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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들사람, 얼사람 (눅 7: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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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사람, 얼사람 (눅 7:24-28)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떠난 뒤에, 예수께서 요한에 대하여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비단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사스럽게 사는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이 사람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 우마야드 모스크

몇 년 전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 들렀던 때가 생각납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서 깊은 도시 가운데 하나인 그 도시 외곽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시장통은 지저분했고, 사람들의 입성도 허름했습니다. 드럼통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고 군불을 쬐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았습니다. 검은색 히잡으로 온몸을 가리고 눈만 내놓은 여성들이 느릿느릿 걷는 것이 마치 케데 콜비츠의 판화에 나오는 군상들인 것 같았습니다. 

다마스커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전 세계의 무슬림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모스크 가운데 하나인 우마야드 모스크(Umayyad Mosque)에 들렀을 때였습니다. 그곳이 그렇게 유명해진 까닭은 중세 이슬람 세계의 영웅인 살라딘(Saladin, 1137-1193)의 영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발을 벗어 검은 비닐 봉지에 담아 들고 실내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는 이슬람의 전통 때문에 실내가 단촐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간의 자유로움은 또 다른 당혹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미흐랍(mihrab)을 향해 꿇어 엎드려 기도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기둥에 기댄 채 편안하게 앉아 담소하는 이들도 있었고, 음식을 나누는 이들도 있었고, 뛰어노는 아이들도 있었고, 누워 쉬는 이들도 있었지만 아무도 제재하지 않았습니다. 모스크는 그들에게 집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거대한 실내에는 초록빛이 감도는 돔 형태의 유리 조형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일단의 사람들이 그 주위를 돌고 있었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세례자 요한의 머리 무덤이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마케루스 성채(fortress of Machaerus)에 갇혔던 요한은 결국 참수되었고, 그의 머리는 당시 총독이 주재하고 있던 다마스커스로 보내졌던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세례 요한의 흔적을 모스크 안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참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 나실인, 세례자 요한

세례자 요한이 처형당한 직접적 원인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요한은 헤롯이 이복형제였던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은 사랑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정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두메 출신이었던 헤롯 가문에 대해 유대인들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야심이 컸던 헤롯 안티파스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정통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나비테아 왕국의 공주였던 아내와 이혼하고, 유대 의 하스몬 왕가 출신인 헤로디아와의 결혼을 서둘렀던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꾸짖은 것은 그의 그런 부도덕한 행위만이 아니라, 민중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리는 정치적 야심이었습니다. 명실상부한 왕이 되고 싶었던 헤롯 안티파스는 로마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갈릴리 호수의 중서부에 신도시를 건설하고는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 티베리아스(Tiberias)라고 명명했습니다. 도시를 건설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그는 갈릴리의 어부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왔던 이들의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물고기를 가공 처리하는 공장을 세우고는 헐값에 고기를 사들였던 것입니다. 정치는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잘 돌보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지만 모든 그릇된 권력이 그러하듯이 헤롯 안티파스는 자기의 정치적 야심을 이루기 위해 백성의 고혈을 짜내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런 그를 준엄하게 꾸짖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권력에 대해 대놓고 비판하지 못할 때 그는 단호하게 불의한 권력을 꾸짖었고, 그 결과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마스커스의 세례자 요한 무덤 교회 앞에 잠시 머물면서 저는 그 거친 야인의 혼을 추모했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당당하게 억눌린 사람들의 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실인의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요한의 탄생을 예고하면서 그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포도주와 독한 술을 입에 대지 않을 것이고,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성령을 충만하게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었기에 생과 사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었기에 권력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한은 불과 같은 성정의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일갈하면서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고 외칩니다. 회개의 열매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옷 두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과 나누어야 하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세리들은 정한 세 이외에 더 거두면 안 되고, 군인들도 사람들을 강제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가리키며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말합니다. 그는 거짓과 위선과 불의에 맞서 가열차게 싸웠던 엘리야의 현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희생제의를 독점하면서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했던 종교 권력과도 싸웠습니다. 그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동물 제사가 아니라,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라면서 회개의 세례운동을 벌였던 것입니다. 요한이 요단강 동편의 베다니에서 세례를 준 것은 매우 의도적인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새로운 출애굽을 꿈꾸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가 요단 동편 지역에서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그는 세례를 통해 새로워진 사람들이 세울 새 나라를 머리에 그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자기를 아는 사람

하지만 그는 자기의 한계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복음서에 기록된 그의 말과 행적에 근거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적어도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몽상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큰 분이 뒤에 오실 것이라면서 자기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았다고 사람들에게 증언했고, 곁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자기 제자들에게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요1:36) 하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는 이들이 더 많다는 제자들의 질투 섞인 보고를 듣고는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3:27, 30)고도 말합니다.

옛말에 知人者智 自知者明이란 말이 있습니다. ‘남을 알아보는 것을 일러 지혜롭다 하고, 자기를 아는 것을 일러 명철하다 한다’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성찰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알지 못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늘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를 세웠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큰 사람에 대한 경쟁의식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반길 뿐입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 그는 들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 속에 잠들어 있던 야성을 깨어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광야로 나간 것은 갈대를 보기 위해서도,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참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참 소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영혼에 통증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참 소리는 우리를 혼곤한 영혼의 잠에서 깨어나 참된 사람의 길을 걷게 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참 소리에 목마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축복의 말이나 들큰한 위로의 말은 당장에는 듣기 좋으나 영혼의 성숙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요한을 만나러 광야로 나갔던 사람들은 아마도 그 시대와 불화하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즘 말로 하면 까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가 자기 이익에 발밭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철저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그 앞에 서는 순간 사람들은 누구나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추상과도 같은 그 엄정함 앞에 서면 자기의 누추한 몰골이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은 그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한계 또한 여실히 드러내십니다. 

• 요한을 넘어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하신 주님은 곧 이어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간극이 너무 커서 몹시 당황스럽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근본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 운동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회개를 요구함과 아울러 복음을 믿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좋은 소식입니다. 무엇이 좋은 소식일까요?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을 획득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 그리고 연약함과 벌거벗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감시하고 처벌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어머니처럼 우리를 위해 속을 끓이시는 다정한 하나님을 일깨워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떤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 사랑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러한 받아들임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잘 아십니다. 우리는 의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 속에서는 불의와 공모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 살기 원하지만 어느 순간 어둠에 휩싸일 때도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며 살려고 애쓰지만 어느 순간 마음이 닫히기도 합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런 그를 주님은 긍휼히 여기십니다. 

• 포옹 속에서

그 때문일 겁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 식탁에서 배제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라 하여 외면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의로운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을 품어 안음으로 그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저는 정현종 선생님의 시 <포옹>을 좋아합니다.

모든 게 싹튼다
포옹 속에서,
부화하고 태어난다
포옹 속에서.
피어나고
날고 
흐른다
포옹 속에서.
(포옹 이외에 이념이 없고
포옹 이외에 종교가 없다)
그리하여 
지구는 꽃핀다
포옹 속에서.

의로움을 기준으로 삼으면 불의한 자가 배제되고, 빛을 기준으로 삼으면 어둠에 속한 사람이 배제됩니다. 배제는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는 원한 감정을 만들고, 원한 감정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전쟁으로 비화합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까지의 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 보이고 계십니다. 세상의 누구도 완벽하게 의롭지 않습니다. 물론 더 나쁜 사람, 더 파렴치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미워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경멸하고 멸시한다고 해서 그가 새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누구든 마음을 열면 맞아들일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너무 어둡습니다. 한반도의 운명은 지금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사랑과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은 지금도 태어나실 곳을 찾고 계십니다. 미움과 증오가 깃든 마음에는 주님이 머무실 자리가 없습니다. 탐심이 가득한 마음에도 깃들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대림절 두 번째 초에 불을 밝혔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주님의 빛이 밝혀지기를 소망합니다. 불의를 준엄하게 꾸짖는 들사람 요한도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 시대는 다른 이들의 가슴에 생기를 불어넣는 얼의 사람도 필요합니다. 갈 길이 멀지만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는 점점 자라날 것입니다. 이 희망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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