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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 4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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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마음으로 (사 40:3-5)


2차 세계대전 후 유대인의 유월절에 등장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니마민(Animamin)’이라는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아니마민’ 이란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 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작곡된 곳은 놀랍게도 나치의 학살 현장이었던 공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이 곡을 만든 사람도 그곳에 감금된 유태인이었습니다. 아니마민이란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시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조금 늦게 오십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영원한 평화의 그 날이 땅위에 오리라 나는 믿습니다. 

그 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더딜지라도 오리라 나는 믿습니다.” 내일이 없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실 자가 오실 것이라는 소망을 간직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영원한 평화의 그 날이 땅위에 오리라 나는 믿습니다.” 노래를 부르며 고난의 날들을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나와 이스라엘을 재건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유월절이 되면 ‘아니마민’을 부르며 희망을 기다리며 노래합니다. 

본문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나옵니다. 내용은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입니다. 이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을 의미하지만 본래 뜻은 70년이 아닌 700년 후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선포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길을 예비한 사람은 세례요한입니다. 본문은 그의 사역을 예언한 것입니다. 누가는 본문을 인용하여 세례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였노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메시야 사역을 예고한 것입니다. 

5절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여기의 ‘여호와의 영광’ 은 하나님의 계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은 멸망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고, 바벨론으로 끌려가지만 포로생활 역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고 700년이 지난 후 메시야 탄생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고통이요, 슬픔이요, 눈물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 오시니 회개하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광야와 사막같은 포로 상황에서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야말로 만왕의 왕을 맞이할 때 가로막는 장애 요소들을 제거하게 합니다. 잘못된 것을 고쳐 마음의 길을 예비함으로 구주 예수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지나간 한 해 동안 버리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청산하지 못한 것이나 고치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깊이 생각하고 회개하므로 구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어떤 마음으로 성탄의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까? 
 
첫째로 돋우게 하소서 

서강대 장영희(張英嬉) 교수는 생후 1년 만에 다리를 못 쓰는 소아마비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역경을 딛고 영문학자로, 빼어난 문필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완치되었던 유방암이 척추암으로 전이되었지만 꿋꿋한 의지로 병마를 이기고 1년 뒤 강단에 복귀하여 주변에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힘겨운 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던 그녀는 늘 사람을 사랑하고 인생에 감사하는 태도를 따뜻한 글로 풀어내었습니다. 

장 교수의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 에 나오는 ‘하필이면’ 의 내용입니다. “다른 이의 인생은 별 노력도 하지 않고도 복이 넝쿨 채 굴러드는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내 인생은 꼬이는 일이 이리 많은지” 누구나 몇 번쯤 이런 경험을 가졌을 것입니다. 언젠가 장 교수가 서울 시내를 걷는데 어깨에 새똥이 떨어졌습니다. 서울 인구 가운데 새똥 맞은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데 왜 하필이면 자신이 되어야 하는지 그녀는 ‘하필이면’ 의 운명에 경악했습니다. 자신이 소아마비 중증 장애인인데다가 유방암과 척추암까지 걸렸으니 이런 얄궂은 운명이 하필이면 닥치느냐 푸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장 교수는 ‘하필이면’ 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곰인형을 사서 초등학교 2학년 조카에게 주었는데 반응이 의외였습니다. “이모, 이걸 왜 하필이면 내게 주는데?” 다른 사촌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선물을 자기가 받아야 되는지 고맙게 생각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하필이면’ 도 생각을 바꾸면 감사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나만 손해보고, 나만 억울하고, 나만 기분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그러나 부정적인 ‘하필이면’ 에 대한 사고를 긍정적으로 바꾸게 되면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감사와 축복이 된다고 강조합니다. 장 교수는 ‘하필이면’ 에 대해 생각을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은혜와 복을 주시는가’ 로 바꾸니 마음에 감사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골짜기 같은 마음을 돋우게 된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마음의 깊은 골짜기가 돋우어져야 합니다. 마음에 골짜기가 생기면 어두워집니다. 마음에 어두운 곳이 있으면, 주님을 영접하지 못합니다. 어두움은 빛을 미워하는 까닭에, 빛 되신 예수를 영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골짜기가 생기면 균열이 생깁니다. 두 마음이 생깁니다. 골짜기가 생긴 두 마음으로는 성탄의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평강이 없어지며 여유가 없어집니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부족한 골짜기마다 돋우어야 합니다. 기도가 부족하면 더 많이 기도하여야 합니다. 열심이 부족하면 더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헌신이 부족하면 시간과 정성을 다하여 헌신하여야 합니다. 노력이 부족하면 더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더 사랑하여야 합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더 잘 믿어야 합니다. 이렇듯 부족한 부분이 돋우어질 때 비로소 은혜의 길이 열립니다. 성탄의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마음의 골짜기마다 돋우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낮추게 하소서 

데이비드 에그너(Dave Egner) 회장이 학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학회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발표가 이루어질 예정이었습니다. 발제자 중에 유명한 기독교 학자가 있었습니다. 진행자는 발제자들을 소개하면서 될 수 있으면 그 유명한 학자의 발표에 많이 참석해 달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를 학회에 모시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에그너는 화가 났습니다. “나도 어느 정도 알려진 사람이고, 발표를 준비하기 위해 그 사람만큼 많은 시간을 썼지 않았는가? 학회를 위해 가족들과의 시간도 포기했는데 책임자는 그 사람 발표에만 참석하라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언짢게 느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에게 불쾌하고 평안이 없는 이유가 바로 교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자신의 발표에도 많은 사람을 보내주실 것이라는 확신도 주셨습니다.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나 아닌 다른 사람이 혹은 나의 경쟁자를 나보다 더 낫다고 말할 때, 내 노력과 수고를 인정해주지 않을 때 평정을 잃어버리고 흔들리는 마음이 아닙니까? 그 이유는 바로 자만과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당시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야가 오셨을 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배척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왜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마음속에 있는 교만의 산 때문이었습니다. 우월감의 산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기명예, 자기 존중, 자기 우월에 빠지면 주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교만의 높은 산을 낮추어 겸손의 평지로 만들 때 비로소 주님도 보이고 진리도 보이고 은혜도 얻게 됩니다. 모쪼록 높은 교만의 산을 낮추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평탄케 하소서 

수도사가 친구 어머니의 병문안을 가는 길이었습니다. 먼 길을 걸어가려니 피곤해졌습니다. 햇볕마저 뜨거워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 피곤한 발이 돌멩이를 차 버렸습니다. 그는 발가락이 아파 길 가에 앉아 중얼거렸습니다. “도대체 돌멩이는 왜 여기에 있어서 나를 괴롭힐까?” 그 순간 돌멩이가 갑자기 배로 켜졌습니다.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누가 갖다 놓았을거야” 생각하자 돌멩이는 다시 배로 커져 큰 바위가 되었습니다. 

“이런 바위를 갖다 놓고 나를 괴롭힐 사람은 그 작자밖에 없어” 말하며 사이가 나쁜 사람에게 욕설을 퍼 붓자 바위는 몇 배로 커져 길에 꽉 차 버렸습니다. 그때 한 소녀가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어디 아프세요? 길바닥에 앉아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세요?” 그때 수도사는 생긴 일을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두리번거리더니 “그런 산더미만한 바위가 보이지 않는데요? 아, 여기 주먹 만한 돌멩이가 하나 있네요” 라며 소녀는 돌멩이를 가볍게 집어 길 가로 옮겨놓고 가버렸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이야기입니까?

본문 4절입니다.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사람들이 다닐 수 없는 험한 곳이라도 평지가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여기의 ‘험한 곳’ 은 거친 상태에 있는 마음을 뜻합니다. 분노하는 마음, 화를 내는 마음, 시기, 질투, 원망으로 독이 가득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구주가 오실 리 없습니다. 여기의 ‘평탄케 된다’ 는 것은 물리적 측면에서 길을 곧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즉 구부러진 마음, 비뚤어진 마음을 펴서 곧은 마음의 대로를 만들 때 비로소 주님을 맞이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당시의 나사렛 사람들은 편견과 왜곡의 구부러진 마음 때문에 예수를 영접치 아니하고 도리어 배척하였습니다. 거칠고 구부러진 마음을 펴서 평탄한 마음으로 구주 예수를 기다려야 합니다.

김병종(金炳宗) 화백은 암울했던 80년대, 교수직을 하며 밤낮으로 최루탄이 난무하는 캠퍼스를 오르내리면서 2000여 년 전 바람 불던 유대 광야를 걸었던 예수를 떠올리며 그가 다시 이 시대 저 최루탄 속에 서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표현한 그림이 바보 예수라고 말합니다. 가롯유다를 비롯한 제자들과 추종자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이용해 로마를 무찌르고, 억압받는 민중들의 한을 풀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바보처럼 무력하게 골고다의 언덕을 걸어가신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예수는 바보 자체였습니다. 자기를 비우는 마음, 낮아지는 마음, 죽기까지 복종시키는 마음이 바로 성육의 마음입니다. 

기다리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의 편견과 왜곡을 펴시기 바랍니다. 골짜기마다 돋우고, 높은 산은 낮추고, 험한 곳을 평지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본능적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길들여져 온 더 많이, 더 높이, 더 빠르게, 그리고 더 크게 되는 상승의 본능까지 내려놓아야 합니다. 부디 마음의 골짜기마다 돋우시기 바랍니다. 높은 교만의 산을 겸손의 마음으로 낮추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험한 마음을 다듬어 평탄한 마음으로 만들어 성탄하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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