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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라 (눅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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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라 (눅 2:8-20)
 

구주 탄일의 정경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주 작은 시골마을입니다. 그러나 크기와 상관없이 베들레헴은 인류 구속사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 일어났던 곳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은 성군 다윗의 고향일뿐더러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의 고향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주의 사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곳이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던 그 날 밤에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그 날도 베들레헴 마을 근처에서 목자들이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추었습니다. 목자들이 놀라고 크게 무서워하자. 

천사가 말하기를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고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했습니다. 목자들에게 구주 탄생을 알리고 나서 천사들은 곧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목자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걸음을 재촉해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했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본문에 보니, 주의 사자가 목자들에게 전해 준 소식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란 ‘큰 기쁨을 주는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복음을 Good News 곧 좋은 소식이라고 합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해 준 소식이 무엇이었기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일까요? 그것은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은 모든 인생에게 큰 기쁨을 주는 좋은 소식입니다. 구세주가 나셨다는 소식이니 그럴 수밖에요! 그러기에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했던 것입니다. 

온 백성은 유대인들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그것도 시대를 초월해서 지구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태어날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은 천하 만민에게 미칠 복된 소식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 1:15)고 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사 9:2)고 했습니다. 여기 큰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흑암에 행하던 자,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는 범죄한 우리 인생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세상에 실로 엄청난 변혁을 가져다준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 중요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능가하는 대 사건은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노아의 대홍수도 이 보다는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대홍수는 노아의 여덟 식구를 제외하고 모든 인류를 물로 심판한 사건으로서 전무후무한 대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것은 심판을 위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구원의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류가 처한 비참한 운명 

빛의 진가는 어둠의 정도에 비례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가를 알려면 인류가 처해 있는 비참한 운명을 적나라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보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증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습니다. 도덕적인 사람도, 양심적인 사람도, 자선을 많이 하는 사람도, 다 ‘모든 사람’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람이 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일컬어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민 16:22)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증언합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에게 생명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되면 포도나무의 가지가 원줄기에서 떨어져 나가듯이 생명을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지옥이 지옥인 이유는 그곳은 하나님과 단절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천국이 천국인 이유는 그곳은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계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증거합니다. 여기서도,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는 표현 대신에 여기서는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같습니다. 


기독교가 죄를 다루는 방법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가 죄에 대하여 너무 자주 언급한다고 비판합니다. 종교가 다루어야 할 인생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닌데 하필이면 죄에 대해서만 그토록 집중할 것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암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에게 왜 당신은 암에 대해서만 집착하느냐고 비난하는 것과 같습니다. 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는 자나 깨나 환자의 암세포를 없애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합니다. 환자에게 위장병이나 무좀과 같은 병이 있더라도 그런 것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암을 치료하는 것이 환자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의사는 우선적으로 암을 치료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다루시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영원한 운명이 죄의 유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모든 문제에 우선해서 죄의 문제를 취급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를 그토록 심각하게 다루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가 복음을 전해 주면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화를 내기도 합니다. 바쁜 사람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는 남 걱정 말고 당신이나 잘 믿고 천당 가라고 말합니다. 그런 반응을 대할 때, 너무 상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그들의 무례함에 분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같은 저들의 반응은 죄가 무엇인지, 또한 죄인의 비참한 결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므로 우리는 오히려 저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듣기 싫은 소음처럼 여기다니, 그처럼 가련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생명의 길이신 그리스도 

공자님은 “조문도 석사가의”(朝楣 夕死可矣)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한 “도”는 ‘사람답게 사는 도리’를 의미하지, 영생을 얻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전하는 도는 생명의 도입니다. 영원히 멸망 할 운명에서 건짐 받는 도를 말합니다. 마귀의 종 된 신분에서 놓여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도를 말합니다. 죄인이 죄를 청산하고 구원받는 도를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요 영생의 도가 되십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할 가장 긴급한 소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현대인들은 그 마음이 메말라서 마땅히 감동해야 할 일임에도 감동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런 실상은 현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감동은 죄인들의 공통적인 실상입니다. 그런 까닭에, 메시야가 나셨다는 말을 들려주어도 감동이 없이 무덤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앙적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16)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메시야의 탄생 소식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메시야를 고대한 사람들 

그러나 복음서를 보면, 이들과 정반대로 메시야를 대망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시므온이라는 한 경건한 노인이 나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는데, 의롭고 경건하여 메시야를 기다리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였습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낳은 지 40일이 지났으므로 율법에 따라 결례를 행하기 위해 남편 요셉과 함께 아기를 안고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다가 마침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므온은 단번에 그 아기가 메시야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시므온은 아기를 안고 감격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며 말했습니다.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주재여,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 말은 “하나님, 이제 종이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책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도 메시야를 알아본 시므온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데 대한 감격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이 우리에게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이 그리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다면, 그처럼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고도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복음서를 비롯해서 신약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하나같이 메시야를 만난 감격을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강권적인 마음의 욕구를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고 했습니다. 

구원의 길을 먼저 알게 된 사람은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해 줄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메시야가 오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해 줄 책임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나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린 것이 아니라 부득불 해야 할 일입니다. 만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멸망했다면 그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하신 말씀이 그 뜻입니다. 


하나님께는 영광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에게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된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보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했습니다. 

구주의 나심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창세전에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죄로 인하여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시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생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9). 그리고 인생들을 구원하시려는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이사야서 9장 7절에 보면, 메시야를 보내시는 것과 관련해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가 탄생하심으로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보여 줍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바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생명을 주기까지 사랑한다면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 7절 이하에는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 

그리고 구주께서 나신 목적은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신 대로 우리 인생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지만, 그러나 이 기쁜 소식을 믿는 사람들만이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교만한 자들, 완악한 자들은 이 소식을 거부할 것이므로 구주 탄생의 소식이 그들에게는 평화의 소식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라고 하지 않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에게 평화가 임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인생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불화를 청산하고 화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 세상에 전쟁이 있고, 사람들이 서로 반목하는 것일까요? 그 근원적인 원인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은 그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내면의 갈등으로 스스로 고통을 당합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마음에 평안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리라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사회적으로 성공했더라도, 마음에 평화가 없고 미움과 불만이 가득하다면 결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정의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 구성원 각자의 마음이 평안해야 가정에 평화가 깃들게 되는 것이지, 마음속에 미움과 욕심이 가득한데 어떻게 가족 간에 평화롭게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사회가 불화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를 이루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평안이 있어야 사회가 평온하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모인 사회라면 당연히 분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 간의 불화는 하나님과의 불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피로써 화목 제사를 드려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화평을 누리게 되고, 이웃과도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어디서나 화평케 하는 자 곧 peace maker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의 증인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우리는 주의 천사가 전해 준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수혜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죄 사함을 통해서 영혼의 구원을 받았으며, 하나님과 원수 관계를 청산하고 화목하였습니다. 마귀의 종이었던 우리가 천국 백성이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아무 소망도 없던 우리가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되었으며,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빛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축복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주의 천사가 한 것과 같이 이 복된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천사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분부는 “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제자들에게 같은 분부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감람산에 모였을 때 예수님께 묻기를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대답하시기를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제자들이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했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의 분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으며 드디어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아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분부는 오늘 우리에게 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오늘 성탄절을 맞아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며,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증인으로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성도님들의 심령에 하늘의 평화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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