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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빌 3:12-16)

첨부 1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빌 3:12-16)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3)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인간은 언제부터 온전한 인간일까요?
     
아니면 엄마와 탯줄을 끊고 출생하는 때부터 일까요? 아니면 성장하여 사람노릇을 할 때부터 온전한 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수정 직후부터 온전한 인간이라는 시각이 있습니다. 배아가 엄마 몸에 착상하는 시기, 원시 신경선이 나타나는 시기, 뇌파가 감지되는 시기, 엄마 몸 밖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시기 등으로 인간 존재의 시작점에 관한 논란은 무수합니다. 

그러나 수정이 되고 약 14일이 지나면 온전한 인간이라는데 모두 동의합니다. 분명한 것은 아기가 엄마의 몸에서 출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온전한 인간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물론 온전한 인간이라도 엄마 속에서 자라야 합니다. 태어나서도 끊임없는 보살핌으로 양육되어야 합니다. 사람구실을 할 수 있도록 자라는 데는 그 후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환갑 진갑을 다 지나도 사람답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온전한 인간입니다.
     
인생은 온전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온전해지도록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온전해져서 믿음으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적으로 내세울 만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혈통이면 혈통, 정통성이면 정통성, 열정이면 열정 스스로 생각해도 나무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자랑거리들을 쓰레기와 같이 여겼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바울은 바라는 것을 다 이루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완전한 상태에 이른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미숙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I. 미숙

미숙(未熟)은 일 따위에 익숙하지 못하여 서투르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12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2a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바울은 자신이 이미 얻은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얻다[lambavnw/람바노]는 ‘취하다’, ‘잡다’, ‘가져가기 위해 잡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를 원하였으나 아직 얻은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1. 이미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얻었습니다.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완전하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미 얻었다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는 만만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믿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아직 완전하게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또 어떤 미숙함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다시 12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2a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여기에서 ‘이미’라는 말과 ‘온전히’라는 말은 같은 단어[h[dh/에데]입니다. ‘바로 지금’, ‘벌써’라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이루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이루다[teleiovw/텔레이오오]는 ‘완전하게 하다’, 문자적으로 ‘성취하다’는 말입니다. 아직 끝마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의도한 목표를 완벽하게 끝내지 못하였습니다.
     

2. 이미 이룬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예수님 안에 머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못난 사람인지요. 어느 순간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은 데 아주 자주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갈 길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하원 정수동이 하루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승한 한 젊은 선비가 사공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공은 논어를 아는가?”
“논어라니요? 그게 어디 사는 물고기입니까?”
“허허, 아직 논어를 모르다니 자네는 숨은 쉬고 있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네.”
     
듣고 있던 정수동이 은근히 심술이 나서 젊은 선비에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젊은 선비, 그대는 헤엄칠 줄 아는가?”
“모르는데요.”
     
그때 정수동이 말하기를 이렇게 하였습니다.
“그대야말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네 그려, 지금이라도 이 배가 뒤집히면 논어를 모르는 사공은 살지만,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자네는 물에 빠져 죽을게 아닌가?”
이에 젊은 선비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었다고 하는 것이,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 교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여전히 그 풍성함에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지만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엡 3:19) 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아직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아직 마지막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아직 멀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얻은 것도 이미 이룬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미숙하기에 그지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얻은 것도 아니고, 이미 이룬 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자신을 성숙하기 위하여 달려가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II. 성숙

여기에서 성숙(成熟)이란 몸과 마음이 자라서 어른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숙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키가 자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우리는 미숙함이 많더라도 성숙함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12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2b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은 자신의 삶을 붙들려고 좇아가는 달려가는 삶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달려가다[diwvkw/디오코]는 본래 추적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탐정이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듯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온전한 실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끈임 없이 추적하여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1. 달려가는 삶입니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인생은 달리기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피곤하게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만 달리고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달려 갈 길이 있다는 것이 우리를 살맛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를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희망전도사’로 통합니다. 1990년 마라톤에 데뷔해 20년 동안 전 세계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41회의 풀코스를 완주했습니다. 넘어질 듯 하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같은 그의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는 왼발 길이와 오른발 길이가 차이가 나고 다리 길이도 차이가 나는 등 신체적 약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지구력으로 버텨왔습니다. 승자라고 우쭐하지 않고 패자라고 실망하지 않는 ‘늘 푸른 소나무’같기에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인간 기관차’라고 불린 체코의 마라토너 에밀 자토페크는“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라고 하였습니다. 휴전선을 베고 누워버린 철마처럼 달리고 싶은데 달릴 수 없는 삶은 이미 녹이 슬어버린 삶입니다. 지금까지 달려 온 길이 많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달려가야 길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까?
13절 말씀입니다.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바울은 자랑스럽게 자신은 아직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잡으려고 달려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잡다는 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12절에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3절에 또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잡다’[katalambavnw/카탈람바노]는 힘을 다해 ‘소유하기 위하여 붙잡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2. 잡으려고 달려가는 삶입니다.
     
'아니면 말고!’라는 말처럼 무서운 말도 없습니다. 하다가 안 되면 그만 두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는 사람은 이미 실패하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반드시 기필코 잡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달려가야 합니다. 오래 참고 인애하여 이루어질 때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하여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까?
14절 말씀입니다.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이 무엇을 목표로 달려갔는지는 분명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푯대[skopov"/스코포스]는 멀리서 보이는 표적입니다. 푯대는 망원경으로 보이는 것으로 멀리 있는 목표물입니다. 
     
3. 푯대를 잡으려고 달려가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사격이나 양궁처럼 표적지가 있는 경기를 할 때에 표적이 크게 보일 때 격발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목표가 잘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명중을 시킬 수가 있습니까? 사람들은 목표가 희미하여 질 때 실망합니다. 목표가 분명하지 않을 때 낙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새겨놓으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달려온 길이 험하여 피곤하고 지쳐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우리가 지치고 피곤하여 희미하여진 목표를 이제 다시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목표를 향하여 눈을 떠야 합니다. 원망과 분노로 일그러진 목표를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바쁘고 분주하여 잊고 있던 목표를 똑 바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래 전, 마을 어귀에 트럭을 세워 놓고 과일을 파는 분을 유심히 본적이 있었습니다. 수박, 참외를 파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쪽 나눠주면서 선전을 합니다. 많이 주지 않고 꼭 한 조각씩 주는 것입니다. 더 달라고 하면 사서 먹으라고 하지요. 이렇게 본격적으로 맛있게 먹기 전에 어떤 맛이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을 ‘맛보기’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으면서 누리는 복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복의 맛보기에 불과 합니다. 그 날까지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어떤 자세로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까?
16절 말씀입니다.
 :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우리가 달려가야 하는 출발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우리가 어느 단계에 도달했든지 그 단계에 맞추어서 행하면 됩니다. 마치 군대가 한 줄로 행진해 나가는 것처럼 그대로 가면 됩니다.
     
4. 그대로 푯대를 잡으려고 달려가는 삶입니다.
     
다른 것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한 분만으로 족합니다. 예수님 믿고 의지하고 살아 온 그대로 계속해서 나가면 됩니다.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완성이 아니라 완전을 향하여 매일 매일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완전 또는 성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결코 완성을 선언할 수 없습니다.
     
한 해를 살아오시면서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자랑거리가 있다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머물러 계셔서는 안 됩니다. 결코 자화자찬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칭찬을 다 받으면 하나님 나라에 가서 받을 칭찬이 없지 않겠습니까!
     
얻은 것이 있습니까? 얻은 것이 있다면 즐거운 일입니다. 축하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것에 만족한다면 그 이상의 발전은 없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한 일을 세고만 있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실패와 좌절이 있었습니까? 위로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새로운 것을 향하여 나아갈 새로운 시간을 주십니다.
     
지금 그대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상 받는 것을 목표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십시오. 다시 주님이 오실 때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달려갈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얻는 것입니까? 아직 이루지도 못한 채 달려갈 수는 있는 것입니까? 달려가야 하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III. 온전

오늘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는 듯 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얻은 것도 이룬 것도 없는 우리를 어떤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15절 말씀입니다.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우리는 완전해 진 사람이 아니라 완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를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온전히 이룬 자들입니까? 아니면 온전히 이루기를 소망하는 자들 입니까? 온전히[tevleio"/텔레이오스]는 완성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야말로 완전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온전하여 졌습니까?
     
1. 예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와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 계획이기에 완전합니다. 우리는 온전하고 완전한 구원을 이미 받았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사람 편에서는 온전하지를 못합니다. 실수도 있고, 연약함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이루신 그 온전함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온전하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온전한 사람들이 그 속에 있는 온전함을 나타내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셨습니다. 이것을 믿고 그대로 푯대를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또, 우리가 어떻게 온전하여 질 수 있습니까?

12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2b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을 바라보며 살려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으로 그 사랑에 의하여 잡혔습니다.
     
2. 예수님께 사로잡혔습니다.
     
신앙은 술래잡기와도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일을 하고 첫 번째 한 일은 숨어버린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숨어버린 사람들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가위 바위 보에 져서 술래가 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술래가 되어 사람들을 찾아오셨습십니다. 하나님을 벗어나 험한 곳으로 빠질 것을 염려하여 찾으러 오셨습니다. 
     
어렸을 때 술래잡기를 하다보면 도망쳐 숨느라고 가시철망에 걸려서 종아리가 찢어지기도 했습니다. 언젠가는 짚가리 속에 들어가 숨어 잠이 들어 해가 져서 깜깜해진 후에 혼자서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고 숨어버린 그리고 상처 받고 괴로워하고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인간들을 찾으려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이 나를 잡으셨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술래가 되어 우리를 찾으시다가 우리를 찾으신 것입니다. 술래이신 하나님께 우리는 잡힌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술fork 되어 순례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우리가 영원히 살 집의 계약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모두는 머지않아 이사를 갈 것입니다. 다만 이사하기 전까지 세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삶입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예수님을 드러내 보이셨습니까? 실망하지 마십시오. 자만하지도 마십시오. 계속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왔던지 계속 그 목표를 향하여 가야 합니다.  구원은 은혜로 얻었고 순종으로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대로 쭉 가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오신 예수님을 축하하고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 절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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