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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을 본받는 그리스도인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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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본받는 그리스도인 (롬 12:1-2)


어느 글에 보니까 산부인과 의사를 하고 계시는 집사님이 겪었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산모 중에는 자연 분만을 하지 못해서 수술을 받는 산모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술을 받아야하는 산모에게 마취를 하기 위해서 심호흡을 하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산모가 너무 긴장을 했는지 입으로 심호흡을 하지 않고 말로 "심호흡", "심호흡" 하더랍니다.
그 집사님은 너무 긴장해서 말로 "심호흡", "심호흡"을 외치는 이 산모를 보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심호흡을 하라고 하시면 행동으로 심호흡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마치 말로만 심호흡을 외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만한 이야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술만의 신앙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신앙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말씀이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에서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혹여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행함으로 사람을 구원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 인간은 행함으로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가령, 자식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계명을 들이대면서 계명을 지키면 살려주고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살려주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도 못하고, 또 하지 않을 일을 하나님이 하시겠습니까?  물에서 건져놓고 계명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먼저 주고 건질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하고자 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출애굽하기 전에 먼저 율법을 제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노예로 있을 때가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광야에 있을 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율법주의는 기독교의 명백한 이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구원을 위한 전제와 기준으로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한계가 있고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율법들을 다 지켜 행할 수가 없습니다.  힘쓰다가도 넘어지고, 노력하다가도 실족하고 실수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 행하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율법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좇아 살기 위하여 발버둥 쳐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고 원하시는 것은 그 발버둥질입니다.  그와 같은 발버둥질은 우리의 삶에 참으로 유익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노력하다가 실수하고 실족하게 되면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한계와 부족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는 것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절망하게 될 때 우리는 실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을 모르게 되면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실존적으로 붙들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함부로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기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죄를 깨닫지 못하게 되고, 죄를 깨닫지 못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가리켜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율법과 행함이라고 하는 이것을 놓고 볼 때 우리 기독교에는 두 종류의 이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앞에서 말씀을 드린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입니다.  또 다른 이단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사실 이 말은 맞습니다.  여기까지는 정통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즉,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율법과 행함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는 이미 그 영혼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육신으로 짓는 죄는 구원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교회사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던 영지주의적인 이원론자들입니다.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단 중에 구원파가 있습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이단과 마찬가지로 성경적으로 볼 때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이단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이단을 가리켜서 '값싼 은혜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힘쓰는 사람들을 무조건 율법주의자로 매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은 율법을 부정함으로써 본래부터 율법대로 살고 싶어하지 않는 자신들의 원죄적인 본능을 합리화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과 행함을 무시하고 부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중요한 사실은 자기가 죄인인 줄을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 아래서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자는 자신의 한계와 자신의 죄인 됨을 압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법을 부정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한계와 자신의 죄인 됨을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속죄의 은총을 실존적으로 만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율법주의와 값싼 은혜주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와 한계를 알지 못하고 자기 의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되고 실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교회는 값싼 은혜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그냥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은 여전히 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야만 한다는 것에 대하여 아주 약해져 있습니다.  옛날의 크리스천들은 행동하는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때문에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기본적으로 존경과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먼저 정직하고 성실하고 바르며 착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졌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선입견이 우리 한국 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인식은 우연히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함으로써 얻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한국의 기독교가 값싼 은혜주의로 빠지면서부터 더 이상 기독교인들은 행함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습니다.  성실하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믿는다고 교회는 열심히 다니지만,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 관심이 없음으로 사는 방식은 기독교식이 되지 아니하고 철저하게 세상식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크리스천이란 본래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땅의 크리스천들은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제는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을 본받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다니는 것 외에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크리스천과 넌 크리스천의 차이는 "주일에 교회를 다니느냐 안 다니느냐?"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정직하냐?" "누가 더 깨끗하냐?" "누가 더 착하고 성실하냐?"에서 나야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크리스천이라고 다 정직하고 넌 크리스천이라고 다 부정직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평균적으로 볼 때, 보편적으로 볼 때 그래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안 믿어도 정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다 정직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안 믿어도 깨끗하고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깨끗하고 바르게 살아야만 합니다.  거짓말을 하고 거짓된 행동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또 다른 표현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하고 거짓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지은 책 가운데 오래된 책으로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하이벨스 목사님은 우리들의 인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격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평판과는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듣게 되는 평판은 일반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드러난 행위를 보고서 판단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격은 성공이나 성취와도 다릅니다.  성공한 사람들 중에서도 인격이 무너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격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책에서 하이벨스 목사님은 당신의 인격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그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어낼 수는 없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상하고 아름다운 인격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모든 값을 치루셨습니다.  사랑하는 외아들의 죽음을 값으로 치루셨습니다.  때문에 구원은 우리들의 많은 노력으로도 구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행이나 진실한 인격으로도 구원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크리스천의 인격은 지금 혼탁한 세상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려면 크리스천다운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때는 최선을 다합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때는 옷매무새부터 단정하게 합니다.  말투도 다릅니다.  심지어는 걸음걸이도 다릅니다.  특별히 어느 조사에 의하면, 우리 한국 사람들만큼 남들에게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사람들은 못 살아도 잘 입어야 합니다.  없어도 있는 척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어떻습니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들 주변에 보면 사람들이 볼 때에는 반듯하게 살아가지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개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하이벨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즉, 우리의 인격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이라고 말입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하는 우리의 행동에서 진정한 인격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인격이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우리가 하는 행동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당신의 행동은 어떻습니까?
그 때에도 당신은 여전히 크리스천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라도 우리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살다보면 정직하면 손해를 보고, 거짓말을 하면 이익을 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불꽃같은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하고 거짓말과 거짓된 행동을 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절대로 거짓말을 하고 거짓된 행동을 하는 사람의 삶을 그대로 내버려두실 리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그는 늘 정직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정직한 자의 형통함을 믿어야 합니다.  바르고 정직하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의 삶을 책임져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잠언 14장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정직하지 못하게 거짓말을 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잠언 23장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정직하게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자랑스러워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그리고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셔서(잠 15:8) 그의 길이 대로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잠 15:19)  거짓은 후진의 논리이고, 정직은 선진의 논리입니다. 거짓은 사탄의 논리이고, 정직은 하나님의 논리입니다.  사탄은 "정직하면 못 산다"라고 이야기하고, 하나님은 "정직하지 않으면 못 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가지고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임을 나타낼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무엇을 가지고 목사요, 장로요, 집사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직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나타낼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직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듯이 다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으로부터 신용을 얻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이 세상 속에서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레위기 19장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위기를 읽어보면 거기에는 성결과 거룩에 대한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정한 것이고, 이것은 부정한 것이다"는 식의 말씀이 많습니다.  이것은 먹어도 되고, 저것은 먹으면 안 된다는 식의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핵심은 하나님의 자녀는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세대는 순결을 지키기가 너무나 어려운 세상입니다.  정신적인 순결은 물론이거니와 육체적인 순결도 지키기가 어려운 세상입니다.  성(性)이 최고의 오락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하나님은 음행과 간음을 몸 안의 죄라고 정의하십니다.  그래서 음행과 간음을 세상의 그 어떤 죄 보다도 중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우리의 몸을 중하게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성적인 타락은 사탄의 가장 중요한 무기와 전략 중의 하나입니다.  이와 같은 사탄의 전략과 무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요즘 우리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에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고, 유다서 1장 7절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성적으로 가장 타락한 나라 중에 하나가 부끄럽게도 우리 나라입니다.  정말 우리 나라는 소돔과 고모라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쉽게 성적인 유혹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사랑은 우리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간음은 우리들에게서 그 소중한 사랑을 빼앗아 갑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위하여 간음을 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간음은 우리들에게서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 갈 뿐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빼앗아 갑니다.

중국 북경에 가면 자금성이 있습니다.  옛날 중국의 황제가 살았던 곳입니다.  거기에 한국 여행객들이 관광할 때 어떤 사람이 "중국의 황제는 부인이 3천명이었대."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같은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행복했을까?"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부인이 3천명이었던 중국 황제는 과연 행복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아니었습니다.  답은 중국 황제는 정말 사랑을 모르는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귀하다'의 반대말은 '흔하다'와 '천하다' 입니다.  흔한 것은 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천한 것입니다.  사랑은 귀한 것이기 때문에 흔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3천이라는 것은 그 사랑이 귀한 사랑이 아니라 흔하고 천한 사랑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사랑은 하나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둘이 되면 사랑이 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둘로 나누게 되어 사랑은 1/2로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 깨어진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역설적으로 사랑은 줄어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3천명이었던 중국 황제는 1/3,000의 사랑으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중국 자금성에서 살았던 황제는 가장 극심한 외로움과 불행 가운데 살았던 사람일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참된 사랑의 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자녀인 우리들이 당신을 본받지 않고, 세상을 본받아 하나님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정직하지 못하고 순결하지 못한 것을 마음 아파하십니다.  부끄러워하십니다.  크리스천이란 세상을 본받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땅의 많은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알게 모르게 값싼 은혜주의를 주장하는 구원파 이단에 물들어 있습니다.  지극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구원 얻은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지 않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행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과 세상에 나타내 보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행해야 할 것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선 정직과 순결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너희들은 이 세상과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영적 예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영(靈)은 몸과 삶과 행함이 분리된 이원론적인 의미에서의 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영은 몸과 붙어서 몸이 영이고 영이 몸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전인적 존재로서의 인격체로 살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직하지 못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려고 발버둥질치는 것이 예배입니다.  순결하지 못한 세상에서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발버둥질치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시고자 하시는 영적 예배입니다.  정직과 순결 같은 거룩한 몸부림으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를 올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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