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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엡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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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엡 2:10)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부동의 진리입니다. 우주 만물 역시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만물과 같은 피조성격을 가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물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그 죄는 하나님 말씀의 동사(動詞)를 거역한 죄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얼마간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그 가능성에 기대해 보겠는데 완전히 죽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재창조가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재창조를 계획하셨습니다. 본문 말씀대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된 자입니다. 

본문 2장 10절에 『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 『 만드신 바라 』(포이에마, )는 하나님의 첫 창조 사역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9장 4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라고 했습니다. 

욥기 31장 15절에 『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재창조 사역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 『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에 『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고 했습니다.

Ⅱ.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도록 창조된 자들입니다. 

본문 2장 10절에 『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예비하셨다는 말입니다. 선한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여기 『 선한 일 』은 구원을 얻기 위한 어떤 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은 구원 얻은 자의 거룩한 삶의 행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선은 구원 받은 자의 객관적인 공통된 행실입니다. 

로마서 2장 7절에 『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3장 3절에 『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8절에 『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5절에 『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고 했습니다.
'선하다'라는 헬라어에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아가도스( )입니다. 다른 하나는 칼로스( )입니다. 
전자는 도덕적 선을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고, 후자는 사람이나 사물이 선하다고 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10장 11절이나 14절에 나타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할 때 이 선은 칼로스( )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인 선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 인간이기에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것입니다. 곧 그가 가진 절대적인 선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가도스( )'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사람, 착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선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선은 아가도스( )입니다. 그렇다면 이 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선으로 말미암는 초자연적인 능력과는 구별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선, 아가도이스( )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예비하신 잠재력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즉,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케되는 선입니다. 
선의 본질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선이 사람의 모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곧 선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일'에 해당하는 '엘고이스 아가도이스( )'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선은 구원을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앞에서 밝혔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선은 넓은 의미에서 구원받은 자들의 바른 관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대신관계) ② 인간과의 바른 관계(대인관계) ③ 만물과의 바른 관계(대물관계)를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8절에 『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 『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에 『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0절에 『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 3서 11절에 『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2장 7절에 『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고 했습니다.
디도서 2장 14절에 『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3절에 『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2절에 『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선을 행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악의 반대가 선입니다. 그렇다면 악이 무엇인가. 악은 선을 가장한 위선(僞善)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16절 말씀에 『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라고 했습니다. 

선한 양심이 선행을 가져옵니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래의 양심입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양심과 선행은 사탄에 의해 농락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초의 원시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양심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양심 즉, 중생인의 양심에서 나오는 행위가 바로 선행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1절에 『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입니다. 따라서 선한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29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9장 4-5절에 『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36절에 『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선한 일은 '하나님의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운동'에서 선한 열매를 봅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8-29절에 『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라고 했습니다. 선한 일은 교회운동을 위한 일체의 행위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 추구하는 것이 선입니다(마 6:33).

Ⅲ. 우리는 갈보리인(Calvary man)입니다. 

'갈보리(Calvary)'의 사전적 의미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인 '골고다(Golgotha)'의 라틴어 이름입니다. 
고향 시골에서는 가을에 심은 보리를 '가을보리'의 줄임말인 '갈보리'라고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곳은 '해골 곳', '골고다'로 기록되어 있는데 찬송가 135장(갈보리산 위에)의 영어 가사 2절에서 "To bear it dark Calvary"라고 하여 골고다 대신 갈보리(Calvary)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갈보리(Calvary)'와 같은 의미인 성경에 나오는 '골고다(Golgotha)'는 해골을 뜻하는 아람어입니다. 이것이 'Calvary'가 된 것은 '벗겨진 머리' 혹은 '해골'이라는 뜻의 라틴어 'Calva'에서 유래가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해골 모양의 언덕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장소'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형이 집행된 언덕은 예루살렘 성벽 밖의 길 근처에 있고 예수님이 묻힌 묘지와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갈보리란 말은 우리 성경에는 안 나오고 영어 성경에서도 흠정역(KJV) 누가복음 23장 33절에만 한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개역 한글 성경에는 히브리어로 '골고다'라고 표기해 놓았는데 이는 라틴어 성경에서 '해골 곳'을 '민둥산'의 뜻인 'Calvariae'로 번역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135장을 작사한 작사가는 2절 가사의 시에서 각운(脚韻)을 맞추기 위해 흠정역에 나오는 'Calvary'란 단어를 쓴 것입니다. 
영시를 보면 왜 골고다 대신 갈보리라고 썼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찬송가 135장 영시 2절)
Oh that old rugged cross, so despised by the world,/ Has a wondrous attraction for me; /For the dear Lamb of God left His glory above/ To bear it to dark Calvary. 
멸시함을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 귀한 어린 양이 영광 다 버리고 /험한 십자가 지셨도다. 

골고다는 '해골'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곳의 지명이 해골을 뜻하는 골고다입니다(마 27:33; 막 15:22; 눅 23:33). 
사도 요한은 『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요 19:17)라고 그 어원을 밝혀 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보리인'이라고 할 때 
첫째, '십자가인'이라는 말입니다.
둘째, '십자가의 증인'이라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 6절에 『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라고 했습니다. 

셋째,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1절에 『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고 했습니다. 
요일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넷째, 그의 친백성이 된 자들입니다. 
디도서 2장 14절에 『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 운동을 위해 지음 받은 자들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8-29절에 『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고 했습니다. 

여섯째, 장차 받을 영광의 면류관을 받은 자들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에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4절에 『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4절에 『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고 했습니다. 
일곱째, 금세와 내세에 약속된 계대적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에 『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고 했습니다. 
갈보리인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교단 설립명분의 역사주권을 견지하면서 선지학교와 세계에 흩어진 선교지역에 동참하는 영광을 쟁취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갈보리인이 되었다는 말은 세계교회 가운데 세계교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서울 신사동 갈보리교회와 홍천에 있는 4만 5천평의 성지를 허락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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