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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1) (미 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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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1) (미 2:12-13)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강절 셋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나심을 기다리는 때로 성탄절 앞 4주 동안 교회가 이 절기로 지킵니다. 이 절기를 맞아 우리가 어떤 주님의 나심을 기대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은 벌써 화려한 크리스마스 추리를 만들고 밤에는 반짝이는 전구를 달아 성탄절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는데, 그들은 도대체 왜 성탄절을 기뻐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진정 주의 나심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요? 백화점이나 산타할아버지를 바라는 아이들이나 모두 자기 것을 채우는 마음으로 기다릴 것입니다. 이런 마음과 교회의 마음은 달라야 할 것인데도 교회마저 이런 마음으로 기다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성탄절까지 3번에 걸쳐 미가서를 강론함으로 베들레헴에서 나실 주님이 어떻게 약속되었으며, 그 분은 어떤 분으로 오시는지 알고, 우리가 정말 이러한 주님을 소망하며 기다리기를 원합니다. 또한 이 주님의 나심으로 새겨진 그 주님의 영광을 따라 수고하고 봉사하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는 그런 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미가서는 3편의 설교로 구성되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는 말을 1:2절, 3:1절, 6:1절에 반복합니다. 그래서 미가서는 자연스레 그 구조를 1-2장, 3-5장, 6-7장으로 나누면 됩니다. 

그리고 미가서의 주제는 제가 보기에 7:18절에 있습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이 말씀 중에 오늘 설교제목처럼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라는 말씀이 주제가 되겠습니다. 

미가 선지자의 이름이 가진 뜻은 ‘누가 여호와 같은가?’입니다. 그러니까 미가 선지자의 이름이 곧 주제가 되는 셈입니다. 
  
그럼 이 주는 어떤 분이십니까? 7:18-20절에 말하는 내용이 주님의 어떠하심을 설명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나머지 19-20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즉 이 주님은 백성의 죄를 사하시며 인애와 긍휼로 죄악을 모두 깊은 바다에 던지시는 성실과 인애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그러면 미가 선지자가 어느 때에 활동을 했으며 무엇에 관하여 증거했는지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1:1절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이스라엘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 이후에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남쪽은 유다였고, 북쪽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우리 나라가 지금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북쪽의 수도는 사마리아였고, 남쪽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북한의 수도가 평양이고, 남한의 수도가 서울인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미가서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 줄 알게 합니다. 
  
그럼 남 유다의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때는 어떤 형편이었는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때는 신흥 제국인 앗수르의 위협이 매우 큰 때였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보다 먼저 앗수르에게 히스기야 왕 6년에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남쪽 유다는 웃시야 왕의 영광이 사라진 때였습니다. 유다의 중흥을 이룬 왕이었는데 그가 죽고 요담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우리 조선 시대에 영조, 정조가 중흥을 이룬 왕이었는데 그와 비슷한 왕이 웃시야 왕이었습니다. 앗수르의 위협 앞에 나라가 풍전등화처럼 큰 위기를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하여 유다를 치러 왔기 때문에,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이 때에 이사야 선지자를 아하스 왕에게 보내어 여호와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고 하였으나 아하스 왕은 듣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도움 보다 앗수르왕의 도움을 더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아하스 왕은 앗수르의 부강하게 된 원인이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있다고 보고, 앗수르 왕의 충복임을 스스로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앗수르의 신을 수입하고 신전을 모방하여 여호와의 성전을 개조해 버렸습니다. 패역한 짓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미가 선지자와 이사야 선지자가 동시대에 활동을 했습니다. 이러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 대하여, 즉 그들의 멸망원인에 대하여 열왕기하 17:7-23절에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이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 ... 또 우상을 섬겼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일이라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굳게 하기를 ... 유다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관습을 행하였으므로 ...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그들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고 이방신을 섬겼으며 선지자와 선견자를 보내어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고 하였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미가서의 말씀을 대해야 하겠습니다.
  
3편의 미가서에 나타난 설교는 하나의 설교마다 심판과 구원을 반복합니다. 그러므로 미가서는 3번의 심판과 구원이 반복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패망의 원인과 그로 인한 남은 자들이 돌아와 새로운 왕의 통치와 새 성전으로 함께 하는 나라를 세우는 미래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가서 1-2장은 야곱 족속이 받은 심판과 구원에 대하여 말하고, 3-5장은 야곱의 두령과 선지자들로 인하여 받은 심판을 말하며, 그럼에도 새 왕으로 구원하게 됨을 위로합니다. 6-7장은 여호와 앞에 형벌을 당하지만 여호와의 의를 따라 그의 구원을 바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1:1절은 미가서 전체의 표제 말씀입니다. 2절부터 첫 번째 설교가 시작됩니다. 1장 2-7절은 사마리아의 허물로 심판이 이르게 됨을 말하고, 1장 8-16절은 선지자의 애통함을 말하면서 남쪽 유다도 멸망에 이르고, 예루살렘을 비롯한 10개의 성읍도 다 심판을 받아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됨을 말합니다. 그리고 2장 1-5절은 힘이 있는 자들의 죄로 말미암아 재앙이 임하며, 2장 6-11절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대적함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2장12-13절은 여호와께서 선한 목자로 반드시 자기 양떼를 이끌겠다고 장래의 구원을 말합니다. 
  
1장 2절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처소에서 나오셔서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을 말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족속의 죄 때문입니다. 그럼 사마리아의 허물이 무엇입니까? 사마리아가 우상을 섬긴 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황무지로 만드는 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포도주가 넘쳐나는 땅이 돌무더기로 가득한 땅이 될 것입니다. 
  
1장8절 이하에 선지자가 애통을 합니다. 왜냐하면 북 이스라엘의 죄가 유다까지 예루살렘에까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을 중심한 10개의 성읍도 함께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였습니다. 

16절을 보십시다.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가 크게 벗어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라.” 자식들 때문에 아버지의 머리가 대머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자식들이 포로로 사로잡혀 이방 나라에로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주 비참한 결과를 재앙으로 받게 되었으니 선지자가 울고 애통하며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런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까? 2장에서 비교적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앙은 바로 힘이 있는 자들의 범죄때문이었습니다. 2:1-2절입니다.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밤이면 남의 것을 어떻게 빼앗을까 궁리합니다. 낮이면 가진 권력으로 남의 것을 빼앗습니다. 
  
이건 단순히 약한 자의 것을 강탈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사 가나안 땅을 여호와께서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 삼으심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단순히 탐심을 갖고 남의 것을 강탈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 주심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을 빼앗을 것과 같습니다. 즉 하나님을 대항하는 범죄였습니다. 
  
그래서 2:3-5절에 이들에게 재앙을 여호와께서 그들이 밤에 꿈을 꾸는 것처럼 계획하시고, 이들로 하여금 언약의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멀리 떠나 보내시며 이 땅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선지자들을 통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2:6절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여호와의 선지자로부터 욕을 들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듣기를 싫어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뭐가 급하여서 자기들을 심판하겠느냐고 도리어 대항하였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내 백성의 원수처럼 행동합니다.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을 빼앗고 자기 집에서 내어쫓습니다. 피난민들을 강한 힘으로 약탈하고 어린 자녀들을 자기 종으로 삼아버립니다. 그러니까 아직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남의 것들을 약탈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말해 주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축적한 부로 번영과 쾌락을 추구할 때 이런 일들을 옹호해 주는 선지자들을 원하고, 자기들에게 욕하는 선지자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땅으로부터 떠나라고 합니다. 2:10절입니다. “이것은 너희가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니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 그들이 받을 심판이 매우 크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안식을 약속했던 땅이 이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습니다. 그러니 이 곳이 쉴 곳이 아니니 떠나라고 하며 멸망을 선포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야곱 족속의 전체적인 패역이요 허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2:12-13절입니다.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의 양떼 같이 하며 초장의 양 떼 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 갈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고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영원히 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반드시’라는 말씀을 두 번 반복하여 반드시 언약을 따라 구원을 이루실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는 어떤 분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까? 그는 선한 목자로 자기 백성 앞에 가셔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전에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이스라엘 백성 앞에 올라가서 가나안 땅 7족속을 멸하고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웠던 일을 상기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루살렘마저 죄악의 도성이 되었는데 이제 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서 도성을 새롭게 하고 새 나라를 세우시면 이 약속한 구원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새 구원의 일은 자기 백성을 불러 모으시고 선한 목자가 성문을 열고 그 길을 앞서서 들어가심으로 자기 양떼들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런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범죄 때문에 사마리아는 앗수르에게 망했으며 예루살렘도 결국 바벨론에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선한 목자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남은 자들이 돌아와 앞서 가셔서 새로운 도성을 건설하시는 주님의 나라에 함께 참여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약속을 따라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몸을 입으시고 나셨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말했던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라는 말씀을 따라 주님은 우리 중에 오셨습니다. 선한 목자로 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보십시다. 1-6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주님께서는 양의 선한 목자로 오셨습니다. 양들은 그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를 따라갑니다. 그럼 왜 선한 목자이십니까? 8절과 10절입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둑과 강도는 어떤 자입니까? 양의 것을 빼앗고 죽이려는 자들입니다. 선한 목자는 어떤 자입니까?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자입니다.
  
그럼 어떻게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까? 11-12절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지만, 삯꾼은 이리가 오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군왕들과 권력자들은 모두 어떠한 자들이었습니까? 서민을 위한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위한다고 외친 왕과 대통령은 많았습니다. 그래서 연말이 되면 달동네를 방문하여 털옷을 사준다거나 연탄을 함께 배달한다거나 하는 모습을 매스컴에 보입니다. 정말 이들 중에는 아주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약한 자들을 위하여 친구가 되며, 이웃이요 든든한 배경이 되는 분들이 있었고, 그들의 슬픔에 함께 울어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주는 자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주는 왕은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런 약한 자들을 위한 왕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자기 이름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선한 통치자로써 역사에 자기 이름을 내려고 그리한 왕이 많습니다. 이러한 왕들이 태평성대를 가져와 자기 백성에게 평안한 나라와 부흥을 주었지만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는 일’은 주지 못했습니다. 즉 죽음에서 일어난 생명을 주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왕과 백성의 간격은 그대로 있었고 의로운 백성을 위하여 선한 통치를 힘을 다하여 베푼 왕은 있었지만 죄인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비참한 죽음을 통해서 내어 준 자는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전에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입니다. 백성을 이용해서 모두 자기 이름이나 자기 배부름을 위하여 일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약한 자들을 함부로 짓밟으며 자기 부를 축적한 자들이 이 나라에도 있었고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이 일은 비단 왕들과 같은 권력자들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조금만 남들과 다른 힘과 지식이 있다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 위에 이 권력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심에도 우리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우리가 져야 할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쾌락과 번영을 좋아하고 기뻐하기만 했던 저희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내어 주시며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자리에 앉으셔서 어떤 목자의 음성을 듣기를 좋아하십니까? 그저 내 몸과 마음의 흥겨움을 위하여 노래를 잘하는 가수 왕을 쫓기를 즐겨하십니까? 성공과 부를 준다는 왕의 음성을 듣기를 좋아하십니까? 어떤 왕을 여러분은 따르기를 원하십니까?
  
누가복음 4장을 보십시다. 18-19절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님은 무엇을 하시러 이 땅에 오셨습니까?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시려고 오셨습니다. 그 예언은 무엇입니까? 주님께 성령이 임하므로 그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성령이 임하시면 주님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 가난한 자는 누구입니까? 포로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이들에게 은혜의 시대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이 주님의 일과 그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가 주님의 제자라고 누가복음은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양과 염소를 나누는 심판을 말했습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양들은 오른 편에, 염소는 왼 편에 두실 것입니다. 그럼 오른 편에 있었던 양들은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주님이 목마를 때 마시우게 한 자들이었고, 배고플 때 먹게 한 자들이었습니다. 즉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한 양들이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이라고 마태는 말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섬기는 왕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왕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여러분과 저는 이방인으로 하나님을 몰랐고 조상들이 섬기던 우상 앞에 절하며 살았어야 할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하셔서 그를 따르는 양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이 주님의 음성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수고하며 계획하는 모든 일의 목표는 어디에 있습니까? 학위를 받기 위하여, 문화생활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취미를 배가시키기 위하여 하는 모든 일들은 도대체 그 목표가 어디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모두 자기를 위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과 저의 만족과 행복이 전부 이런 것들이 채워질 때 누려지는 것 아닙니까? 그게 안되면 스스로 절망하거나 낙심하고 괴로워하며 근심하며 심지어 우울증까지 이릅니다. 밤낮으로 우리가 꿈꾸는 일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그 일의 목표는 또 어디입니까? 오직 모든 사람 위에 일등가는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번영과 쾌락을 꿈꾸는 목표도 다 거기에 있지 아니합니까? 뭇사람의 첫째가 되어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이요 만족이라고 생각하고 살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최선을 다하십시오, 부지런히 사십시오, 일분 일초를 아껴서 사십시오. 이런 말들의 목표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내가 무언가 해보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야만 내가 만족이 된다는 것 아닙니까?
  
지금이 전쟁시가 아닌데도 우리는 자신의 쾌락과 번영을 위하여 일합니다. 그건 어떻게 보면 남의 것으로 배불리기와 같습니다. 정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되는 삶으로 사는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목사도 오직 자기 목회의 성공에만 집착합니다.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정당하고 괜찮은 목표를 두고 열심을 다하며 살아간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여러분은 어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어떤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내 일이 잘되고 내가 성공하고 내 가족이 만족케 되는 일에는 열심을 다합니다. 그러나 약하고 가난하며 눌린 자들을 위하여 내 삶을 드릴 것인가는 목표에 없습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이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최고 목표로 삼으셔야 합니다. 강도 만난 이웃에게 선한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이 되셔야 합니다. 내 꿈과 목표가 이들의 친구가 되며 주님이 자신을 버리면서 이들을 사랑하셔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약속하신 분으로 이 세상에 나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하여 앞서 가셨습니다. 복음서에 한결같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셨습니다. 강도의 굴혈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폐하고 자신의 몸으로 새 성전을 지으셨습니다. 이제 그의 몸으로 이루는 새 나라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주님께서 참 자유와 생명을 자기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세상와 죄에 매이지 아니하고 죽음을 이기신 생명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그는 모든 죄악을 바다에 던지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의에 길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가 앞서 올라가셔서 그의 몸으로 이루신 영광의 나라에 우리도 믿음으로 참여하여 그의 나라를 이루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누가 이런 왕을 알겠습니까? 또 누가 이런 왕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겠습니까? 바로 여러분들이 이 왕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양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성탄절을 우리는 어떻게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산타 늙은이로 바꾸어야 하겠습니까? 백화점의 상술 도구로 전락해야 되겠습니까? 
  
하물며 이 왕을 우리는 왜 무시하며 왜 숨기려 하고 마냥 감추려고만 하십니까? 이 성탄절을 통하여 여러분의 이웃이 눈에 들어오시길 바랍니다. 가난한 자에게, 힘이 없는 자, 약한 자, 눌린 자들을 돌아보는 주님의 일꾼으로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게 주님의 나심을 진정으로 바라고 기다리는 우리가 할 일입니다. 선한 목자를 따르는 오른 편에 서게 될 양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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