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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시어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사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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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어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사 35:4)


(사 35: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하나님이 오실 때 자연과 인간에게 임할 거룩한 역사가 강렬하고 엄청 날 것을 말씀합니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라는 외침이 중앙에 위치하며 몇 장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임할 때 심판 곧 보복하시며 갚아주시는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함께 임하게 됩니다.

먼저는 광야에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움이 임합니다.

(사 35:1-2)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곧 영광이 광야에 임할 때 건조한 땅 사막에 꽃이 피고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시온의 아름다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막이란 영어 데저트(desert) 버려지다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사막이 버려진 땅이 된 것은 강수량이 너무 적어서 생명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막에는 물만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기후는 또 어떻습니까? 낮에는 태양열로 달궈진 모래 가 뜨거워 죽음 같은 갈증을 일으켰다가도, 밤이 되면 바람이 심하게 불고 기온이 떨어져 겨울 날 씨처럼 추워지는 대조적인 현상을 보이는 곳이 사막입니다. 더구나 사막의 지형은 시시각각 불어오는 바람에 그 모습이 수시로 바뀝니다.

따라서 만일 잘못해서 방향을 잃게 되면 꼼짝없이 갈증과 낮의 더위, 그리고 혹독한 밤의 추위를 만나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물도 없고, 사방을 둘러봐도 모래뿐인 척박한 땅 사막, 이런 사막과 같은 환경이 우리 인생에 펼쳐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말 그대로 변화무쌍합니다. 탁 트인 고속도로를 달리는가 싶으면 갑자기 비포장도로가 나타나고, 초원이 펼쳐지는가 싶으면 거대한 산이 눈앞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당혹케 하는 것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고, 물도 찾을 수 없는 사막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처럼 되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척박한 사막에서 희망을 봅니다. 절망의 사막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움을 보리라고 소망의 예언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을 처음에 '시온'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루살렘은 B.C. 1000년쯤 다윗이 건설한 도시인데, 시온이라는 말의 뜻은 히브리어로 '사막'이라 하기도 합니다. 왜 하필 사막이란 이름을 지었는지 의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35장은 '사막의 노래'라고 불리는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인간 구원의 역사를 '사막에서 물이 솟아나게 한다.'는 표현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즉 환난과 죽음의 사막에서 물이 솟아서 생명의 출발이 되듯 시온성, 즉 이 새로운 도시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는 장소가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이 이름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좀 여유 있게 살던 두 사람이 사막여행을 성공리에 마친 후 뭔가 남기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합니다. 한 사람은 "기념비를 세우자"고 했고 또 한 사람은 "물을 마시지 못해 고생한 것을 생각해 우물을 파주자"고 했다합니다.  두 사람은 격론을 벌이다가 기념비도 세우고 우물도 파게 되었다합니다. 오랜 세월 후 두 사람이 다시 그 사막의 현장을 찾았을 때 기념비는 모래바람에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 되었고 우물은 계속 남아 지친 사람들에게 '생명'을 제공해 주고 있음을 발견했다합니다.

다음은 개인에게로 전환됩니다

(사 35:3-4)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권능이 두려움과 약함가운데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며 새로운 용기를 가질 것을 선포합니다.
  
4세기 동방의 명설교가였던 요한 크리소스톰이 사회악을 꾸짖고 황후 유독시아의 사치를 나무라다가 위협을 당하여 귀양살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태연히 말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할까? 죽음인가? 아니다. 나의 생명은 그리스도께 감추어져 있다. 내가 사는 땅에서 쫓겨나는 것인가? 아니다.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 나의 소유를 잃는 것인가?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은 없고 떠날 때도 가지고 갈 것은 없다. 나의 보화는 하늘에 감추어져 있다. 저들이 나를 쫓아내면 나는 엘리야처럼 될 것이고 저들이 나를 구덩이에 던져 넣으면 나는 예레미야처럼 될 것이고 굴에 던져 넣으면 다니엘처럼 될 것이고, 돌로 친다면 나는 스데반처럼 될 것이고 목을 벤다면 세례 요한처럼 될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매질한다면 나는 사도 바울처럼 될 것이다.

어느 날 은전 한 닢을 들고 집을 나와 홀로 인생을 개척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난 이 소년은 그러나 자신에게 은전 한 닢보다 위대한 꿈과 능력이 있음을 굳게 믿고 소망 가운데 미래를 개척, 영국에서 존경받는 위대한 사상가, 역사학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토머스 칼라일입니다.
그는 특히 평소 여호수아 1장9절을 애송하며 힘을 얻었다합니다.

(수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늙은 여자 흑인 노예가 여자 주인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씨빌, 나는 네가 지붕 위에서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면, 너는 매우 열광적이라는 생각이 든단다. 그러나 목소리와는 달리 너의 빛나는 얼굴을 보면 왠지 평범한 모습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 이유가 뭔지 모르겠어." 그 늙은 흑인 노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마님, 당신이 내 얼굴에서 본 빛은 나의 빛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반영된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받아 구원을 얻어야 할 불쌍한 모든 죄인들을 위해 그 빛은 대단히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Dawn)

토마스 빌니는 트리니티 칼리지 신학생으로 있을 때, 아무런 위안을 가져다 주지 않는 고행으로 인하여 쇠약해진 몸 안에 무겁게 짓눌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친구들이 에라스무스의 신약성경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듣고 그는 그 책을 갖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금지된 책이었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책 속에서 그의 괴로운 마음을 달래줄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한 권을 구입했습니다. 방문을 잠그고 떨리는 마음으로 책을 펼쳐 읽던 그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펼친 곳에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책을 내려놓고는 소리 질렸습니다.  "뭐라고!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그렇지만 바울은 분명히 구원받지 않았던가?" 그는 그것을 거듭해서 읽고는 환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오 진리이신 주여 제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그 자신도 죄 많았던 사람이 쓴 방법으로, 죄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킬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비로소 빌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고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고통과 그늘 가운데 있는 자를 치료하며 자연이 새롭게 변화됨을 나타냅니다

(사 35:5-7)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맹인, 못 듣는 자, 저는 사람, 그리고 말 못하는 사람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아픔이 온전하게 치유되는 것을 말하며 사막에 풍요가 임할 것을 말합니다

미우라 아야꼬라고 하는 처녀가 있었습니다. 20살에 폐결핵에 걸리고 척추병 때문에 병상에 누워있어야만 하는 아주 불쌍한 여인입니다. 황무지 인생입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사막이요, 광야 인생입니다. 이런 여인을 어디에 쓸수 있겠습니까?

남들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 자신도 쓰레기같은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이 변화가 됩니다. 어떻게 변화가 되었는가?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를 믿은 후로 180도 바뀌어서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았지만 77세를 살았습니다. 1999년 10월 27일에 하나님 나라를 갔는데, 이 여인이 늘 평소에 애송하는 시가 있었습니다. 

작자미상의 시 <아프지 않으면 >입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기적이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뵙지 못할 성안이 있습니다.
아! 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그 무엇일 수 조차 없습니다.
  
이탈리아 제노바(Genoa)에 있는 예수 상은 8톤이나 되는 거대한 동상인데 높은 언덕에 세우지 않고 이 항구도시의 가장 낮은 장소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이름을 '깊은 데 계신 그리스도'라고 붙였다합니다. 제 2차 대전 때 제노바 바다에서 큰 해전이 벌어져 많은 군함이 침몰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합니다. 그래서 바다 속 깊은 곳에 묻힌 수많은 젊은이들을 회상하며 부모들이 헌금하여 예수 상을 봉헌한 것이라 합니다. 이 예수 상은 예수님이 높은 곳에 우뚝 선 예수가 아니라 깊은 곳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울고, 고통 당하시고, 짐을 지시는 분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라 합니다.

끝으로 흩어진 예루살렘으로 시선을 전환시킵니다

(사 35:8-10)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백성들이 걷게 될 거룩한 대로는 맹수와 죄악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합니다.

어떤 미술학교 졸업생들에게 미술을 그려오라고 하면서 '평안'이라고 하는 제목을 내 주었습니다. 졸업생마다 자기가 구상한 평안에 관한 그림을 한 장씩 그려왔다. 그 여러 가지 그림 가운데서 특별히 대조되는 두 그림이 들어왔습니다.  그 가운데 한가지 그림은 산골짜기 호수를 그린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푸른 산이 둘러있고, 그 가운데는 잔잔한 호수가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풀밭이 있었습니다. 그 풀 위에는 소와 양같은 짐승들이 한가롭게 풀을 먹고 혹은 누워 있었습니다. 잔잔한 호수 위에는 몇 사람이 한가롭게 낚시질을 합니다. 산이 조용하고, 물이 잔잔하고 바람이 없고 모든 것이 참 평화롭습니다. 

그 다음 그림은 아주 다른 성격의 그림이었습니다. 바다 앞에는 절벽이 있는데 때마침 바람이 붑니다. 파도가 밀려와서 그 벼랑을 부딪치고는 다시 바다로 거품을 뿜으면서 흘러갑니다. 바람이 심하니 나뭇가지가 꺾여져 내려옵니다. 나뭇잎이 춤을 추며 달아납니다. 언뜻 보면 평안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 그 바위틈 구멍을 들어다 보면, 그곳에 갈매기 한 쌍이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 갈매기 둥지 옆에는 어미 갈매기가 가만히 앉았는데, 둥지 속에는 깐 지가 얼마 안 되는 새끼들이 고요히 눈을 감고 바람이 불거나 말거나 물이 새거나 말거나 고요히 자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둘째 그림에다 일등상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첫째 그림은 평안은 평안한데 그것은 인간의 이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런 평안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이런 폭풍우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평안 이것이 인간이 얻을 수 있는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요란하나 바람과 파도를 꾸짖어 잔잔케 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 모든 환난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은 잘 알아 볼 수 있어 방향 감각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들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학자가 랍비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책들을 읽으며 연구를 했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그건, 자네가 아직 덜 굽혔기 때문일세!"  그리고 나서 또 다른 사람이 랍비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나에게 말해주면 내가 1,000,000원을 주겠소!" 그러자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을 나에게 말해주면 내가 2,000,000원을 당신에게 주겠소"

덴마크가 낳은 세계적인 문학가 안데르센(1805-1875)의 청년 시절의 일화라 합니다. 그는 스웨덴의 여류 소설가 브레멘을 만나볼 계획으로 여객선을 탔습니다. 선장과 대화를 하다가 자기의 여행 목적을 이야기했더니 선장은 안됐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습니다.  "브레멘 여사는 지금 외국 여행중이라는 신문 기사를 최근에 읽었습니다. 모처럼의 방문 여행인데 헛걸음이 될 것 같습니다." 

안데르센은 몹시 낙심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시간 후 선장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습니다.  "안데르센씨, 기적입니다. 당신이 만나려는 브레멘 여사가 바로 이 배에 타고 있습니다."
슬픔과 탄식이 떠나가고 기쁨과 즐거움이 이 길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초대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셀 수 없이 많았다합니다. 그래도 모든 그림의 공통점은 강한 의지와 평온한 얼굴을 한 워싱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합니다.  그는 신앙을 통해 신념과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합니다.  1791년 11월 4일 그의 군대가 세인트 클레어에서 대패했을 때도 그의 얼굴은 매우 평온했다합니다. 참모가 그에게 "우리의 결정적인 패배로 앞날이 걱정됩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합니다. "이겨도 하나님 손안에 있고 패배해도 하나님 품 속에 있소."
   
거룩한 길’로 대표되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의 여정과 그‘길’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1979년 레이건이 대통령 선거 유세를 할 때 한 노파가 소리쳤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나 같은 노인들을 잊지 마세요!" 레이건이 대답했습니다. "잊을 리가 있습니까? 나도 여러분들처럼 노인의 한 사람인데요."

이보다 더 확신을 주는 대답은 없습니다. 나도 당신들과 같은 부류에 속해 있다는 말은, 나도 당신들의 처지와 요구와 필요를 몸소 체험하기 때문에 잘 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인간의 평범한 모습으로 나귀를 타고 오시는 하나님은 "내가 너를 잊을 리 있겠느냐? 나는 너희들 속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속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다시 사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빚을 갚기 위하여 어떤 물건이 팔렸다든지 또는 몰수당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구속의 대가가 지불되면 잃었던 물건을 다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금단 나무의 열매를 위하여 모든 것을 사탄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그 때 이후로 인류 모드는 죄의 노예가 되었고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속을 위한 구매가격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죄에서 해방되고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롬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오래 전에 한 사람이 노예 시장을 방문했습니다. 한참 동안 보고 있던 그는 한 노예에게 다른 사람이 더 이상 경쟁할 수 없을 정도까지 경매 값을 올려 불렀습니다. 값을 치른 후에 그는 그 노예에게 매매 증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는 너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너를 샀다"고 말했습니다. 그 노예는 너무 감격하여서 그를 떠나기를 거부하고 일생 동안 그의 충성스런 하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막대한 값을 치르셨습니다

유대인 교사 랍비가 기분 좋은 얼굴로 흥얼거리며 가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이 "무슨 좋은 일이 있기에 그렇게 즐거운 표정으로 가십니까? 혹시 떼돈을 버셨습니까? 아니면 큰 명예라도 얻으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굉장히 좋은 일이지요. 따라와 보세요" 랍비는 그 사람을 [목욕탕]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자기 자신을 씻는 일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로마인은 동상을 씻으며 과거를 회상하지만, 그것은 의미없는 일입니다. 동상보다는 [나]를 씻어야지요"

목욕탕에 가서 몸을 깨끗이 씻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은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마음과 영혼을 씻는 일입니다. 죄가 모두 사하여지고 정결한 마음과 거룩한 영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며 기도하게 될때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가와 만져주시고 성령의 기쁨과 은사를 주십니다.

교육하고 선교하며 봉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되 성탄절을 앞두고 오시어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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