
‘우리가 이렇게 부지런을 떠는 것은 고작 내 가족을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한 것에 불과한가?’
오늘 우리 주변의 삶들을 돌아볼 때 이런 주장에 대하여 아니라고 반박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솔직한 고백입니다!

성경에 보면 말세의 특징 중의 하나가 ‘무정한 것’입니다. 
딤후 3:1,3절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롬 1:31절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정이 메마른 시대, 눈물이 메마른 시대, 감정이 메마른 시대에 우리는 무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식학생, 지하철역에서 새우잠을 청하는 노숙자들의 얘기가 익숙해져가는 이 시대야말로 긍휼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왕이 정적이었던 사울왕의 후손들의 존재 여부를 묻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왕이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과의 약속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절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요나단과 다윗왕은 어떤 약속을 했습니까?
그 내용이 삼상 20장에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반대편에 서 있는 입장이었지만 서로를 위해 축복하는 사이였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한 말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삼상20:15-16절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다윗왕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생각하고 ‘은총을 베풀리라.’고 말했지만 듣는 사람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왕의 가문과 관계가 있는 시바라는 사람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3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여러분, 이 대답에서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이 사람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결코 다윗왕의 적수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다윗왕은 이 사람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됩니다.’라는 설명을 애써 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나요? 
다윗왕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태평성대라 할지라도 정적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상황에 따라 불안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사울왕의 손자 므비보셋은 장애인이지만 사울왕가의 후손으로서 장래에 큰 정치적인 화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듣는 사람에 따라 다윗왕이 그런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려고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왕의 본심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7절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
다윗왕은 몰수된 사울왕의 모든 재산을 그의 손자 므비보셋에게 상속시켜줍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항상 자기 식탁에서 먹게 함으로 아들처럼 대우해줍니다. 
다윗왕은 정적을 싸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왕의 긍휼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본문 삼하 9장에는 ‘은총을 베풀리라.’는 표현을 반복함으로써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집니다. 
1절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3절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7절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그 메시지란 ‘긍휼이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1. 산상수훈에 보면, 예수님께서 ‘긍휼’에 대한 교훈을 하셨습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7)
긍휼이란 무엇입니까?
희랍어로 ‘엘레에모네스’로서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한글사전에는 ‘불쌍히 여김’이라고 풀어놓았습니다.

2. 그러면 어떻게 긍휼을 베풀까요?

잘 들으시고 삶에 적용하시길 바랍니다.

1) 받는 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베풀자.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베풀면 오히려 그것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모욕감을 주고 괴로움을 끼칠 수 있습니다.

두 종류의 긍휼이 있습니다.

① 동정(sympathy)- 윗자리에서 아랫자리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에는 감정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기만 합니다. 
베푼 자의 입장만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② 공감(empathy)- 아랫자리로 내려와서 같은 자리에서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감정이 공감되어 서로 왔다 갔다 합니다. 
받는 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성탄절에 고아원을 방문하여 위문품을 앞에 놓고 고아원생들과 사진을 찍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긍휼임에는 분명하지만 고아원생들의 자존심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동정’한다고 합니다. 
동정은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고아원에 관하여 쓴 책들을 보면, 고아원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위문품을 앞에 놓고 사진 찍는 거랍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입을 비죽거리면서 ‘야, 사진 박아주러 가자!’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상시 고아원을 자주 방문하여 그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놀아주고,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면서 같이 울고 웃는다면 그것은 ‘공감’이 되는 것입니다.
공감은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보십시오! 
우리가 왜 그렇게 예수님을 좋아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자리인 낮은 자리에 내려오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저 천상에서 우리의 사는 모습을 보시고 야단이나 치시고, 책망이나 하셨다면 저는 예수님에 대하여 크게 매력을 못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 오셔서 일찍 여윈 아버지 대신 가족을 거느려 보셨고,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을 받아보셨고, 채찍도 맞아보셨고, 문둥병자의 손도 잡아보셨고, 눈물도 흘려보셨고, 백성들의 하릴없는 삶에 답답해하시기도 하셨고, 마지막에는 죽음의 공포도 겪으셨고.........
복음서를 읽노라면 그냥 생각이 통하고, 말이 통하고, 삶이 통합니다. 
공감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긍휼은 받는 자의 입장을 헤아리고 베푸는 것입니다. 

2) 즉각적으로 베풀자

약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도를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겠다고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도를 나중에 따르겠다고 미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중에 하겠다.’, ‘정신적인 여유가 있을 때 하겠다.’, ‘아이들이 다 크면 하겠다.’, ‘집을 산후에 하겠다.’는 이유로 긍휼 베푸는 것을 미루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장례식에 참석할 기회가 많은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가장 많이 슬피 우는 자식은 불효한 자식일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님의 속을 무진장 썩인 자식이거나, 가출했다가 부모님의 사망소식을 듣고 온 자식이거나, 아무튼 살았을 때 효도 못한 자식이 후회하면서 슬피 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효도도 마찬가지이지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전화도 자주 드리고, 용돈도 넉넉히 드리고, 선물도 해드리고 해야 효자지 오늘내일 미루다가, 차일피일 미루다가 부모님 돌아가신 다음 울면 그게 뭐냐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집안으로 시집을 간 어느 며느리가 제사 때문에 많은 신앙적인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문제를 덕스럽게 해결할 수 있을까를 기도하면서 성경을 보다가 롬 12:1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 구절을 보다가 ‘제물’이라는 말이 눈에 번쩍 뜨이는데, 산제사를 드리라는 거지요. 

이 믿음이 좋은 며느리는 앞 뒤 구절은 생각지 않고 그저 ‘산제사’라는 단어만 보고 ‘아 기독교 제사는 살아계실 때 드리라는 말이구나!’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생신 때, 결혼기념일 때, 윤순회갑 때, 은혼식 때…아무튼 기념될만한 때만 되면 상다리가 부러지게 제사상을 차리는 거예요. 
그랬더니 이 시부모님들이 감복해서 ‘이제 네 식대로 하라, 네 식이 참 좋구나.’ 하시더랍니다. 
꾸며낸 얘긴지 아니면 진짜로 있었던 얘긴지는 모르지만 살아계실 때, 즉각적으로 베풀라는 메시지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크리스천 스타트’라는 책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미국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나눠라!’입니다. 일본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입니다. 한국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기죽지마! 네가 어디가 못 났니!’입니다.”
그리스도인인 당신이 자녀에게 가장 많이 해야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말라!’

3) 주님으로부터 한없는 긍휼을 받았음을 생각하고 베풀자.

요한1서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 요한이 한 엄청난 말씀입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먼저 목숨을 버리신 한없는 긍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무어(Thomas More)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고하게 잡혀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있는 재판관을 향해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재판관님, 나는 당신과 나와의 관계가 바울과 스데반의 관계가 되길 바랍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였지만 지금쯤 천국에서 이 두 사람은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나중에 회개하고 사도가 되었으니까요. 재판관께서는 지금 나에게 죽음을 선고하지만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한 구원을 함께 누리는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재판관은 이 토마스 무어의 뜻밖의 말을 듣고 하도 이상해서 되묻습니다. 
“나는 그대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 그대가 나를 이렇게 선대하는 이유는 무엇이요?” 
토마스 무어가 대답하기를 “나는 주님으로부터 한없는 긍휼을 받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긍휼을 어떻게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계 6: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두렵고 떨렸으면 차라리 ‘산들아 나를 덮으라. 바위야 나를 덮으라.’ 했겠어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겼습니다. 
이런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저는 정말 그래요! 
이런 긍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너무 이기적이고 너무 좀스럽고 너무 배은망덕하고 너무 답답해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때 하나님의 긍휼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더 깊은 은혜 속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자식을 낳아 길러보아야 부모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이치와 같습니다. 
우리가 매년 어버이주일이면 ‘부모님의 은혜’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때 보면 알아요. 
어른들은 모두가 눈이 벌겋게 되는데 어린 학생들은 눈이 말똥말똥합니다. 

학생들은 부모님의 은혜, 부모님의 사랑이란 말은 이해가 되는데 그렇게 가슴에 와 닿지 않아요. 
그러나 어른들은 자식을 키우면서 사랑을 쏟아부어보았기 때문에 ‘부모님의 은혜’ 하면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을 해봐야 받은 사랑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가 긍휼히 베풀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느끼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3. 이제 긍휼을 베풀 때 어떤 복을 받게 되는지 살펴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마5:7)

1) 이웃으로부터 긍휼이 여김을 받습니다.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 한인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잖아요? 
그곳에 사는 한인들이 다 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흑인 점원을 인간적으로 대접하고 긍휼히 여겼던 사람들은 그 어려웠을 때 흑인 친구들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긍휼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2)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약 2:13절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우리가 그날에 하나님을 만나면 무엇을 사정하게 될까요? 
그때 가서도 잘 살게 해달라고 하겠어요? 
성공하게 해달라고 하겠어요? 
먼저, ‘죄를 많이 졌으니 긍휼히 여겨 달라.’고 구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되묻는 말씀은 '너는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었느냐?'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습니다.
다윗왕은 긍휼을 베풀었더니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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