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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전혀 뜻밖에 들려온 소식 (눅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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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뜻밖에 들려온 소식 (눅 2:8-14)
 

<오직 사랑으로 녹아지는 인간의 마음>

지난주에는 리영희 선생(1929-2010)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군사 독재 정권 시절에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 많은 이념 서적을 저술해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분입니다. 리영희 선생은 흔히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이 '사상의 은사'라고 불렀던 분이지요. 독재 정권에 의해 여러 차례 구속되어 모진 고생을 했지만 한 번도 지조를 꺾거나 신념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리영희 선생이 통역장교로 복무할 때 겪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리산 공비 토벌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술자리가 마련됐습니다. 그동안의 피로를 풀 겸 소문난 술집에서 거나한 술판을 벌였습니다. 술자리가 파한 뒤 취기가 오른 장교들은 한 사람씩 기생을 데리고 2차를 나갔습니다. 리영희 선생 역시 별다른 죄책감 없이 자기 옆 자리에 앉은 기생과 2차를 나가도록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행들과 어울려 한참 술을 마시다보니까 그 기생이 사라진 것입니다. 화가 치밀어 오른 리영희 선생은 운전병이 모는 지프를 타고 그 녀의 집에 들이 닥쳤습니다. 문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그 기생은 한참을 기다렸다가 나왔습니다. 나와서도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오만한 자세로 내려다보자 리영희 씨는 권총을 꺼내 공중을 향해 발사했습니다. 그러면 허둥지둥 툇마루에서 내려와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기생은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한참을 내려다보더니만 말문을 열었습니다. "젊은 장교님, 아무리 하찮은 기생이라도 그렇게 흐트러진 마음과 몸으로 만나는 일은 없습니다. 당신들은 진주 기생을 잘못 보고 있어요. 나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고 그렇게 천하게 굴지도 않습니다. 잘 들어두세요. 아무리 미천하고 힘없는 사람이라도 총으로 굴복시키려 들지 마세요. 사람이란 마음이 감동하면 총소리 내지 않아도 따라 갑니다." 

이 기생의 너무도 당당한 기품과 위엄에 청년 리영희는 도둑질 하다 들킨 사람마냥 너무나 부끄러웠고 자신의 왜소해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리영희 씨는 그 기생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왔다는 것입니다. 리영희 선생이 세상을 떠난 마당에 새삼 이 일화가 떠오른 이유는 그 기생이 했다는 말 한 마디 때문입니다. 총으로 굴복시키려고 하지 말고 마음의 감동으로 하라는 충고이지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지은 인간을 바꾸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힘을 통하여 사람을 바꾸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반대로 사랑으로 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보내주신 분이 아기 예수님이시지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 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간 후부터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만 눈이 빠져라 기다립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죄인들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성탄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은 단순히 기다리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 되시기 위하여 스스로 낮아지시고 천해지셨습니다. 가장 순하고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20여 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던 신영복 선생이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하나님이 죄인 된 우리의 입장을 충분히 존중하셔서 우리처럼 죄인이 되셨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우리의 입장을 헤아리셔서 우리와 같이 되신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사랑의 결정판이 예수님의 성탄이지요. 


<천민의 대명사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진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본문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본문은 목자들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외곽 어느 한적한 곳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목자는 가장 비천한 직업입니다. 양치기, 즉 목자는 사람이 아닌 양을 쳐야 합니다. 지금도 중동 지역에 가면 목자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이 양떼를 끌고 다닙니다. 그만큼 보잘 것 없는 일이라는 말이지요. 

하물며 예수님 시대의 목자는 천민이었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늘 짐승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까 옷도 아무렇게나 막 입고 다녔고 먹는 것 역시 변변치 못했습니다. 옷은 언제나 땀 냄새와 짐승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동네 사람들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다들 코를 틀어막고 피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목자들은 주로 유대 광야에서 늑대나 들짐승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돈 많은 부자들로부터 고용된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주인이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양들을 끌고 다녔기 때문에 도둑이나 사기꾼들이 많았습니다. 주인 몰래 양을 팔아서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예수님 시대에 일반인들로부터 멸시 천대를 받았던 삼대 직업이 세리와 고리대금업자, 그리고 목자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다는 이 엄청난 소식이 전혀 뜻밖에 이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습니다. 왕이나 권세 가진 자들이나, 부자들, 제사장들이 아닌 미천한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예수님의 성탄 소식을 듣는 목자들은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는 이들'이었습니다. 아마 목자들이 밤낮으로 나누어서 양떼를 지켰겠지요. 그러므로 낮이 아닌 한 밤중에 천막 밖으로 나가서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은 목자들 중에서도 계급이 낮은 이들입니다. 군대 용어로 말한다면 짬밥 그릇 수가 작은 '쫄따구'라는 말이지요. 

주의 사자, 즉 천사가 목자들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니 목자들이 무서워 한 것은 당연합니다. 천사가 이들에게 전해준 소식이 무엇입니까? 10-11절을 보세요.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다는 소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큰 기쁨'은 헬라원어로 '카란 메가렌'입니다. 메가톤 급의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소식은 좋은 소식인데 메가톤 급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자녀가 명문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 남편이 승진했다는 소식, 로또 복권이 당첨됐다는 소식, 세상의 그 어떤 좋은 소식도 예수님이 탄생 소식보다 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될 수 없습니다. 죄인인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나와 함께 이 땅에 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내 곁에 찾아오신 소식이기 때문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가장 낮고 천한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예수 탄생이라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갑자기 돌발적으로 전해집니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은 이사야 61: 1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오심을 해석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아기 예수님을 모실 빈 방을 준비합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가난한 이들, 억눌린 이들, 직장을 잃고 실의에 빠진 이들, 신용불량자가 된 이들, 자녀가 원했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 큰 병에 걸려 고통 속에 있는 이들, 소외되고 낙심한 이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이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중에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몹시 가난한 부부가 서로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주고 싶은데 돈이 없습니다. 이리저리 궁리하던 아내는 자기의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 판 돈으로 남편의 시곗줄을 선물로 삽니다. 다른 한 편, 남편에게는 대대로 내려오는 귀중한 시계가 있는데 그 시계에는 시곗줄이 없습니다. 그는 시곗줄이 없기 때문에 시계를 차지 못하고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그 하나밖에 없는 시계를 팔아서 아내의 고운 머리칼을 위한 예쁜 머리 장식 핀을 삽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장 필요는 했지만 이제 아무 쓸모가 없는 선물을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가난하지만 서로를 진실하게 사랑하는 애틋한 부부의 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일 년 중 최대의 명절이 크리스마스 시즌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선물을 마련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주고받는 것이 미국의 풍속입니다. 물론 경기가 잘 풀려서 돈이 많이 생긴 사람들은 값비싼 선물을 주고받겠지요.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마음만 있지 가벼운 선물 하나 살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지만 물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합니다. 가난해도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실만 전해져도 이번 성탄은 따뜻한 시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친구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금년 한 해는 교회마다 헌금이 다 줄고 참 어려운 한 해였다고 합니다. 경기가 언제 좋아질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빈부격차는 날이 갈수록 뚜렷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가장 가난했고 비천했던 목자들에게 전해졌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오늘 우리에게도 전해질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모시기 위한 방을 준비해야 합니다. 빈방이 준비될 때에만 아기 예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 바로 전, 누가복음 2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라." 아마 나중에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서는 땅을 치고 후회했을 사람 넘버원이 여관주인이었을 것입니다. 돈 버는 일에 너무 욕심이 많았기 때문에 만삭이 된 마리아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우리의 마음을 비웁시다. 빈방을 준비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선물을 주시는 분인데 우리 손에 뭔가를 가득 움켜잡고 있는 한 그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손을 비워야 합니다.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에 최고의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 날에는 사람들이 빈방을 주지 않아서 예수님은 짐승들이 잠자는 축사의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아기 예수님을 모셔드릴 빈방을 준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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