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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느하스처럼 일어서십시오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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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느하스처럼 일어서십시오 (민수기 25장 1-18절)


< 거룩한 분노도 필요합니다 >

 2000년대 초, 성령을 받아 넘어지고 일어나면 아말감이빨이 금이빨로 바뀐다고 주장하는 영성집회나 영성세미나가 꽤 유행했었습니다. 왜 그런 황당한 주장이 한때나마 유행했습니까? 그렇게 해서 남미에서 초대형 교회로 성장한 교회가 있었다는 것이 금이빨 영성집회의 성행 배경이었습니다. 요새 전도가 힘드니까 교회마다 어떤 성장의 돌파구라고 생겼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금이빨 전도를 내세우는 영성집회나 영성세미나까지 성행한 것입니다. 한때 한국교회 중 약 1000교회가 그런 금이빨 전도에 가담했습니다.

 왜 거의 사이비종교 수준인 금이빨 전도에 미혹됩니까? 그만큼 교회성장이 힘들다는 뜻입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그런 세미나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결국 10년도 안 돼 그 사이비성이 드러나면서 지금은 금이빨 성령집회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와 유사한 영성훈련 방식과 기존의 성경공부 시스템을 정교하게 섞어 만든 교회성장 세미나가 또 한때 크게 유행했습니다. 문제는 그런 세미나로 인해 보수적인 교인들이 소외감을 느끼면서 교인이 두 갈래로 나뉜 교회가 수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갈래로 떨어뜨리는 세미나’란 별명까지 생겼습니다.

 요새 “교회성장 세미나가 오히려 교회를 망친다.”는 말이 많지만 그래도 세미나 인도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금이빨 영성세미나를 옹호하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금이빨 전도를 하면 전도가 잘 됩니다. 성령 받고 넘어졌다가 일어난 사람들을 보면 정말로 아말감이 금빛으로 바뀐 것을 종종 목격합니다.” 그러나 그런 금이빨 전도로 믿게 된 교인이 과연 복되고 성숙한 믿음을 가지겠습니까? 지금 자기 몸 안에서도 기적적인 일들이 무수히 생깁니다. 그런 기적들을 외면하고 저차원적인 금이빨 기적에 미혹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차라리 죽을지언정 헛된 기적이란 우상에게 영혼을 팔아넘김으로 하나님과 성령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마십시오. 가짜 치유나 가짜 축귀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면 치유와 축귀를 믿지 않는 영성이 없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가짜 치유와 가짜 축귀에 미혹되지 말라는 말은 치유와 축귀 자체를 부인하는 말이 아니라 가짜에 속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남용하고 훼손시키는 작업에 미혹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예배 때 치유기도를 합니다. “산다르 우마라카야 바리토 샤마이. 지금 관절염이 나았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뇌종양이 치료된 분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여러 명이 일어나서 나은 표시로 손을 흔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주일에도 비슷한 말을 하면 똑같은 사람이 일어서서 손을 흔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을 훼손하는 거짓 영성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거짓 영성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훼손하면 진짜 기적과 치유는 없게 됩니다.

 거짓 치유자들은 주장합니다. “‘예수 이름으로!’라고선포하면서 기적과 치유를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는데 그게 왜 예수님의 이름을 훼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병을 치료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그런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문제는 거짓 사칭을 통해 치유와 축귀 선전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땅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언행을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뜻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고 병도 고친다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지 왜 떨어뜨리는 것인가?” 바로 그런 생각에 허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와 축귀를 일으킨다고 하는데 너무 무속적인 행위도 많고 헛된 선포로 끝날 때도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즉 단번에 온전히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무속인들이 하듯이 “나가라!”고 귀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몸을 붙들고 흔들고 때리면서 몇 시간 동안 축귀의식을 하는 치유사역 등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치유사역자는 집회 때마다 같은 대상에게 치유와 축귀를 선포합니다. 그러면 다음 집회 전에 또 병과 귀신이 새롭게 들어온 셈이 됩니다. 주일에 치유되었다가 주중에 또 재발하고 그 다음 주일에 또 치유되었다고 하는 식의 태도가 예수님의 이름을 얼마나 권세 없는 이름으로 만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기복주의의 왕국을 쌓는 거짓 미혹자들에 대해 크게 분노하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분노를 품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드릴 이 시대의 비느하스가 곳곳에서 많이 일어나야 합니다.

< 비느하스의 축복을 얻는 길 >

 본문에는 이스라엘에 음행과 우상숭배가 만연할 때 비느하스가 모세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함으로 축복의 언약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처럼 하나님과 리더의 마음을 시원하게 함으로 비느하스의 축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음행과 우상숭배를 버리십시오

 어느 날, 40년 광야생활이 끝날 즈음 이스라엘이 싯딤에 진을 쳤을 때 모압이 발람의 계책에 따라 이스라엘을 미혹하기 위해 미인계를 활용했습니다. 당시 모압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청해 그들은 같이 잔치를 벌이고 모압 신들에게 절했습니다(2절). 당시 모압의 주신은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바알인데 바알 숭배의식은 난잡한 혼음과 인신제사 등의 비윤리적인 행위가 곁들여졌습니다.

 당시 바알숭배의 핵심 의식은 바알신전을 섬기는 여인들이 다산과 풍요의 신에 대한 헌신의 표시로 신전에 찾아온 남자들과 음행을 하는 것인데 그 의식에 넘어가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여자들과 함께 바알 제사에 참석하고 음행을 하고 바알 숭배에 가담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진노하시며 모세에게 말했습니다(4절).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왜 하나님은 백성들의 수령을 잡아 태양을 향해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게 했습니까? 바알숭배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경고하려고 바알의 상징인 태양을 향해 보란 듯이 나무 기둥에 높이 목매달아 처형함으로 우상숭배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강력한 본보기로 삼은 것입니다. 그렇게 리더를 목매단 후에 모세는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바알브올 숭배에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고 했습니다(5절).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육적인 음행도 싫어하시지만 특별히 영적인 음행인 우상숭배를 대단히 싫어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앞세우는 것은 다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자는 성도다운 삶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우상은 이익과 쾌락의 넓은 길로 가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선교와 나눔의 좁은 길로 가라고 합니다.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을 택하면 세상 사람들은 바보라고 하지만 그런 바보가 세상을 바꿉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바보라는 말도 들을 각오를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성공과 기적과 치유는 믿음의 목표가 아닌 믿음의 부산물입니다. 심지어는 행복도 부산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절반의 교인 모습을 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늘 결단하십시오.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와 기도와 헌금과 봉사도 잘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욕심에 매인 옛 자아를 극복하고 십자가의 좁은 길을 각오하십시오. 십자가를 외면하면서 부활의 영광만 바라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욕심을 극복하고 우상숭배에 미혹되지 않는 제자를 누구보다 기뻐하실 것입니다.

2. 거룩한 분노를 나타내십시오

 음행과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수많은 리더와 백성들이 죽어가는 비극적인 장면을 보면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막 문에서 울고 있을 때 한 이스라엘 남자가 모세와 온 회중이 보는 상황에서 한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6절). 얼마나 뻔뻔합니까? 음란의 누룩에 빠지면 뻔뻔해지고 보이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때는 가족도, 친척도, 교인도, 이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얼마나 위태한 삶입니까?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로 염병이 창궐하고 비참한 처형이 진행되는 생황에서 백성들은 회막 문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그때 그 남자가 자기 막사로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들어가는 장면을 보고 아마 분노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비느하스가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막사로 따라 들어가 두 남녀의 배를 꿰뚫어서 죽였습니다. 그러자 염병이 그쳤습니다(7-8절). 그때 염병으로 죽은 자가 24000명이었습니다(9절).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보면 그때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비느하스는 1대 대제사장인 아론의 손자이고 2대 대제사장인 엘르아살의 아들로서 3대 대제사장이 된 인물입니다. 비느하스가 거룩한 의분을 품고 당시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해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던 그 남자를 죽였을 때 바로 이스라엘을 휩쓸던 염병이 그친 사실은 하나님의 마음도 시원하셨다는 반증입니다. 즉 온 백성이 회막 문에서 흘린 참회의 눈물이 하나님의 진노의 염병을 그치게 하기보다 비느하스의 의로운 행동이 그 염병을 그치게 했다는 것은 때로 추상같은 공의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이 없는 자세는 질질 끄는 자세입니다. 맺고 끊는 것을 잘하십시오. 공의를 너무 내세워 사랑이 질식되어도 안 되지만 사랑을 명목으로 공의가 무너지도록 해도 안 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잘못된 길로 가면서도 교만한 사람은 과감히 멀리하고 잘못된 일이나 잘못된 것도 과감히 끊으십시오. 과감히 끊어야 할 것을 알면서도 중독성으로 인해 끊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있어도 마음만은 늘 과감히 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때가 되어 끊을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와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3. 의로운 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때 비느하스에게 죽은 남자는 시므온 지파의 한 지도자인 시므리였습니다(14절). 또한 시므리를 유혹했다가 같이 죽은 미디안 여인은 미디안의 한 종족 수령인 수르의 딸 고스비였습니다(15절). 고스비의 아비인 수르는 미디안 종족 다섯 왕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민 31:8). 그런 상황에서 상대국 왕의 딸을 죽인 일은 곧 전쟁선포를 뜻합니다. 결국 그 고스비의 일로 의해 하나님은 모세에게 미디안 족속을 치라고 명령했습니다(16-17절). 그 전쟁으로 미디안의 다섯 왕과 대부분의 미디안 족속이 처참하게 죽습니다.

 한 여인 때문에 미디안 전체가 거의 멸족된 것입니다. 반면에 그 음행 사건의 주동국가인 모압과는 전쟁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아마 모압 족속이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후손들이었기에 싸움을 피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국 조상 한 명으로 인해 모압은 처참한 비극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도 중요합니다. 의인 한 명 때문에 나라 전체가 살 수 있고 죄인 한 명 때문에 나라 전체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비느하스와 같은 의인 한 사람’의 꿈을 가지고 의를 위해 일어서고 행동하십시오. 물론 준비도 없이 무작정 무모하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의로운 행동이 최대한 효과가 있도록 거룩한 계획과 전략을 가지고 준비하며 사십시오. 비느하스는 당시 최대 권세를 가진 아론의 손자이자 엘르아살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자기 위치를 의를 이루는데 활용했습니다. 그런 위치에 없었다면 비느하스의 행동은 의를 이루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불의가 보이면 문제의식을 품고 있으면서 계속 영향력을 키워 가십시오. 영향력도 없이 소리만 높이면 사람들이 우습게 여기고 그 소리가 먹히지 않습니다. 소리가 잘 먹히도록 소리 없이 힘을 키우고 인물의 길을 준비하는 일도 병행해야 의로운 사회를 이루는데 더 도움이 됩니다. 의로운 자기 소리가 허공을 치는 소리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소리만 높은 사람은 깊은 물속에 서서 둥둥 떠다니는 사람처럼 변화를 밀어붙일 힘이 없고 울음소리만 큰 의인은 허공에 뜬 구름처럼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 비느하스처럼 일어서십시오 >

 의인의 눈물도 필요하지만 눈물 앞에서 불의는 대개 끄덕도 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좋은 뜻만 품지 말고 힘과 영향력은 물론 필요하다면 물질적인 능력도 키워서 자신의 선한 뜻이 허공만 치는 공허한 뜻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세상을 변화시키는 좋은 일에 물질의 힘도 크게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월새기 발행이나 월새기 영어판 발행이 꿈같은 찬란한 비전이지만 그냥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힘도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제가 1996년 성결대에서 신학영어를 가르칠 때 개발하고 지금까지 20년간 계속 구축하고 발전시켜온 <네트영어>는 새롭고 방대하고 기발하고 지혜로운 원리들을 많아 한국 사람들의 영어공부에 대한 고민을 극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놀라운 공부방법입니다. 저는 <네트영어>가 제가 현재 만들고 있는 <성경 전권강해설교>만큼 또 다른 차원의 의미와 역사성을 지닌 작품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이지만 아직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약간의 물질만 뒷받침된다면 수많은 학생들의 영어공부의 고민도 해결해주고, 영어공부에 들일 수많은 시간을 다른 학업에 투자하도록 해서 인물도 키울 수 있고, 더 많은 재정을 창출해 <월새기 영어판> 발행도 할 수 있고 선교도 더 많이 할 수 있습니다.

 물질이 행복을 좌우하는 요소는 아니지만 잘 활용되면 찬란한 꿈과 비전을 이루는 귀한 밑받침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소중한 콘텐츠를 준비했어도 그냥 땅속에 묻혀있으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도 말씀과 기도와 땀과 눈물로 계속 준비하면 하나님은 하나씩 그 비전들을 구체화시켜주시고 역량도 더욱 키워주실 것입니다. 그처럼 쓰임 받는 인물이 되기 위해 의를 아는 한 사람으로서 열심히 내일을 준비하십시오.

 비느하스처럼 의를 아는 한 사람이 되십시오. 불의한 기복주의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거짓 치유와 거짓 기적에도 속지 마십시오. 그래야 참된 기적과 참된 치유의 주인공이 됩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나쁜 친구도 과감히 멀리해야 하나님이 좋은 친구를 붙여주십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앞세우고 자랑하는 사람도 멀리해야 돈보다 하나님을 앞세우는 참된 믿음의 동료를 만나서 결국 더욱 큰 도움을 얻습니다. 사랑과 공의를 혼동하지 마십시오. 불의를 눈감아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특히 두려움 때문에 불의를 눈감아주지는 마십시오. 비느하스처럼 일어나 하나님과 리더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려는 모습이 있어야 영원한 약속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 말은 자기 의를 내세워 천방지축 날뛰라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불의로 여겨지는 것은 그냥 감추지 말고 문제의식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때가 안 되어 소리를 내지 못할 형편과 상황이라도 언젠가 참소리를 낼 수 있도록 차근차근 준비하십시오. 그런 과정과 단계를 잘 준비해서 불의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의를 이뤄내어 언약의 주인공이 되는 복된 제자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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