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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눅 5: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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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눅 5:17-26)


1. 시작

가장 고통스럽고 아픈 순간은 그 고통 자체라기보다는 그 고통을 함께 져줄 사람이 내 옆에 없다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그 외로움의 순간에 누군가 내손을 잡아줄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보다 더 고맙고 감사한 일도 없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아무리 속으로 되뇌어도 외로움과 고통이 밀려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으려고 몸부림 칠 때 하나님은 그 때 내가 생각지 못한 돕는 손길을 통해서 우리를 위로 하십니다.

오늘 본문 속의 주인공들을 통해서 내가 현재 서 있는 위치는 어디이며, 있어야할 자리가 어디인지 함께 확인하는 은혜의 시간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 중간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아마 설교도 많이 들었을 법한 본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걸 택했냐고요? 제 맘이지요. ^^ 저는 이 본문에 나오는 지붕을 뚫고 내려진 중풍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각에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저와 함께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 갈릴리 바다 북쪽에 자리한 바닷가 마을 가버나움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시겠습니다. 갈릴리는 역사의 중심 지역이 아니라, 변두리 지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항상 그런 곳에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갈릴리 지역에는 역사에 유래 없었던 기쁨과 밝은 빛이 비취는 것 같은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귀신들이 사람에게서 쫓겨나가고, 온갖 병자들이 의사의 손을 거치지 않고도 회복함을 얻고 저주받은 질병인 나병 환자가 나음을 얻는 바로 그 역사의 한 가운데 갈릴리 지역이 있었고 이미 가버나움도 그 역사를 맛보았습니다.

바로 그 능력의 사람 예수가 가버나움으로 돌아온다는 소문이 마을 전체에 좌-악 퍼졌습니다. 온 마을은 예수님의 방문으로 떠들썩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신 것을 듣고 경이로움을 경험했던 가버나움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 원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그 동네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직접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 믿었던 한 친구에게 마음의 소원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그의 친구 정훈이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정훈이는 어려서부터 혼자서 가정을 이끌어가고 있었고, 너무도 성실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착실하고 다른 사람들의 신망을 얻고 있던 그 친구가 어느 날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아파서 몸져누웠습니다. 백약이 무효여서 그동안 모아 두었던 많은 재물도 다 소진하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 친구에게는 그 병든 친구가 제일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중전화로 휴대폰으로 그리고 통화가 안 되는 친구는 집으로 달려가서 “정훈이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가보자”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 중에 한두 명 정도는 가기 싫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당장 내 코가 석자라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친구의 강권에 못 이겨 함께 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예수님이 오시는 아침 일찍부터 열심을 내어서 준비를 하고 친구의 어머니를 설득하고 그 친구에게도 예수님께 가보자고 침을 튀기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병든 친구 정훈이도 마음 한 편으로는 ‘거참 대단한 분이시네’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다고 내 병도 고쳐질까?’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어찌나 난리를 치는 지 ‘그래 밑져야 본전이다.’하는 마음으로 친구들에게 자신의 불편한 몸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정훈이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꿈이 부푼 친구들에게 묻어서 가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하기 힘든 분들은 묻어서라도 꼭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친구들은 들것을 준비하고 오늘 자신들이 만나게 될 기적적인 사건에 흥분된 표정과 마음으로 친구 집으로 와서 들것에 친구를 눕히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예수님이 계시다는 집으로 한 걸음에 달려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반드시 그 병을 고칠 거라는 그들의 믿음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바로 듣는 데서 출발합니다. 비록 그것이 소문이었거나 직접 보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들 속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과정, 듣고, 보고, 경험하는 과정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서부터 옵니다.

우리가 하는 별 재주 없어 보이는 전도가 중요하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중요하고 성경공부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는 거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예수님을 만나러 온 첫 관문에서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집에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왔는지 도무지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을 만큼 복잡했습니다. ‘야 이거 오늘 오지 말라는 신호 아니야?’하는 생각들이 머리를 휙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네 명의 친구들은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너와로 된 지붕을 뜯어내고 줄을 들것에 매어서 내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의견이 모아지자마자 그들은 줄을 구해다가 들것의 네 귀퉁이에 묶고 그 집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위태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드디어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계신 곳 바로 위의 지붕을 뜯어야하기 때문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서 위치를 확인하고 지붕을 하나씩 벗겨낸 다음, 드디어 예수님 바로 앞으로 친구를 달아 내릴 위치를 잡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된다.’  네 사람 모두가 구슬땀을 흘리며 호흡을 맞추어서 드디어 친구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놓았습니다.

마음에 확신과 감사를 통해서 비록 응답받았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중풍병자와 네 사람이 당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들려왔던 예수님의 이야기를 먼 나라의 이야기로 들은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께서 내게 직접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길이 막히자 지붕을 뚫고서라도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도 내 안에서 자연히 생겨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이고 그 열정적인 마음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 그 열망은 더 커지고 강해집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도 열정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었을까요? 그 친구 정훈이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었고 친구의 필요를 채워주기를 원하는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제대로 표현되고 문제를 해결 받는 기회를 제공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믿음이 자신들의 사랑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위험도 감수하고 손해도 감수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다 무시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더 중요한 것,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은 친구들의 인간적인 사랑의 마음보다 그들 모두가 바라보고 있던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본문 20절 말씀에서 “왜 ‘그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지 않으시고 하필이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하셨을까?” 

복음서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구원 받는 모습이 나옵니다. 한 개인이 간절함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오는 경우, 처참한 지경에 있는 개인을 예수님께서 찾아가시는 경우, 그리고 오늘 본문처럼 상호 협력에 의해서 예수님을 찾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이라는 단어는 문법적으로 3인칭 복수를 지칭할 때 쓰는 대명사입니다. 그것은 나와 너를 제외한 그와 그녀를 합쳐서 2명 이상일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그들 중에는 적어도 2명 이상의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에서 그들 중에 몇 %가 믿음이 있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사항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정확하게 몇 사람이 침상을 메었는지 밝히고 있지 않지만, 마가는 네 사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네 사람과 중풍병자가 어떤 사이였는지도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 사이에 얼마나 끈끈한 애정이 있었는지도 논외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가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에 있다고 하는 현재 상황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을 옮기는 일을 두 사람이 아니고, 세 사람도 아니고, 네 사람이 들고 뛰는 장면이 제게는 너무 크게 와 닿았습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업어도 되지 않았을 까 싶습니다. 물론 엄청 힘이 들 겁니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수고가 아름답습니다.

지붕을 걷어내고 구슬땀을 흘리며 서로를 쳐다보면서 눈을 맞추고 자리를 잡고 내려가는 환자를 배려하며 그를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리는 그들의 수고가 참 아름답습니다.

교회가 큰 행사를 치를 때마다 도움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그 네 사람 중에 한명이 되어주시는 분들이 아름다운 것도 동일한 이유입니다. 제 눈에만 그럴까요? 우리 주님께서도 그렇게 보시고 기뻐하실 겁니다.

그러나 똑같이 보고 듣고 경험했지만, 전혀 다른 편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관심이 없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인 바로 서기관들과 율법 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들이었고, 그 시대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인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자신들을 고달픈 삶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권세와 힘과 능력을 가진 메시아를 학수고대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 땅에서는 잘 먹고 잘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복은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의 일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을 향해서 마 16:2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라고 예수님의 죽음을 자신이 막겠다고 하는 베드로를 향해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죽음을 간과할 수없는 제자의 외침,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의리가 있고 멋진 대사이고 명장면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진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사단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내가 얻을 유익과 이 땅의 일에만 관심을 두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기를 원하는 그 일에 온 관심을 기울이는 진짜 복 있는 사람들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아픔과 고통 속에 허우적거리는 한 사람, 그 당사자만 보신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와는 아무 상관없는 마을 주민이었을지도 모르는 그 네 사람과 한 병자..........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중풍병자처럼 누워있는 자리입니까? 그 네 사람처럼 누군가를 예수님께로 옮겨가는 자리입니까? 어떤 자리이든지 고민하지도 실망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그 두 자리를 수시로 오락가락 하면서 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거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나의 무능함을 고백하고 인정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기댈 때 은혜를 입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시면 다시 일어나서 나보다 약한 지체들을 세우고 나를 일으켜 세우신 그 하나님 앞으로 그들을 인도해가는 네 사람 중에 한 명으로 바뀌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전혀 자신의 힘으로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연약하고 가련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너무 힘이 들면 기도할 생각마저도 나지 않는 경험을 해보신 분들은 아실겁니다.

그 때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분에게 오늘 네 사람처럼 침상을 들고 예수님께로 그 사람을 데려가는 분들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나 강한 자라도 중풍병자의 자리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저절로 매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성령 충만함으로 살 수 없기에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직접적인 도움이든지 더 충만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합니다. 그 때 우리에게 기도의 침상이 필요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다른 연약한 지체들을 하나님 앞으로 데려가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주되심을 뼈 속 깊이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새 힘을 공급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처럼 기도는 나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데려가고 내 영혼을 새롭게 하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3. 마지막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봉사와 기도와 삶이 우리 주변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가 될 줄을 믿습니다.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놓고 기도하는 자리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벅찬 가슴을 안고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별로 내키지 않지만 아내가 원하니까, 엄마나 아빠가 원하니까, 목자가 원하니까, 목원들 눈치가 있으니까, 너무 고난이 심한데 도움을 구할 데가 없어서. 

그런 것 때문이라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십시오. 그것이 무엇이든지 여러분들이  예수님께로 나오시기만 한다면 오늘 그들이 보고 경험했던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경험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내 옆 사람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볼만한 믿음이 없다면 저와 여러분이 그들을 옮기는 네 사람 중의 1명이 되고 침상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사람을 받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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