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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기다리는 사람들 (눅 2:2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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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사람들 (눅 2:25-39) 
 

<아날로그 시대의 기다림이 그립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기다리지 않고 금방 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유난히 조급합니다. 음식점에 가서도 주문한 음식이 금방 나오지 않으면 잘 참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요식업에 성공하려면 주문한 음식을 빨리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관공서 같은 곳에 가서도 줄이 길게 늘어서 있으면 그냥 돌아오고 맙니다.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이 없기 때문이지요.

현대인은 속도전 속에서 삽니다. 다른 사람보다 정보도 빨리 얻고 더 빠른 속도로 주어진 일을 해치워야지만 성공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 아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기다릴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참을 줄을 모릅니다. 디지털 시대, 인터넷 시대의 비극이지요. 

그 옛날 아날로그 시대를 경험했던 분들은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미덕인 줄 너무나 잘 압니다. 요즈음처럼 인터넷도, 이 메일도, 핸드폰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우편으로 오가야 하거나 내가 직접 현장에 가봐야 하는 시대였지요. ‘어깨동무’나 ‘학원’과 같은 잡지가 있었는데, 혹시 내가 기고한 글이 실린다고 하면 몇 달을 눈이 빠져라 기다렸습니다. 어디 좋은 소식이라도 올라치면 우체부 아저씨가 오기만을 목을 빼고 기다렸습니다. 

청춘 시절 연애를 할 때도 그랬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다방이나 카페에서 만날 약속을 하다가 바람을 맞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다섯 시간, 혹은 열 시간씩 무조건 기다리는 경우도 왕왕 있었습니다. 요즈음 아이들한테 이런 말을 하면 이해를 못합니다. 못 간다고 문자 메시지 하나만 날리면 끝날 것을 왜 그렇게 하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교회 건축도 그렇지요. 지금 우리교회의 건축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는데 우리 생각 같아서는 하루라도 빨리 완공되었으면 좋겠지요. 하지만 튼실한 건물이 되기 위해서는 기초공사부터 철저히 다져나가야 하고 오래오래 기다려야만 합니다. 빨리빨리 완공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반드시 부실공사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제일가는 미덕도 잘 참고 잘 기다리는 데 있습니다. 기도하자마자 금방 응답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하루아침에 신앙이 좋아지기도 어렵습니다. 엄마 뱃속에 들어가 있는 아기는 열 달을 기다려야지만 건강한 생명체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밥이 다 되기도 전에 전기밥솥을 열어서 안 됩니다. 너무 조급하면 죽을 먹게 됩니다. 좋은 신자가 되는 것도 기다리고 또 기다릴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일가는 성품도 기다리시는 데 있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우리처럼 성미 급한 분이었더라면 지구는 수천 만 번도 더 멸망을 당했을 것입니다. 집나간 탕자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베드로 후서 3장 8절과 9절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아마도 이와 같이 하나님 사랑의 제일가는 속성이 ‘오래 참음’에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 역시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의 14가지 속성을 말할 때 제일 먼저 ‘오래 참음’을 언급한 것 같습니다. 


<어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기다림 사연’>

오늘은 대강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앞으로 1주일 정도만 지나면 성탄절이 옵니다. 대강절 혹 대림절은 말 그대로 아기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미 이 천 년 전에 예수님의 초림은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늘날의 대강절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예수님의 강림을 어떤 자세로 기다리십니까? 본문에서 중요한 교훈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예수님의 강림을 열렬하게 기다렸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모두 백발노인입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렸고 또 기다렸던 꿈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지요.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두 가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첫 번째로, 정결례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레위기 12장 1절로 8절을 보면 아이를 낳은 여인에 대한 정결례가 나옵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칠 일 동안 부정합니다. 팔 일째가 되면 남자 아이는 할례를 받습니다. 산모는 그 부정한 칠 일 동안 이후에도 삼십 삼일을 더 집안에 머무르면서 피로 더럽게 된 몸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십 일 동안의 정결 기간이 끝나면 산모는 번제로 양 한 마리와 속죄제로 비둘기 한 마리를 제사장에게 가져와야 합니다. 피로 더러워진 몸을 정결하게 하기 위한 희생 제물이었지요. 만일 집안 형편이 가난해서 양 한 마리를 바칠 형편이 못 되면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하면 됩니다(레 12: 8). 예수님의 부모님은 가난했기 때문에 번제물과 속죄제물로 비둘기 두 마리를 바친 것 같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예수님이 맏아들이었는데 사람이든 짐승이든 처음 난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쳐야만 합니다(출 13: 2, 12-16). 

바로 이러한 이유로 아기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 두 사람이 환영합니다. 시므온과 안나이지요. 두 사람 모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는데, 한 분은 할아버지였고, 다른 한 분은 할머니였습니다. 먼저 할아버지 시므온의 기다림을 살펴봅시다.


시므온의 노래

25절을 보세요. 예루살렘에 살던 시므온에 관한 네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시므온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성령이 그 위에 임했습니다. 의롭고 경건하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니 메시아의 탄생을 학수고대했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저 먹고 살기에 바쁘던 시대에 시므온은 남다른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지요.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메시아 예수님을 만난다는 소망이었지요. 

그런데 시므온에 관한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즈음에 이스라엘은 그 어느 때보다 위로가 필요한 때였습니다. 나라가 망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정치적인 압제와 경제적인 수탈이 뼈에 사무쳤습니다. 민족적인 정체성과 자존심은 무너진 지 오래 되었고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넘쳐 났습니다. 

바로 이러한 절망과 슬픔이 사무쳤을 때 시므온은 이스라엘을 위로해 주실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26절에 보면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소망에 대한 확신 때문에 시므온은 쉽게 눈을 감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도 참고 또 참으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데 시므온이 노인이 될 때까지 가슴에 품었던 그 소원이 지금 눈앞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메시아를 본 것이지요. 그러니 시므온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시므온은 6주 정도 지난 아기 예수님을 팔로 받아서 안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29절로 32절을 봅시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 '시므온의 노래'를 라틴어로 ‘Nunc Dimittis’라고 부릅니다. 29절의 말씀처럼 “주님,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 달라”는 뜻이지요. 이제 그토록 대망했던 메시아를 자기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노래입니다. 이제 자기 소원이 다 이루어졌으니 평안히 눈을 감게 해달라는 기도문이지요. 교회사에 있어서 이 시므온의 노래는 밤중에 잠자리에 들 때 하루를 정리하는 마지막 기도문으로 애송되었고, 죽기 직전 임종시의 찬송으로도 널리 사랑을 받았습니다. 


84년의 한(恨)을 푼 과부 할머니 안나

이제 또 한 사람, 안나 할머니의 기다림을 살펴봅시다. 36절과 37절을 보면 안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안나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이었습니다. 시므온은 누가 아버지인지 가계에 대한 소개가 없는데 안나는 아버지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 시므온과 달리 집안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나는 여선지자였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볼 때 여자 선지자는 몇 명 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안나는 대단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안나에게 주목하는 것은 “나이가 매우 많았다”라는 사실과 “결혼한 후 칠 년 동안 남편과 함께 생활하다가 과부가 되었고 팔십 사세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팔십사 세’라는 표현을 어떤 이는 그냥 연령이 ‘팔십사 세’라고 해석하고, 또 어떤 이는 과부가 된지 팔십사 년이 되었다고 해석을 합니다. 둘 다 가능성이 있다고 볼 때, 만일 과부가 된 지 팔십사 년이 되었다고 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의 처녀들이 열네 살에 결혼한다고 할 때, 스물한 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셈이지요. 결혼 생활의 기쁨을 맛본 것은 겨우 칠년에 불과하고 그 칠 년의 열두 배인 84년을 과부로 지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외로웠고 슬펐고 고달팠겠습니까? 

그런데 안나에 관해서 발견하는 아주 특별한 정보는 37절 후반부입니다.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라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 교회를 지켜 온 많은 할머니 권사님들이 생각납니다. 남편을 일찍 잃고 청상과부가 된 뒤, 오로지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낙으로 삼고 밤낮으로 금식하며 뜨겁게 기도해 오신 할머니 권사님들, 바로 이 분들이 현대적인 의미로 안나 할머니인 셈이지요. 하늘처럼 기둥처럼 여기던 남편을 잃고 장장 84년을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기도하는 것을 낙으로 삼아온 분들, 안나 할머니들입니다. 

안나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성전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며 기다렸던 이유는 하나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기다림에 대한 소망이 없었다면 안나는 재혼을 해서 팔자를 고쳤다든지, 아마 다른 길로 접어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장차메시아가 나타나 온 세상을 구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로한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외로움도 슬픔도 생활고도 다 참고 기다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안나가 만일 과부된 지 84년이 지났다면 나이는 백 살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기다려왔던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났을 때 안나가 어떻게 했습니까? 38절을 보세요. 먼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당연하지요. 자기의 꿈을 이루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런 뒤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했다는 것이지요. 


<밀물 때를 기다리며>

시므온 할아버지나 안나 할머니는 기다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위로하시고 온 세상을 구원해주심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은 결코 수동적으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철두철미 믿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꿈이 산산조각 나는 것과 같은 때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기다림은 적극적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으니까요. 시므온 역시 백발이 성성하도록 메시아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시므온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제 됐습니다. 이제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게 해주십시오.” 

안나 할머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혼의 기쁨에 젖은 세월은 겨우 칠 년이었습니다. 구약에서 고아와 과부는 모든 사람이 돌봐야 할 가장 소외된 계층 일 순위가 아닙니까? 얼마나 외로웠고 힘들었겠습니까? 하지만 안나는 메시아의 탄생을 기대하며 성전을 낙으로 삼았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는 낙타 무릎이 되었습니다. 오로지 메시아를 기다리는 소망 하나로 슬픔과 고독을 참아냈던 것입니다. 

강철 왕 카네기의 집무실 한 쪽에는 낡고 커다란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배 한 척이 모래와 진흙 바닥에 처박혀 있는 그림이지요. 노는 아무렇게나 함부로 버려져 있습니다. 배가 뜰 가능성이 거의 없는 환경입니다.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도 아니었기에 대단한 명화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카네기는 왜 이 그림을 소중하게 여겼을까요? 그 그림 밑에는 이런 구절이 쓰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이 그림은 젊은 카네기가 세일즈맨 시절에 방문했던 한 노인의 집에 걸려 있었던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는 그 구절이 너무도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에 그 노인에게 사정을 해서 얻게 되었습니다. 카네기는 인생의 어려움이 닥쳐올 때마다 이 그림을 보면서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을 썰물 때라서 물이 빠지고 배도 띄울 수 없는 형편이지만 이제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밀물 때가 오고야 만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조금만 참고 기다려 보세요. 반드시 밀물 때가 오고야 말 것입니다.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낙심하지 마세요. 시므온 할아버지도 안나 할머니도 기다렸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전 건축의 꿈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안나처럼 성전을 중심으로 기도하고 기다립시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힘들고 외롭고 지쳐 있습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예수님이 오셔서 여러분을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아주 중요한 미덕은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기 까지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야곱이 21년을 기다린 나머지 금의환향해서 형과 화해했습니다. 요셉이 13년을 기다려서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모세는 80년을 기다려서 출애굽의 영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는데 430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나서야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우리도 다른 이들을 기다려 줍시다. 남편이 돌아오길, 아내가 돌아오길, 자녀들이 돌아오길, 잠잠히 참고 기다립시다! 

생텍쥐페리가 쓴 ‘어린 왕자’에 여우와 어린 왕자가 만나는데 여우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4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으면 나는 3시부터 마음이 설렌단다.”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은 설렘을 주기 때문에 기다리는 그 시간이 훨씬 더 좋습니다. 이 세상에서 비길 데 없는 큰 기쁨과 위로를 주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우리 설레는 마음을 갖고 기다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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