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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모든 세대의 행복을 위하여 (눅 1: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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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세대의 행복을 위하여 (눅 1:45-56)


(눅1:45-56)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궁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1. 정의(正義) 분야의 세계적 학자로 평가되는 하버드 대 정치철학 교수 마이클 샌델의 ‘정의 수업’은 지난 20여 년 동안 하버드 대 학생들 사이에서 최고의 명강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의 저서 중 <왜 도덕인가?>에 실린 내용 하나입니다. 우리 시대의 화두는 단연 ‘경제’라고 합니다. 경제적 풍요가 최고의 선으로 자리잡은 경제 중심의 사회입니다. 

이러한 경제 중심의 사회에서 심각한 폐해는 도덕의 타락입니다. 가장 흔한 타락은 ‘뇌물’입니다. 은밀히 공직자들의 호주머니를 채워주고 그 대가로 온갖 특혜와 이권을 챙기는 로비행위를 말합니다. 다음으로, 정부 재정 수입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복권 사업’입니다. 

미국은 과거에 모든 주(州)에서 불법이었는데 언젠가부터 갑자기 대부분의 주 정부 수입의 원천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전통적으로 복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도박과 마찬가지로 ‘복권 사업’을 부도덕한 행위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복권 찬성론자들은 언뜻 타당해 보이는 3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첫째, 복권은 세금을 올리지 않고도 중요한 공공서비스에 필요한 정부수입을 늘리는 손쉬운 방법이다. 세금과 달리 복권은 의무가 아닌 선택의 문제이며 강제적인 것 또한 아니다. 

둘째, 복권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오락이다. 

셋째, 복권을 파는 판매소들(편의점, 주유소, 슈피마켓 등), 복권을 홍보하는 광고회사와 언론 매체들도 정당하게 수입을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복권 사업은 민간 사업자가 운영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는 가운데 정부가 독점하여 막대한 수익을 내고 있습니다. 만일 이 복권 사업이 도덕적으로 합당한 사업이라면 왜 민간기업의 참여를 금지하고 있는가? 만일 복권 사업이 매춘처럼 비도덕적 사업이라면 왜 정부가 그 사업을 운영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딜레마에 빠진 복권 찬성론자들은 바람직하지 못한 상품들, 즉 술, 담배 등에 정부가 ‘죄악세’(Sin tax, 또는 ‘악행세’는 사치금지법의 일종으로 술, 담배, 도박, 경마 등과 같이 사회적으로 요구되지 않는 것들의 매매를 금지하기 위해 부과되는 세금)를 부과한다는 사실을 들면서 복권은 이러한 ‘죄악세’를 물리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합니다. 

복권 구매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행위이며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정부는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기회’, ‘당신도 엄청난 대박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뼈 빠지게 일할 필요가 없다.’ 라는 현란한 광고로 환상을 자극하며 매우 적극적으로 복권 구매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권 광고는 놀랍게도 노동자 계층, 소수민족, 빈민층을 상대로 가장 적극적인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 미국에서도 복권 구매 최고 가망 고객들은 최 극빈지역 빈민가에 빈민들입니다. 극빈 지역 주민들은 1년에 약 100만원 이상을 복권 구입에 썼는데 이는 소득의 8%에 이르는 금액입니다. 반면 부유층 지역 주민들은 1인당 불과 3만원 정도를 썼고 소득의 0.1%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복권 사업이 공공 서비스 사업의 주요 재원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빈민 계층을 대상으로 일종의 ‘죄악세’처럼 거둬들이는 복권 사업이 과연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정부는 더욱 많은 돈과 원활한 정부 재정을 유지하기 위해 도덕적 시민의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운만 조금 따라주면 불행한 운명에서 벗어나고, 끝없는 노동의 악순환에서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 사회는 도덕적 가치들이 통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한 가지 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대기 오염 물질 방출과 환경 오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환경 파괴행위에 ‘벌금’을 물리느냐 ‘요금’을 부과하느냐는 우리가 쉽게 지나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랜드 캐니언에 맥주 깡통을 버리면 100달러의 벌금을 내야 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어떤 부자가 하이킹을 하다가 깡통을 버리고 100달러를 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00달러를 벌금이라기보다는 그저 쓰레기 버리는 비용이 좀 비쌀 뿐이라고 생각한 그의 행동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일까? 

또는 장애인 주차구역에 일반인이 주차하는 경우에 내는 벌금을 생각해봅시다. 어떤 건축업자가 자신이 일하는 현장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장애인 구역에 차를 대고 기꺼이 벌금을 낸다면 그저 조금 비싼 주차장을 이용했다고 여기는 행동에 아무 문제가 없을까? 우리나라 고속도로 경우를 보겠습니다. 버스 전용차선을 일반 승용차가 달리면 벌금이 부과됩니다. 그러나 벌금을 낸다고 여기지 아니하고 조금 더 빨리 가는데, 그리고 편리하게 달리는데 드는 ‘요금’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런 잘못이 없겠습니까? 

아니면 버스 전용차선을 일반 승용차가 이용하려면 추가 요금을 내도록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차라리 그렇게 하면 운전자가 남들에게 욕을 먹지 않고 떳떳하게 그 차선을 생생 달리게 되지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이클 샌델은 ‘좋은 삶’을 위해, 그리고 공정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강한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이를 위해 건전한 시민 덕성을 배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도덕적, 종교적 신념들을 존중하며 타인의 도덕적, 종교적 관점을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어려운 도덕적인 문제들이 해결 되는 것은 아니라고 결론짓습니다.

하지만 시도는 해보자는 것입니다. 저자는 시장 경제 논리 속에 경제가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도덕성의 빈곤과 도덕적 딜레마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벌금’으로 부과되고 경제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 ‘벌금’이 ‘요금’으로 여겨진다면 과연 공정한 사회를 위한 시민 덕성이 배양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공정 사회를 위한 강한 공동체 의식이 함양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경제, 도덕, 공정 사회 구현, 이 세 가지는 ‘좋은 삶’을 위해 땔래야 땔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데 상호관계 속에서 딜레마를 극복해야만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간 사회의 모든 딜레마를 극복하여 ‘모든 세대를 행복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사건임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깨우치고 있습니다. 스텐리 존스라는 ‘마리아의 찬가(讚歌)’, ‘마그니피카트’(Magnificat anima mea Dominum)라 불리는 오늘 본문을 세상에서 가장 혁명적인 문서라고 말했습니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는 성탄절을 위해 본문 말씀에 근거하여 ‘마그니피카트’라는 작품을 작곡했는데 수많은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곡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교회에서 불려지는 가장 위대한 기도요 유명한 노래 중의 하나입니다. 마리아는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하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26-33) 며 수태하게 될 것을 전했습니다. 

마리아가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에 무서워하며 ‘저는 처녀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천사가 ‘성령님이 네 위에 내려오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너를 덮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거룩한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로 알려졌으나 그처럼 늙은 나이에도 임신한 지 여섯 달이나 되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고 말합니다. 약혼했지만 정식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하게 된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약혼자 요셉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불륜으로 의심할 것입니다. 

신명기 법전에서 이미 약혼한 처녀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면 둘 다 돌로 쳐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결혼한 여자가 결혼 후 처녀가 아니었음이 판명될 때도 돌로 쳐 죽일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신 22:23) 

그러므로 약혼한 몸, 처녀의 몸으로 수태하게 된다는 고지는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렵고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마리아가 ‘저는 주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이 밝혀질 경우, 파혼당할 것은 물론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 온갖 비난(非難)과 더불어 자칫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다 맡기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의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도저히 아이를 가질 수 없었음에도 임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면서 “(눅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고 했을 때, 그 말씀이 결정적으로 수태고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이 처리하시리라는 굳센 믿음이 마리아의 심령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렘 33: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여호와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라면 얼마든지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어떠한 대가를 치루게 되더라도 기꺼이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친족 엘리사벳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수태되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그 기쁨과 놀라움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 먼 길을 재촉해 사가랴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벌써 엘리사벳은 성령의 계시에 의해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을 알고 “(눅1:45)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며 반가이 맞이합니다. 

이에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바로 ‘마리아의 찬가(讚歌)’, ‘마그니피카트’입니다. 여기 마리아는 이 찬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일어날 변화, 이 땅에 가져오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무엇인지 정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51-5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눅1:51-53)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찬가’라고 해서 사랑의 낭만이나 기쁨을 기대하지만 전혀 그 내용이 파격적, 그야말로 혁명적인 찬양 일색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노래하면 무언가 아름답고 순수하고 갈등이 전혀 없는 낭만적인 성탄절 밤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노래에는 인간 역사에서 가장 첨예한 갈등과 그 해법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신다.’는 도덕적 갈등,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신다.’는 사회적 갈등,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신다.’는 경제적 갈등 등을 탄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혁명적으로 해결하신다는 것입니다. 


3. 먼저,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신다.’는 도덕적 갈등(딜레마)을 해결하는 정확하고 온전한 방법은 곧 교만함을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실 때, 천박한 직업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목수 요셉의 가정에서 태어나시고, 태어나실 때에도 누울 자리 없어 마구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의 모든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을 최고로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모두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2:6-11)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러 가시는 마당에까지 겸손의 상징인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슥9:9) 이처럼 예수께서는 그의 잉태에서 삶의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시고 몸소 실천해 보여 주셨습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교만하여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 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습니다.’(단5:18-21) 

그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단4: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그런데 그 후 ‘그의 아들 벨사살 왕은 부왕이 교만하여 한 때 짐승처럼 들에서 살았던 것을 알고도 거룩한 성전의 기물들을 가지고 술잔치를 벌이며 우상을 숭배하는 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거만을 떨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기로 작정하시며 다니엘을 통해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단5:18-22)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 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결국 벨사살 왕은 그 날 밤에 죽임을 당했습니다.(단5:22-31) 참으로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요(잠언15:33),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언16:18)가 되는 것입니다. 많이 가졌다고 교만하거나 권세 있다고 교만하거나 하면 하나님께서 ‘흩으십니다.’ ‘흩으신다.’는 말은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B.C.520년경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학개 선지자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학1:4-9) 성전이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지금이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을 때란 말이냐?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살아온 지난날을 곰곰이 돌이켜 보아라.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했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각자의 소행을 살펴 보아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성전을 지어라. 그러면 내가 그 성전을 기껍게 여기고, 거기에서 내 영광을 드러내겠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많이 거두기를 바랐으나 얼마 거두지 못했고, 너희가 집으로 거두어 들였으나 내가 그것을 흩어 버렸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나의 집은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너희는 저마다 제집 일에만 바쁘기 때문이다. 

무너진 성전을 먼저 재건하도록 포로에서 귀환하도록 은혜를 베풀었음에도 생활이 어렵다고, 성전 재건에 너무나 많은 난관이 있다고 해서 성전 재건을 젖혀 두고 자기 생활에만 전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이 기껏 쌓아두고 모아 둔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흩어 버리시겠다는 경고입니다. 다시 말해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가정과 사회 모두가 겸손할 때 모든 세대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겸손하여, 죽기까지 겸손한 생활로 영육간 모든 삶을 높여주시는 영광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신다.’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권세 있는 자들을 낮추시며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1:27-29에서 이렇게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고전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사회적 혁명입니다.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앞에 모든 사회적인 계급과 지위를 내려 놓고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상전(上典)들 위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골 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엡 6: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상전이라고 해서 비천한 자를 실족케 하는 자는 깊은 바다에 던져져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7:1-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더 이상 하찮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작고 비천한 자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감추인 보배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존귀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마18:12-14)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이 땅에 겨자씨같이 아무리 지극히 작고 적은 무리일지라도, 구유에 태어나신 예수 앞에 그들이 존중되는 사회적 혁명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어 사시기 바랍니다.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 앞에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이시어 영광되게 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까지도 존중하며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을 때 모든 세대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일어나야 하는 혁명은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는 경제적 혁명입니다. 여기 “부자”는 자기 중심적이며 자신들의 이익과 결부된 데에만 관심을 가지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리 사욕에만 급급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은혜를 내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랑하는 부를 많이 가질수록 그들의 영혼은 그만큼 공허하게 됩니다. 더욱이 그들의 부가 완전한 절망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쾌락에 빠진 자들, 자기를 영화롭게 만들어 즐기는 자들, 사치 향락에 사는 자들, 각양각색의 부정부패로 치부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18:6-17입니다.

(계18:6-17)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세례 요한은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눅3:7-9)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는 말씀으로 회개하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무리가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세례 요한이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고 대답합니다. 이에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라고 묻자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군인들도 그에게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묻자 요한은 “남의 것을 강탈하거나 거짓 고발을 하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해라.” 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요한을 두고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눅6:24-25)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는 말씀으로 ‘가진 자들’, 다시 말해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자들, 자신의 죄악을 회개할 줄 모르며 교만하고, 자신들의 교육, 학문, 지혜만 자랑하는 자들, 그래서 그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삶의 모든 의미를 두고 사는 자들, 이들에게는 심판 때에 돌이킬 수 없는 큰 화, 곧 하나님의 영원한 사망의 형벌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요한 자들은 미래의 영원한 축복 대신 현재의 육신적 만족을 스스로 택하였고 더욱이 다른 사람을 착취한 대가로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켰으므로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음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또한 “배부른 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느끼지 못하고 영혼의 굶주림을 외면한채 재물을 방탕하게 사용하여 육체의 쾌락을 만족시키는데 급급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웃는 자”는 세상을 즐기며 세상 쾌락에 빠져 사는 자들을 뜻합니다. 이들이 심판 때 대가로 받을 울음은 영원한 것이 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세리장이며 부자인 삭개오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보려고 했지만 키가 작은 데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시려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그분을 보려고 길가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그 곳에 이르러 그를 쳐다보시며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 하고 말씀하시자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기뻐하며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저분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대접을 받다니’ 하며 모두 수군거렸습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속여 뺏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9:9-10)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삭개오에게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지역 사회에 경제적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접되는 곳에 이처럼 경제적 갈등으로 빚어진 사회적 갈등이 일시에 해소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구원의 축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삭개오같은 삶의 변화와 혁명이 일어날 때 가정과 사회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만들어낸 사상이나 이념, 철학이나 도덕 윤리 등으로 인간의 모든 갈등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갈등의 미궁에 빠지게 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그 해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높은 보좌를 비우시고 자신을 낮추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정치, 경제, 사회에 ‘마그니피카트’, ‘마리아의 찬가’가 울려 퍼져야 합니다. 교만한 자가 사라지고 겸손한 자가 대접받는 도덕적 혁명, 누구나 평등하게 대접받는 사회적 혁명, 탐욕이 사라지고 다 함께 사는 경제적 혁명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왜 도덕인가?’ 가 아니라,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태어나셔야만 하는가?’를 깨닫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혜가 충만한 2010년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는 마리아의 고백이 성도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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