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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마 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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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마 11:2-15)  


제가 대학생이었고 경향교회가 여의도에 있을 적이었습니다. 그때 한 열 명 남짓 되었던 장로님들께서는 주일 오후만 되면 당시 당회장이셨던 제 아버지 목사님의 사택 즉 '우리 집'에 찾아오시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 어머니께서 차려 주시는 점심식사를 '염치없이'(?) 공짜로 잡수셨을 뿐 아니라, 무슨 '빚 받으러 온 사람처럼'(?) 아예 안방을 차지하고 드러누워서 잡담도 나누시고 텔레비전 시청도 하면서 주일 오후의 여가를 즐기셨던 것이었습니다.
  
어느 주일엔가 역시 그런 자리가 벌어져서 서로 대화를 나누던 중에 어느 장로님께서 문득 "장로는 좀 더 있다가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이라는 한탄 비슷한 독백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직 젊은 30대에 '경향교회 제1대 장로'들로 세움을 받고서 사실상 여전히 개척교회라 할 수 있었던 경향교회를 섬기느라고 정말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힘에 부친, 그러나 또한 진실로 '충성스러운' 장로님들이었던 까닭에 나올 수 있었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의 말이 바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깥 서재에 계셨던 제 아버지 목사님의 귀에 들렸던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아버지께서는 '내 장군들이 지금 지쳐 있구나.'라고 생각하시면서 언젠가 이들을 격려해 주어야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얼마간의 시일이 지난 후에 당회원 전체가 어느 기도원엔가 가서 함께 시간을 가지게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그 장로님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왜 여러분들을 이렇게 젊을 때부터 장로로 세웠는지 그 이유를 말해 주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전 인생을 푹 고아서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주님께 바치게 만들기 위해서 그랬습니다."라고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주님 위해 곰탕이 되어라.' - 정말 격려치고는 참 희한한 격려가 아니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그때의 초대 장로님들께서 그 뒤로도 그야말로 '생애 최고와 전부'를 다 바치면서 지금까지 변함없이 충성해 오신 것을 보면 우리 원로목사님의 그 '깊고도 뜨겁기' 한이 없는 '특별한 격려'를 충분히 헤아리셨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장로님들처럼 세례 요한 역시 일시적인 연약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본문 2절과 3절에 "2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기록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시피 자신의 전 생애를 오직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몽땅 다 불살라 바쳤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왜 갑자기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는, 즉 '구약에서 예언된 오실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 당신입니까?'라는 회의의 질문을 하게 되었던 것이겠습니까?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시켜 이 질문을 해 왔을 때 그는 이미 헤롯왕에 의하여 체포되고 투옥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 어둡고 축축하고 차가운 감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된 그는 '내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시라면 왜 나를 구해 주지 않으실까?'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은 평생 광야에서 험한 생활을 하면서도 오로지 오실 메시아의 길을 평탄케 하려는 사명만을 위해 충성을 다해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면회는커녕 무슨 위로의 전갈 하나도 보내지 않고 계셨으니 세례 요한으로서는 인간적으로 크게 낙심이 될 법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실상 우리 예수님은 정말 세례 요한의 말마따나 '그로서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정도로 차원 높고도 심지 깊은 분이셨습니다. 
이제 드디어 이번 주말이면 성탄절을 맞이하게 될 오늘 주일에 저와 여러분은 오직 예수님만이 오직 당신의 제자들에게만 주시는 실로 놀랍고도 신기한 격려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힘이 다하는 순간에도 '우리 생애 전부가 구령운동을 위해 잘 사용'되었다고 위로해 주십니다.

본문 4절에서 6절에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5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세례 요한이 큰 연약에 빠져 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그에게 전해 주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즉 '세례 요한 너도 나를 믿는 믿음에 있어서는 절대로 실족해서는 안 된다.'라고 따끔하게 꾸짖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은 구약 성경 이사야서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의 복음 사역을 예언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는 이 말씀은 '지금 내가 소경을 보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데 가서 세례 요한에게 바로 이런 사실들이 원래 어디에 기록되어 있으며 누구에 관한 예언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전해 주어라.'는 뜻입니다.
  
'당신이 정말 오실 메시아이십니까?'라고 약해진 마음으로 질문해 온 세례 요한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요한아, 구약에 기록된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는지만 한 번 되새겨 보아라."고 대답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비록 세례 요한은 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메시아를 통한 구령운동은 원래 성경 말씀에 예언되어 있던 그대로 조금도 차질 없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줄기차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자면, 세례 요한은 이 일에 있어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이 다 끝났기 때문에 투옥되어 있는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아니 세례 요한은 그 옥중에서 그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사명, 즉 순교까지 해야 할 종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를 옥에서 구출해 내실 이유도, 의도도 없으셨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이 예수님의 대답이 매정하게 들립니까?
'한평생을 오로지 예수님 한 분만을 위해서 송두리째 바친 그 충성스러운 종이 이제 감옥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그토록 피눈물 섞인 호소를 해 왔으면,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옥문을 열고 그를 구해 주시든지 아니면 최소한 그가 갇힌 감방에 하늘로서 오는 한 줄기 신비한 빛이라도 보여 주심으로써 그를 격려해 주셨어야 했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럴 마음만 있으셨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이라면 당신의 그 매정해 보이는 말씀이 사실은 얼마나 뜻 깊은 격려인지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너의 평생은 메시아의 구령운동을 위하여 완벽하게 잘 사용되었으니 더 이상 아쉬워할 것이 조금도 없다.'는 한 마디 말씀이면 비록 갇힌 몸이 되었을지라도 끝까지 실족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순교의 제물로 기꺼이 바칠 사람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잘 아셨던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깊고도 뜨거운 격려이겠습니까? 
수준 낮은 교인은 자기 병을 기적적으로 낫게 해 주시고 집안의 흉사를 경사로 바꾸어 주시고 망하던 사업을 기사회생시켜 주셔야만 '정말 예수님이 날 도와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 정도 되는 신자는 '비록 너의 개인적인 인생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것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네가 지금까지 전 생애를 바쳐 충성해 왔던 하나님의 구속사는 조금도 차질 없이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다.'라는 말씀에도 넉넉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내게 좀 더 축복해 주신다면 내가 주님의 구령운동을 위해 좀 더 크게 쓰임 받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러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여기에도 또 주님의 뜻이 계시는구나.'라고 생각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특히 경향교회 개척 시절부터 충성스럽게 섬겨 오다가 은퇴하신 장로님들, 한평생을 교역자들과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봉사해 오셨지만 이제 기력이 쇠하여진 권사님들, 원로목사님 때부터 '사선을 함께 넘는 군사'처럼 전도와 심방의 전선에서 동역하시다가 사임하신 여전도사님들, 여러분께서는 그 무엇보다 여러분의 '생애 최고와 전부의 것'이 경향을 통한 복음사역에 정말 값있게 그리고 온전히 사용되었다고 치하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넉넉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힘이 다했다고 낙심이 될 때에 이미 나 자신의 전 인생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바쳐진 관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령운동을 위하여 잘 쓰임 받았다고 일깨워 주시는 이 놀라운 격려를 받음으로써 오히려 죽을 때까지도 계속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에 빠질 때에도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으신 사랑'으로써 격려해 주십니다.

7절 이하 11상반절까지에 기록하기를 "7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10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a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무리들 중에는 아까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전해 온 말을 곁에서 듣고 그에 대하여 실망하게 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7절에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고 하셨습니다.
즉 '너희들이 광야에 나가서 보았던 세례 요한은 결코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가 잠시 연약해졌다고 해서 그를 지조 없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깔보거나 비난하지 말아라.'라고 세례 요한을 옹호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8절에서는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라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왕궁에서 좋은 옷 입고 사치하던 사람들과는 전혀 달리 평생 광야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신실하게 충성했던 사역자였음을 예수님께서는 잊지 않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9절과 10절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내 앞에 보내노니 저가 내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의 칭찬은 점점 더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누가 뭐라 해도 나의 길을 예비한 훌륭한 선지자다. 아니, 그는 보통 선지자가 아니라 바로 구약에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을 마지막으로 종합하여 결승점까지 이르게 한 릴레이의 최종 주자에 해당하는 대선지자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11절 상반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의 높임을 받을 수 없는 최상의 위치에까지 끌어 올리시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여자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야말로 지금까지 태어난 모든 사람들 중에 최고로 위대한 인물이다.'라는 극찬 중의 극찬인 것입니다.

당신의 메시아 되심에 대하여 회의적인 질문을 해 온 세례 요한에게 그저 '너의 전 생애는 메시아 구령운동을 위해 잘 사용되었다'라고 간단히 대답해 주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당사자는 전해들을 수도 없는 자리에서 세례 요한을 최고로 높이며 칭찬해 주고 계셨습니다.
비록 지금 한순간의 연약에 빠지기는 했지만 세례 요한이 지금까지 얼마나 강직하고도 결백하게 살아왔는지, 얼마나 희생적이면서도 충성스럽게 오로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전 생애를 송두리째 불살라 왔는지를 우리 예수님께서는 조금이라도 잊거나 깎아내리지 않으셨던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그 진실한 됨됨이를, 그의 진짜 본성은 결코 믿음 약한 사람이 아니며 완전히 실족할 사람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주님께서는 확실히 하시고 기억하시면서 그를 향하여 지금도 털끝만큼도 변함없는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인이 듣는 자리에서 듣기 좋은 말로 치켜세워 주시며 생색을 내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본인은 듣지 못할 자리에서 그 충성스러운 종 세례 요한을 향한 최고의 칭찬과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나타내셨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인자하신 성품'은 정말 놀랍고도 진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신앙생활에 자주 연약함이 찾아든다고 해서 결코 지나치게 실망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신이 스스로 한심스럽기도 하고 밉기도 하며, 그러한 자신을 보는 주위의 눈들은 비난과 질책으로 차 있을지라도, 우리 예수님만은 어제나 오늘이나 조금도 변함없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가끔 의심도 하는 불안한 심령이요 걸핏하면 실족까지 하는 약한 육신이지만, 그래도 주님 앞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해 보겠다고 나름대로 발버둥을 치며 살아온 우리의 지난날들을, 그래도 지금까지 힘을 다해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겨 왔던 우리의 족적을 우리 예수님께서는 결코 가볍게 보시거나 잊으실 분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순간에조차 우리의 진짜 심정을 이해해 주시고, 우리가 그러한 순간의 의심들을 충분히 극복해 낼 수 있을 것까지 신뢰해 주시면서 지금도 위에서 우리를 격려하시며 위하여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 당신의 종이 흔들릴 때에도 결코 무슨 '뒤끝' 같은 것을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런 시험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주님을 알게 될 때에, 저와 여러분은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연약한 꼴을 보였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게 될 것이며 그 결과 더 큰 믿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쪽에서는 자주 연약과 의심에 자주 빠짐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못난 우리를 향하여서도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증해 주시는 예수님을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면서 끝까지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금세에서 어떻게 산다 하더라도 '천국만큼은 틀림없이 확보한 백성'이 되었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11하반절부터 15절의 말씀에 "11b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12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14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우선 1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 백성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우리 생에 있어서 그 얼마나 중요하고도 위대한 사실인지를 상기시켜 주십니다.
바로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서 세례 요한이 제일 위대하다.'고 말씀해 놓고서 이제 와서는 '천국에서는 세례 요한보다 큰 사람이 수두룩하다.'라는 듯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말씀은 사실에 있어서는 결코 상반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 말씀의 강조점은 "천국에서는"이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그 인물의 업적과 됨됨이를 따질 때는 세례 요한이 최고였지만, 장차 저 천국에서는, 즉 일단 천국 백성의 한 일원이 된 사람은 그 누구라도 이 땅에서의 세례 요한보다도 더 큰 사람으로 간주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에서는 아무리 남들에 비해, 위인들에 비해 보잘것없고 미미하게 보였다 할지라도, 어쨌든 그 영혼이 구원을 얻어 천국 백성이 되기만 한다면 그 값어치와 위대성은 세상에서 누가 좀 더 훌륭했고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따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세상에서 남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구원인이 되는 것이 백번 더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계속해서 12절에 보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문장은 원문으로부터 정확하게 번역하기도 어렵고 해석하기도 쉽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우선 여기 '침노하다'는 단어는 '영적으로 적극성을 가지고 온갖 노력과 강한 의지를 다 동원하여 천국에 들어가기를 힘쓰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천국 백성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자는 그처럼 중요한 것을 틀림없이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말 모든 마음과 힘을 다 바칠 뿐 아니라 때로는 핍박까지 감수하고 모든 시험을 극복해 내는 등 최선의 분투를 해야 한다는 교훈인 것입니다.

우리는 혹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자신이 없어지고 무력감이 생길 때마다 바로 이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남들에게 존경을 받는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과 가족을 부양하고 교회를 봉사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능력 있는 인물이 되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에 있어서 최고로 중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혼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놓치면, 이 세상에서 제아무리 열심히 살고 많은 것들을 성취한다 하더라도 마지막 심판날에 가서는 오히려 '지극히 작은 자'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꼴을 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노하는 자'만이 천국을 '빼앗는다'고 아주 강력한 표현으로 우리를 격려해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조금 건강이 약해졌다고, 조금 못 살게 되었다고, 조금 후퇴하게 되었다고 해서 절대로 주저앉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이미 천국을 '빼앗아 놓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확신만 끝까지 붙들고 살면 천국은 그야말로 '따 놓은 당상'인 것입니다.
이것만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고 가면 기독신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인생 실패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천국을 얻는 성도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 즉 '이 세상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그 어떤 위인'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제국은 자국의 젊은이들을 가미가제 특공대로 내몰았습니다.
폭탄을 탑재한 전투기를 몰고 적함에 그대로 돌격하게 될 그 조종사들에게 일본군의 사령관들은 '너희들은 영원한 군신(軍神)이 될 것이다.'라는 말로써 독려했습니다.
죽은 후에도 일본 민족으로부터 대대로 영원히 추앙 받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그 말에 수많은 일본의 청년들이 자기 목숨을 바쳤던 것이었습니다.
죽고 나면 자신이 실제적으로 누릴 수 없는 그 헛된 영광을 약속해 주는 말조차 저들을 그렇게 고무시켰다면, 하물며 '진짜 천당'에서의 '진짜 영생과 진짜 상급'을 약속해 주시는 예수님의 격려를 받는 신자는 어떠하겠습니까? 

성도는 인생에 무슨 일이 닥쳐도 자신은 이미 천국을 소유한 자가 되었다는 확신으로써 끝내 승리하게 됩니다.
아무리 현실에서는 잠시 낭패를 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이미 천국을 소유한 이상 결코 실패자의 인생이 될 수 없음을 확신함으로써 칠전팔기하고 끝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평생을 바로 믿고 열심히 섬기며 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에는 그 결과가 우리에게 뜻밖의 실망스러운 것이 될 때가 가끔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 선한 일에 충성을 다한 성도에게 세상적인 축복 대신에 오히려 '욥의 환난'이 닥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신자라면 그야말로 '토사구팽'(兎死狗烹)처럼 여겨질 일이며, 신자라 해도 마음에 시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섬기느라고 정말 열심을 다했는데 왜 주님께서는 내가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도 도와주지 않으실까?'라는 '세례 요한의 낙심과 연약'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런 성도를 우는 아이 달래는 식의 사탕발림으로 위로하지는 않으십니다.
그 대신에 '너의 전 생애가 나의 구령운동을 위하여 정말 값있게 잘 사용되었으니 끝까지 죽도록 충성해라.'라고 주마가편 같은 말씀으로 격려해 주십니다.
당신의 충성스러운 종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마음 아프지 않으시겠습니까?
  
하지만 그 뜨거운 눈물과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은 뒤에 감추어 두시는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그 때문에 영영 실족하지는 않도록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비록 이 금세에서는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천국에서는 이미 '지극히 큰 자'가 되었음을 일깨워 주심으로써 마지막 결승 테이프를 통과할 때까지 선한 싸움을 계속 달려갈 수 있는 새 힘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고 누가 이토록 깊고도 차원 높은, 뜨겁고도 강렬한 격려를 그 충성된 제자들에게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실 그이가 당신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스'입니다.
성자의 화육강세라는 사상최대의 기적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인으로 변화시키시고 '악인'을 사명인으로 바꾸어 주신 후에 그 중에 한 명도 잃지 않고 끝내 '영화'의 자리에까지 이끌어 주시는 이 놀라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번 성탄절을 통하여서도 큰 기쁨으로 맞이하고 평생토록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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