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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길이 참고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약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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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참고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약 5:7)


(약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중국 동부의 한 농부가 자신의 농장에 대나무를 심고 기다렸습니다. 1년이 지났지만 아무 것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2년이 지났을 때에도 역시 아무 것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3년이 지나도, 4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5년 째 되었을 때 대나무 싹들이 지면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루에 한 자가 넘게 자랐습니다. 불과 싹이 올라온 후 여섯 주 만에 대나무들은 무려 15미터 이상씩 커졌습니다. 농부는 그 대나무를 자른 후 내다 팔아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중국의 ‘모소’라는 대나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모소’라는 대나무가 6주 만에 15미터나 자란 이유를 아십니까? 이 대나무는 싹을 내기 전에 땅속에 있는 뿌리가 사방 수십 미터까지 뻗어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싹을 내면 뿌리에서 보내주는 엄청난 양의 자양분 덕분에 순식간에 키가 자라는 것이러 헙나다.

가정이지만 만약 농부가 그 ‘모소’라는 대나무를 심고 나서 4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리지 못했다면, 결코 부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기다렸기 때문에 땅에 심은 대나무가 15미터까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을 대다 팔아 부자가 된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성급한 증거 10가지를 지적한 한 글입니다.(한겨레)

(1)외국인은 자판기의 커피가 다 나온 후, 불이 꺼지면 컵을 꺼낸다. 그러나 한국인은 자판기 커피 눌러놓고, 컵 나오는 곳에 손 넣고 기다린다. 가끔 튀는 커피에 손을 데기도 한다.

(2)외국인은 사탕을 쪽쪽 빨아먹는다. 한국인은 사탕 깨물어 먹다가 이빨 부러진다.

(3)외국인은 아이스크림은 혀로 핥으며 천천히 먹는다. 한국인은 아이스크림은 베어 먹어야지 핥아먹다간 벌떡증에 걸린다. 

(4)외국인은 한국인을 보고 ‘저런 냄비근성 다혈질 민족 이탈리아 같으니’라고 하고 한국인은 ‘저런 여유만만 느려터진 지중해 쪽 이탈리아 인들 아 답답해라고 한다.

(5)외국인은 정류장에 서서 기다리다 버스에 천천히 승차한다. 한국인은 일단 기다리던 버스가 오면 도로로 내려간다. 그리고 문 열리기도 전에 문에 손을 대고 있다.

(6)외국인은 인도에 서서 ˝택시˝ 하며 손을 든다. 한국인은 도로로 내려가 택시를 따라서 뛰어가며 문손잡이를 잡고 외친다. ˝철산동˝ 

(7)외국인은 야구는 9회말 2사부터라면서 ‘힘내라 우리 편’ 끝까지 응원한다. 한국인은 ‘다 끝났네, 나가자’고 함으로 9회말 2사쯤이면 관중이 반으로 줄어든다.

(8)외국인은 영화의 마지막은 엔딩 크레딧과 함께 OST를 감상하며 여운에 젖는다. 한국인은 극장에서 영화도 미처 끝나기도 전에 우르르 일어난다.

(9)외국인은 식당에서 여러 시간을 즐기며 식사하는 데 한국인은 앉기도 바쁘게 재촉하고 10분 내에 먹고 일어난다.

(10)외국인은 ‘그 영화 어땠어? 연기는? 내용은?’라고 묻는다. 한국인은 ‘아, 그래서 끝이 어떻게 되는데’라고 묻는다. 

‘인스턴트’(instant)라는 단어의 정의를 혹자는 건널목의 신호등의 색깔이 빨간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뀌는 순간”이라고. 정의 하기도 한다 합니다.

우리는 속도를 강조하는 시대에 살아갑니다. 이 빠른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 순간 우리는 이 세계에 합류하지 못한 사회문화적 난민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길이 참음은 야고보서의 저자가 강조하는 마지막 덕목입니다. 참음의 주제가 즉시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 참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참음’이라는 단어는 준비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하나님의 ‘강림’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강림’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남을 번역한 단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망 위에 마음을 굳건하게 하며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는데, 우리는 추수와 주님의 강림 앞에 서 있게 합니다(8절).  이는 서로가 불평할 시간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서로의 판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마 7:1)을 기억하게 만들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의 결과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에 구원의 결과로 심판 받게됩니다.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움을 의미합니다(약5:9)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야고보 사도는 ‘참음’에 관해 계속해서 강조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참음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때에 무엇을 참아야 하고 그것이 왜 지금 이 시기 곧 대림절에 필요하며 바쁜 일상 속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요?
우리는 이 참음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농부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림 같이 길이 참고 영광 돌리라고 합니다
(약 5:7)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농부가 그의 노동을 통한 열매를 얻기 위해 비를 기다리는 모습을 통해 인내를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야고보는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농부의 경우를 예로 들어 인내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당시의 기후를 반영한 것으로 '이른비'는 10월에서 11월에 오는 비를 가리키며 '늦은 비'는 4월에서 5월간에 오는 추수 직전의 비를 말합니다.
농부가 생명과도 같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주시리라는 약속을 굳게 믿어 기대하고 참습니다

(신 11: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렘 5:24)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슥 10:1)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

어떤 거지가 한 신사에게 와서 동정을 구하였습니다. 신사는 약간의 돈을 주어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거지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다시 찾아와서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사는 약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전에 당신에게 얼마를 주지 않았소? 나는 당신에게 동정을 베푸는 일을 습관적으로 하고 싶지는 않소. 그러나 그 거지는 물러가지 않고 뻔뻔 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나는 선생님을 아침 저녁으로 찾아 오려고 합니다. 선생님이 거절하시거나 거절하지 않으시거나 나와 관계 없습니다. 나는 부지런히 찾아 다닐 것입니다. 그러자 신사가 말했습니다. 정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출입을 막기 위해 항상 문을 잠가 두겠소. 

그런데도 거지는 물러가지 않고 신사를 빤히 쳐다 보면서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 나는 아예 문이 잠기기 전에 들어와서 한 시간에 한번씩 선생님에게 조를 것입니다. 한 시간에 한번씩 오겠습니다. 나는 선생님에게 요구하는 것을 얻기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침내 신사는 그 거지의 추근거림에 지쳐버렸습니다. 그래서 항복하고 달라는 대로 조금씩 주었습니다. 
  
농부는 열매 맺기까지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춥거나 덥거나 관계하지 않습니다. 열매까지 기다립니다.

주께서 강림하시기 까지 길이 참고 영광 돌리라고 합니다.
(약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주님의 오심을 기대하기에 우리의 참음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찰을 마음에 담고 사는 우리의 현 주소는 어떠합니까? 주를 따르기 위해 구별된 이들인가요? 아니면 나의 유익을 좇기 위해 그리스도라는 좋은 이름으로 나를 포장하고 있는가요?
야고보 사도는 흩어져 있는 12사도들에게 주의 강림을 준비하며 강림하시기 까지 길이 참으라고 권고합니다.
이 참음의 의미는 끊임없는 부당한 착취와 억압 가운데 고통을 겪을지라도 끈기와 용기를 가지고 기대하며 기다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난을 언제까지 참아야 한다는 것인가요?
야고보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라고 말합니다.
기약 없는 참음이 아니라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참으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이기에 순례자라는 단어가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어울리는 시기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길 원하십니다. 
그 참음은 맹목적인 참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며 기다리는 참음입니다.
비록 마라나타의 그 영광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참을 수 있습니다.
내 삶의 목적으로 주님을 바라보지 않기에 우리의 인생 여정 가운데 그 참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며 영광돌리라고 합니다.
(약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시련은 더 큰 상급을 받는 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에  참음이라는 권고가 가득 차 있습니다.
특별히 이 인내와 더불어 굳건하게 하라고 강조합니다. 견고하고 확고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현재의 삶 속에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으며 착취를 당하더라도 주의 재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 위에 굳게 서서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빠름’과 ‘순간’ 또는 짧음이 강조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다릴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모세를 만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을 전달하고 계셨지만, 그 몇일을 참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우상을 만들어 죄악의 길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는가요?

하나님의 기다림을 이겨 내지 못한 이들에게는 멸망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대림절에 우리는 그 오신 주님과 오실 주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한번 경험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의 확신만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떠한 절박한 현실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 기다림의 끝에는 우리에게 주어질‘영광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분과 동행하는 그 순간이 내 인생의 천국일 것입니다.
불의한 자들의 압제와 핍박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완성을 소망하며 심판하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본받아 길이 참고 영광 돌리라고 합니다
(약 5: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고난 중에 인내한 자들의 모범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선지자들을 “주의 이름으로 말한”이라는 단어로 수식하고 있습니다.
단 한 문장으로 표현되었지만 이 문장 이면에는 많은 역사적 상황과 수많은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말씀의 대언자로 순종하여 살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고통을 이겨 내었고 그들은 ‘믿음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같은 사람은 자기들의 비위에 맞지 않는 말을 한다고 해서 감옥에 가두기도 하고 구덩이에 던져 넣어 죽이고자 하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진리를 말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 붙는 것 같아서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세상에서 진리를 말함으로 많은 핍박을 받습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지금도 핍박을 받습니다. 그래도 인내하며 옳은 소리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의를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받는 그 순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내와 시련의 과정을 지난 우리는 ‘믿음의 선조’라 불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련이란 현 사회에서 실존 그 자체일 것입니다. 이 고난의 순간을 이겨 내는 그때 우리 삶의 결과는 믿음의 확정이 될 것입니다.

인내하는 자를 복되다 하나니 길이 참고 영광 돌리라고 합니다

(약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하신 말씀의 반복이기도 합니다

야고보는 인내의 분명한 결과인 복을 언급함으로 인내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산상 수훈을 반영합니다

(마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단 12:12)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판단을 언급하려는 것으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내로 말미암는 복을 일반화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면서 고난과 핍박 속에서 인내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야고보는 이런 경우의 실례로 '욥'을 제시합니다. 
욥은 순식간에 당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의 흔들림 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기대한 인내의 본입니다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는 주께서 욥을 통해 보여주신 결말, 곧 인내하는 욥에게 시련 전에 주었던 것보다 두 배로 크게 복주신 사실을 가리킵니다
야고보는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소망한 욥을 예로 제시한 후 인내의 결과인 욥의 결말 즉 갑절의 복을 받은 사실을 언급함으로 인내토록 권면합니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는  하나님께서 어떤 고난에서든지 인내하는 자를 온전히 이해하셔서 함께 하시는 것은 물론 예비된 복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같이 많은 자손을 준다고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25년만에 이삭 겨우 아들 하나를 주셨습니다. 25년 기다려 겨우 씨앗 하나 생겼지만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40살에 민족을 해방시키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급하였습니다. 그래서 애급 사람을 죽여서 모래 속에 파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급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부르셨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이 브엘쉐바를 떠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0년만에 복을 주셨습니다. 기다림이 없이는 거둠이 없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 대림절 세 번째 주에 ‘시련과 참음’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이 시기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오심에 대한 참된 준비를 해야 합니다. 특별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길이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길이 참고 기다림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길이 참고 기다릴 수 있고, 그 소망 때문에 우리는 고난도 참아 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소망으로 고난을 이겨 낸 그 순간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 그것은 곧 길이 참고 기다리는  과정입니다.

찬송가를 작곡한 분 가운데 죠지 베브리 쉬아는 어렸을 때 예수님을 믿고 주일학교에 열심히 나갔지만, 출세를 하고 돈을 벌면서 주님을 멀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시카고 방송국의 연출자였으며 인기절정의 가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벌고 출세를 하였지만 마음은 허무했고 마음 속의 불안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갑자기 어렸을 때 믿었던 예수님에 대한 향수와 추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면서 '나는 어쩌면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지도 몰라.'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 후 어느 모임에 참석했다가 예수님께 자신의 전 삶을 드리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방송국에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다시 전속 계약을 체결하면 지금보다 더 좋은 대우를 보장했지만 그는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미안하지만 전화를 너무 늦게 걸으셨습니다. 앞으로 나의 목소리와 재능 모든 것은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 나의 주인이 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쓰여질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멜로디가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의 한 곡이, 자기를 위하여 늘 기도하신 어머니가 친구 밀러 여사에게서 가져왔던 성시에 맞춰 작곡을 시작한 것이 바로 주에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었던 것입니다. 그 분은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평생을 동역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아마, 그 분은 때로 다시 인기와 부와 화려함이 가득찬 방송계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이 들 때마다 오직 예수님에게 마음을 고정시킴으로 극복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되 대림절을 보내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길이 참고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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