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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서주일] 성경과 성령님 (요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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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성령님 (요 15:26) 
 
 
오늘은 오직 성경과 성령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닙니다. 이는 신약이든지 구약이든지 동일합니다. 구약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렘 1:2, 9). 이사야 선지자의 경우도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사 59:21)이라고 하셨지요. 다윗은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2)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20-21)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구약 성경으로 기록될 수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 역시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말씀들을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 3:16)이라 말합니다. 여기서의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약을 지칭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약도 포함됩니다. 그 한 증거로 베드로 사도는 바울 사도의 서신을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벧후 3:16)이라 하여 성경과 동급의 권위로 다루었지요.

이처럼 모든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는데, 그 성경을 바르게 깨닫는 것이 성령님의 조명하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고전 1:21)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총명한 자연인도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엡 4:18). 총명이 어두워진 상태요 말씀에 대하여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성경을 보아도 그 의미를 바르게 알지 못하지요. 성도들 역시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마음 눈을 밝히사 … 알게” 하셔야만 하나님과 그분의 하신 일에 관하여 알게 됩니다(엡 1:18-19, 눅 24:31).

달리 말하면, 인간의 지혜나 프로그램이나 눈높이 교육이 성경을 더 잘 깨닫게 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좋은 설교도 그 자체가 더 잘 깨닫게 만들지 못합니다. 똑같은 설교를 듣고도 어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듯이 감동하는 반면, 다른 이는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조차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눅 24:45) 하실 때라야 비로소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반면 빌립보의 자주 장사 루디아는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하시자 단 한 번의 ‘말씀과 더불어’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행 16:14-15).

따라서 성도가 성경을 바르게 알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있어야 함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마구잡이로 조명하시지 않고 분명한 초점을 가지고 조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하셨습니다. 이 단어(para,klhtoj, 파라클레토스)는 어떤 사람을 돕거나 변호하기 위해 곁에 선 사람을 뜻하는 법정적 용어입니다. 즉,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증언하며 변호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지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의 핵심 사역에 대해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라 명확하게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곳이라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의 집중과 깨달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강할수록 심지어는 성령님 자신에 대한 관심보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많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반면 성령 충만한 것 같은 분위기일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관심과 깨달음이 부족하다면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심리적 작용만 있을 뿐, 진정한 성령님의 역사는 아닐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끊임없이 성도의 관심을 자신이 아닌 예수님께로 돌리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께 들은 것을 세상에 말씀하셨습니다(요 12:49; 8:26).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요 14:10)이라고도 표현하셨지요. 예수님께서는 자의로 말할 자유가 있으셨지만 스스로를 제한하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성령님께서도 예수님과 동일한 원칙으로 사역하십니다. 이는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14)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도 자의로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듣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알리시기로 스스로 제한하셨습니다. 그 까닭은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신구약 성경의 모든 기록이 철저하게 예수님 중심적인 까닭은 성령님의 이러한 사역적 특성 때문일 것입니다(눅 24:44). 예수님께서는 자의가 아닌 하나님께 들은 것만을 가지고 사역하셨고, 성령님께서는 자의가 아닌 예수님께 들은 것만을 가지고 사역하시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세 위격 간에는 전혀 갈등이 없고 완벽한 조화와 일치가 있습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감동시키셔서 예수님께서 완성하실 구속 역사를 중심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조명하셔서 밝히 드러내시고 성취시키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영감된 기록도 조명된 해석이라는 말 자체가 모두 성경을 중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께서 말씀과 상관없이 자의적으로 역사하기라도 하시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상에서 살핀 모든 증거의 말씀들을 대적하게 됩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실제 성령님의 사역 사이에 갈등과 불일치가 있는 것처럼 만들지요. 또 성령님께서 기록된 말씀과 다르게 역사하신다면 성경을 기록하실 때와 적용하실 때의 마음이 다른 분으로, 즉 스스로 모순되게 행동하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셈입니다.

오늘날 소위 ‘성령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계시나 예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 전투에서 사단을 대적하고 그의 세력을 결박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은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 기록에 없는 새로운 계시를 덧붙이면 성령님께서 성경을 기록할 때 충분히 계시하지 않으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말씀에 위배된 예언들은 성령님께서 기록하게 하셨던 말씀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분으로 만들어버리지요.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셨음에도 오직 기록된 말씀만으로 사단을 물리치셨습니다. 사단을 대적하는 일도 기록된 말씀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말씀 중심의 역사였습니다. 지난주에 살폈듯이 예수님의 전도하심이 기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중심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삼천 명의 회개는 “그 말을 받는 사람들”(행 2:41) 곧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발생했습니다. 그 후 믿는 자의 수가 남자만 약 오천 명이 되었을 때, 성경은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라고 기록합니다(행 4:4).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서 두 해 동안 사역했을 때,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그 일 역시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한 결과였습니다(행 19:9-10).

사도 이후 세대인 디모데에 요청되었던 일 역시 말씀 사역입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3)고 했고,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고 했습니다. 영적 리더십을 가지기 위해 기적 행할 능력을 덧입도록 착념하라거나 그런 일에 힘쓰라는 명령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방언이나 예언이나 병 고침 등의 기적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엡 6:17). 성령님의 강한 능력은 무엇보다 말씀과 더불어 나타났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 기적을 나타내셨고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도 하셨습니다(행 19:11). 하지만 그 시대조차도 기적들은 복음이 새로운 세계로 확장되는 특수한 시기에 말씀을 확증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기적을 애써 전도 수단으로 삼지 않았고, 기적을 사역의 주축으로 삼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기적에 집중하는 청중들의 관심을 말씀으로 돌렸지요. 우리 시대는 말씀만으로는 부족한 듯 계속 기적적인 것들이나 획기적인 프로그램들에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의 ‘충분성’에 대한 견고한 신뢰가 어느 시대보다 필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per verbum) 그리고 ‘말씀과 더불어’(cum verbo) 역사하심을 분명히 해야 하는 때입니다. 물론 성령님은 말씀에 갇혀 있지 않는 무한하신 하나님이시지요.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성경 말씀과 상관없이 자의적으로 역사하지 않기로 스스로를 제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진정으로 성령님께 민감한 사람이라면, 기적적인 현상들을 환호하는 태도보다 성령님께서 이미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성경에 충실한 태도를 나타낼 것입니다. 참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잘 받는 사람이라면, 성경과 동떨어진 신비를 추구하기보다 성경이 교훈하는 가르침을 잘 분별하고 그 말씀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모습을 나타내겠지요.

‘성령 사역’에 대해서도 어깨너머로 배우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잘 정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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